“무어라?”
“숲속에 들어갔을 때 이리저리 걸리는 옷이 거추장스러워 잠시 벗어둔다는 것이 이리 낯부끄러운 행색을 전하께 보이는 무례로 이어졌습니다. 전하께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옵니다.”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여야 하는 부모가 된 듯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들 자신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인간들도 할 수 있다, 그리 무심히 생각해 버릴 때가 있지 않겠나.
어차피 청의 청력이 좋으니 그냥 여기서 작게 주의를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였지만, 그건 또한 이무기에게도 들릴 수 있기에 자제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바라보는데 언뜻 청의 고개가 도겸 쪽을 향하는 듯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도겸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자네, 손에서 왜 피가 나는 것인가?”
“예?”
와중에 언이 놀라며 툭 치는 참에 그제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아귀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팔뚝을 묶어 지혈해놓은 것이 재차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 아까 베인 것이 아직 피가 덜 마른 모양입니다.”
“얼마나 깊게 베였으면 그래. 자네가 이러면 아리다 한 나는 엄살을 부린 게 되지 않나.”
“송구합니다.”
“왜 그게 내게 송구할 일… 아니, 됐네. 더 말 걸지 않을 테니 자네는 비범한 누이에게 집중하게.”
언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직접 도겸의 팔에 다시 깨끗한 천을 둘러 묶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찌나 세게 묶었는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낼 정도였다.
“저, 저하!”
“어허, 지혈이 우선이야. 조금만 참게.”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복잡했다. 도겸의 상처를 돌보던 언은 잠시 뒤 고개를 약간 물려 친우를 위아래로 다시 살폈다.
“한데 이상하군. 나는 그저 긁히고 쓸린 상처가 대부분인데… 자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돌아가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을 빙자한, 친우가 다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고 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청이를 여기 두고 어찌 가겠습니까. 저어하실 일이 아니니 심려치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기실 그만 조용히 해 달라는 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도겸의 뜻을 단박에 이해한 언이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오라버니를 비롯하여 여기 계신 분들이 사냥에 한창이실 무렵, 대비마마께 인사를 드리고 잠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특유의 고저 없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지만 청은 존재 그 자체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을 지닌 이였다. 그 잔잔한 목소리는 부글부글 끓던 도겸의 긴장을 가라앉히기 충분했다.
“그런데 대비마마께서 환궁하시기 전부터 모든 부인들께서 좌상 대감댁의 여식만을 찾기에 저 또한 대비마마의 환궁을 배웅한 뒤부터는 마찬가지로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곳에서 몸종도 없이 홀로 움직이다니 의아하기도 하였고, 그리하여 소녀는 조금 걷고 싶던 차에 마침 조 낭자를 찾아본 것입니다.”
청의 진술이 이어지자 저만치서 구경하던 여러 중신의 부인들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뜨끔한 면면들이 내보이는 반응들은 청이 지금껏 내놓은 진술이 사실에 가깝다는 방증이 되었다.
“그러다 숲에서 조 낭자가 한 손으로 꿩을 잡고는 직접 화살로 찔러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무어라?”
이어진 진술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문제가 있다면 조설아 같이 가녀린 여인이 꿩을 한 손으로 잡는다는 사실을 보통의 사람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도겸은 입 안이 바짝 마르다 못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한 손으로 꿩을 잡았다고 하였느냐? 저 아이가?”
역시나 바로 이해하지 못한 임금이 되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있다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기까지 하였다.
“예. 저 손으로 꿩의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화살을 들고 있었나이다.”
“아, 아닙니다! 소녀는 그런 흉측한 짓을 저지른 일이 없사옵니다!”
역시나 조설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변호했다. 모두가 눈을 굴리며 혼란해 하는 와중에도 누구보다 맑은 눈을 한 청은 억울해하거나 조설아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며 해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겪은 바를 고스란히 전달할 뿐이었다.
“붉은 깃 세 개가 달린 화살이었사옵니다.”
그녀가 덧붙인 말은 참인 진술임을 모두가 바로 알았다. 붉은 깃의 화살. 바로 조익환이 즐겨 쓰는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위상이 대단한 좌상이 쓴다 하여 다른 이들은 함부로 따라 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였지만 턱수염을 만지작대며 뭔가를 생각하던 임금이 청에게 계속하여 진술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제가 조 낭자의 손목을 잡은 일은 사실이오나, 기실 그것은 다른 겁박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꿩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 낭자가 지나간 길에 이미 꿩의 사체가 여럿 놓여있어 제가 모두 묻어주며 따라갔던 터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뭐? 그럼… 그 꿩의 사체를 어디다 묻었는지도 기억하느냐?”
“예. 전하께오서 직접 보고자 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가 사체를 묻은 열두 곳 모두를 안내할 수도 있사옵니다.”
