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86)화 (71/197)

“…이만하니 다행이다.”

혹시 벼락이 떨어질까 임금을 엄중히 지키던 군사들이 뒤늦게 쓰러져 있는 살수들을 차례로 제압해 체포했고, 자유로워진 임금은 하나뿐인 아들을 살폈다. 그러곤 함께 고개 숙인 도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가 없었다면 정말 큰 일이었겠어. 세자를 지켜 주어 고맙네.”

“망극하옵니다, 전하.”

꿩 사냥은 난데없는 기습으로 인하여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데다 큰 부상도 입지 않았건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함이 남았다.

“습격한 일당들을 모두 의금부로 압송하여 사건의 진위를 밝혀라!”

아들의 피를 본 임금이 분노하여 내금위에 명령했고 내금위장이 명을 받들어 빠르게 내금위군들을 지휘했다. 여기저기 베이고 화살에 다친 괴한들이 질질 끌려 나갔다.

“저하!”

와중에 임금의 뒤를 따르던 조익환이 마찬가지로 세자와 도겸을 걱정하며 다가왔다.

“예체가 많이 상하신 듯합니다.”

다행히 숲을 나가기 전 왕을 따라다니던 의원이 있어 간단한 처치를 받던 언이 고개를 들었다. 언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표정은 어느새 굳어진 채였다.

“…그저 넘어져 까지고 쓸린 생채기가 전부입니다, 좌상.”

“이만하길 참으로 다행이지요.”

어쩐지 경고조로 들린다면 그저 기분의 문제일까.

“이번 일은 엄중히 다루어 꼭 배후를 밝혀내야겠습니다.”

아마도 내도록 조익환의 짓이리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 그리고 단순히 겉으로만 보기엔 세자를 걱정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조익환은 꼬리를 밟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듯 당당해 보였고 말이다.

“…맞습니다.”

말이 없던 언이 그제야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떤 자가 내 목숨을 노린 것인지, 꼭 명명백백하게 밝히어 처단할 것입니다.”

“그리하여야지요. 소신 또한 좌시하지 않고 성심을 다하여 이번 일을 파헤치겠습니다.”

믿으라는 듯 굳은 얼굴로 다짐한 좌상이 다시금 고개를 숙인 뒤 임금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세자는 물론 도겸도 무어라 말을 하며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그저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큰 일을 겪은 터라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하, 이제 그만….”

하지만 사방이 트이지 않은 숲은 여러모로 위험하기에 탁 트인 곳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도겸이 우선 세자를 안전한 사냥터 밖으로 나가도록 하려던 차, 누군가 뒤에서 덥석 도겸을 끌어안았다.

“크억…!”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또 다른 기습인 줄만 알았다. 손에 아무런 무기가 없어 난처하던 차, 허리 앞으로 모인 하얀 두 손이 보였다. 그리고 등 뒤로 전해지는 온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이 작은 두 손이 저를 붙들기 직전까지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청이냐?”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곧바로 돌아선 도겸은 청을 보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치마와 저고리는 어디다 둔 것인지 품이 큰 남성의 저고리와 바지를 걸친 것도 이상했지만 그것을 탓하기도 전에 숲을 굴러다니기라도 했는지 전신의 꼴이 엉망이었다.

다 풀어헤친 머리엔 군데군데 마른 낙엽이 붙어 있었고, 신발도 없이 더러운 버선발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귀신을 보는 줄 알았다.”

곁에 있던 언마저도 자객들을 만났을 때보다 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너, 어찌하여 이런 꼴이 된….”

“아버지!”

그 이유는 굳이 청에게서 듣지 않아도 금방 알게 되었다. 웬 여자가 빽 소리치며 조익환에게 뛰어들어 안긴 탓이었다.

“설아야!”

반사적으로 딸을 끌어안은 조익환은 물론 엉망이 된 조설아의 상태를 보고 사색이 되어 물었다.

“이, 이게 다 무슨 꼴이냐?”

벌써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신 조설아가 청을 손가락질하며 고자질했다.

“심 낭자가… 저를 이리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그에 상황을 수습하던 군사들이며 익위사들은 물론 대신들과 임금까지 멈추고 이쪽을 주시했다.

“…무슨 일인가. 어린 소저들이 이곳까진 어찌 들어온 게지?”

도겸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

“그래. 지금부터 너희들은 각자 사정을 말해 보아라.”

본래는 사냥이 끝나고 각자의 성과에 따라 간단히 시상하며 단합을 도모했겠지만 오늘은 또한 달랐다.

사냥터 앞에 마련된 장막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차분하게 자리에 앉은 왕이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어린 소녀들에게 명령했다.

“대체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즐거운 날 뜬금없는 상황에 벌어진 재판, 그리고 심판대 앞에 무릎 꿇은 두 소녀는 당연하지만 심청과 조설아였다. 얼떨결에 즉석에서 재판을 보게 된 임금 또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거기, 좌상의 여식부터 고하여라.”