임금이 미간을 구기며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의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내용임에도 물적 증거가 확실한 청의 주장에 점점 설득력이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설아는 철저히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근거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만 가득하지 않았나.
“심 낭자가 제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입니다. 제가… 제가 어찌 꿩을 맨손으로 잡겠사옵니까!”
“조 낭자의 옷을 조사하여 보십시오. 손수 활도 없이 화살을 꿩의 몸에 꽂았으니 어딘가엔 피가 튀어있을 것입니다.”
“그, 그건 겉옷을 모두 내버린 심 낭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조설아가 즉각 반박했다. 또한 일반적인 통념상으로는 손에 물 한 번 제대로 묻혀보지 않은 듯한 조설아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라 왕의 시름이 깊어졌다. 그러다 손을 들어 조설아의 입부터 다물게 했다.
“조가 설아는 심가 청의 진술이 모두 끝나고 과인이 다시 물을 때까지 잠시 차례를 기다리도록 하라.”
“…송구하옵니다.”
조설아가 입술을 떨며 움츠렸다. 왕은 곁에 서 있던 상궁을 시켜 그 자리에서 조설아의 옷을 살피게 하는 반면 군사들을 보내 숲을 수색하여 청이 버린 옷을 찾아오게 하였다.
청은 내금위장이 보이는 사냥터의 지도를 보고는 잠시 생각하다 자신이 옷을 내버린 곳과 함께 꿩을 묻었다는 열두 곳까지 모두 짚어주었다.
“그래. 금군들이 증좌를 찾아오는 동안 심가 청은 계속하여 진술하도록 하여라.”
입을 열도록 허락만 하면 조설아는 울음부터 터트리니 임금도 비교적 침착한 사람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리고 발언의 기회가 주어진 청은 기회를 허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는 소녀,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사옵니다. 세자빈 자리를 포기하라는 말 또한 왕실 윗전들께서 엄중히 다루시어 정하실 일을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명을 어기고 다른 처녀에게 간택을 포기하라,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겠나이까.”
청의 이야기를 듣던 언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마도 괄목상대란 말은 선현들께서 저런 여인을 나타날 것을 미리 예지하여 지어둔 말이 아닐까 하는데.”
“같은 생각입니다.”
갑자기 잇따라 일어난 사건들로 인하여 마른하늘에 친 벼락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였다. 모두가 세자가 습격 받은 일에 대하여, 그리고 근래 한양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두 소녀의 충돌에 대하여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가 감히 전하께서 사냥 중이신 자리로 뛰어든 것은….”
주저 없이 말을 잇던 청이 약간 틈을 두며 살짝 고개를 돌려 도겸을 바라보았다.
“저와 몸싸움을 벌이던 조 낭자가 갑작스레 제 오라비가 죽었을 수 있다, 그런 언질을 준 탓이었습니다.”
“…무어?”
집중하여 듣던 임금이 크게 놀라 조설아를 보며 그제야 그 입의 봉인을 해제하여 주었다.
“조가 설아는 답하라. 저 아이의 말이 참이냐?”
“그,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그렇지 않다면 소녀가 어찌 제 오라버니가 습격을 당한 바를 알고 그곳으로 뛰어갔겠사옵니까.”
“전하, 허언을 귀담아 듣지 마시옵소서. 소녀는 꿩을 죽인 바도 없습니다. 심 낭자가 미리 꿩을 잡아 묻어두고 소녀를 모함 하려는 것입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소녀들의 싸움은 예상 밖의 부분에서 심각한 사안으로 이어졌다. 청의 진술에 따르면 조설아는 세자와 최도겸이 습격 받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안다면 그 정보를 얻을 곳은 당연지사 조익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히 우발적으로 벌어진 다툼에 대해 반은 재미 삼아 시비를 가려주려 만들어진 장이었으나 그 시점부터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다.
“…좌의정 조익환과, 해주 목사가 이 자리에 없으니 직각 최도겸에게 대신 책임을 묻겠다. 앞으로 나와 서도록 하라.”
결국 임금이 편전에서와 같이 심각한 얼굴로 조익환과 도겸을 현장으로 소환하였다. 도겸은 당장이라도 바닥에 눕고 싶을 만큼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명에 즉각 앞으로 나가 섰다. 청의 곁이었다.
“신 조익환,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나왔나이다.”
조익환도 조설아의 곁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강 건너 불구경 하던 구경꾼들은 이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한창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현장을 빙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좌상은 답하게. 어찌 자네의 여식이 세자와 최 직각이 습격당한 일을 알고 있던 것인가?”
“그리 하문하심은 곧 심 목사의 여식이 발언한 것이 사실임을 전제로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과인은 사실인지를 묻는 것이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도무지 모르는 사실입니다.”
조익환은 늘 그렇듯 여유를 잃지 않고 느긋하게 청의 주장을 탈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