여린 소녀들은 막 꽃잎을 퍼트리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섬세하고 예민해 보였다. 붉은 입술을 꾹 다문 뽀얀 뺨엔 비밀이 가득 들어 있는 듯했다.

자연히 소녀들에게 명령하는 임금의 어조도 편전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재판을 진행하는 근엄한 임금이라기보다는 점잖게 싸움을 말리는 아버지처럼 다정했으니 말이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소녀 조가 설아라 하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전하의 성심을 어지럽힌 죄는 어떤 식으로 물으셔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하오나….”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는 조설아는 잘 배운 규수의 표본과도 같았다. 가련한 소녀는 금세 눈물을 뚝뚝 흙바닥에 떨궜다.

단아하게 말을 잇던 목소리는 어깨와 함께 잘게 떨렸다. 보고 있는 누구라도 달려가 당장 보듬어주고 싶을 만큼 유약한 모습이었다. 근처에 서 있다 나직이 탄식을 터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물론 한 편에 서서 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겸과 언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탄식을 하기는 했지만 그 결은 여타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니 말이다.

“저리 작고 가련한 여인이, 이무기라고?”

“예.”

“하… 꿈을 꾼다 생각하기엔 다친 상처가 쓰리니 꼬집어볼 필요도 없고 말이야.”

“아마 저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는 한 매일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래. 그 말이 맞겠지.”

유일하게 비밀을 공유하는 인간이자 두 사내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을 무렵, 조설아가 상당히 제 입장에만 편향된 주장을 펼쳤다.

“소녀는 그저 사냥에 나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사냥터 바깥쪽을 걷고 있었사옵니다. 하온데 갑자기 나타난 심 낭자가 제게 시비를 걸어온 것입니다.”

“저 아이가 무어라 하며 시비를 걸었더냐?”

“갑자기 제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더니 제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모진 말들을 쏟아 내었습니다. 지난번 저자에서 심 낭자의 몸종이 저를 고의로 밀쳐 제가 크게 다칠 뻔한 일로 제 몸종이 심 낭자의 몸종을 매질한 일이 있었사온데, 그 일을 두고두고 벼르고 있던 것입니다!”

청에게 제대로 사정을 들을 틈도 없었다만 조설아의 입에서 나온 주장이 사실이 아닐 것임은 확실했다. 그로 인해 도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자연히 그의 시선이 곁에 고요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청에게로 향했다. 조설아가 울분을 토해 내며 고하는 말들은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기다 세자빈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며 포기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손목을 부러트리겠노라 겁박까지 하였습니다. 하여 소녀는… 소녀는….”

늘 생각하는 바였지만 참으로 신기했다. 작은 어깨에 가는 체구만 보면 온몸으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어야 할 것 같지 않나.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양가감정까지 들게 하여 괜히 오싹해졌다.

“그리하여 결국 몸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손목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려다 바닥으로 넘어져 이리 된 것이옵니다.”

“네가 고하는 바가 사실인지 확인해 줄 목격자는 없는 것이냐?”

“예. 그것이 소녀, 어찌나 분통하고 원통한지 모르옵니다, 전하! 비록 본 사람은 없으나 잡힌 손목은 지금도 뼈가 시리고 살갗이 짓무른 듯 쓰라립니다. 여기 이리 멍이 든 것을 보아주소서!”

정말 당하긴 했는지 소매를 걷어 푸르게 변한 팔목을 보이며 눈물을 쏟던 조설아가 기어이 한쪽으로 무너지듯 흐트러져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보는 이들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청을 완전한 악인으로 만들고자 함이 분명했다. 역시나 그 모습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던 임금이 혀를 찼다.

“거기까지 하여도 좋다.”

그러나 어떤 평을 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불러 조설아를 부축하게 하거나 치료케 하지도 않았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둘 뿐이었다.

“이제 해주 목사 심오균의 여식이 고하여라.”

드디어 청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임금은 조설아에게서 대강의 상황을 듣고도 다시 청에게 자세히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너는 어찌하려 그 자리에 갔는지, 좌상의 여식에게 정말 손찌검을 하였는지도 소상히 소명하도록 하여라.”

“예, 전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마치 이 사건과는 전혀 별개인 사람처럼 표정 없이 가만 앉아 있던 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소녀, 심가 청이라 하옵니다.”

“그런데 너는 차림새가 어찌 그런 것이냐? 아까 잠시 인사를 나눌 때와는 다르구나.”

“그것은, 옷깃이 자꾸 마른 가지에 걸리다 보니 그것들이 부러지면서 고통스러울 듯하여….”

도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긴장했다. 일찍이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 그 장소에 없던 관계인들은 절대 끼어들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다.

조익환과 마찬가지로 첨언하거나 변호하여도 좋다는 명령이 있기 전까진 판에 끼어들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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