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더 이상 무리하게 꺼냈다간 심장이 완전히 깨질지도 모르니까.
“용이라는 게 거짓말이거나 이무기만도 못한 것인가?”
청이 가볍게 뛰어다니며 방어적으로 굴자 조설아가 깔깔대며 마구 번개를 내리꽂았다.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럼 그냥 여기서 타죽어. 죽어 버리라고!”
대신 번개를 맞은 나무들이 까맣게 타들어 갔고 나무들의 비명은 더 커져만 갔다. 나름대로 나무는 피해 다니고 있었지만 숲속에서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숲에서 나무 전부를 구한다는 건 아무리 청일지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능력을 꺼내지 않는 이유는.”
내내 도망치던 청이 기습적으로 번개를 피해 조설아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자아도취에 빠져 마구잡이로 번개를 부르는 조설아의 손등을 나뭇가지로 후려쳐 칼부터 빼앗았다.
조설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청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지만 청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저돌적으로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손을 피하며 조설아의 목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아악!”
쿵 소리가 날 만큼 강한 충격이 일었다. 길을 잃은 번개는 애꿎은 나무만 한 그루를 더 태우며 수그러들었다. 청은 강력한 힘으로 조설아를 찍어 누르며 나직이 읊조렸다.
“격이 낮은 존재에게 굳이 힘을 다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격한 움직임에 절로 풀려 흘러내린 물결 같은 머리칼이 조설아에게 물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쉽게 붙잡히는데 말이야.”
그냥 이대로 죽일까. 어차피 이무기로 남든 용이 되든 종족의 수치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청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조설아의 몸을 전부 먹고 나면 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무기로 남을 뿐이야.”
“흐윽!”
“지키는 여의주는 어디에 있지? 조익환의 손에 있나?”
“닥… 쳐, 닥치라고!”
조설아가 반격을 시도했다. 쏟아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잡아당기기에 청도 조설아의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결국 두 여인이 바닥을 구르며 서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겨우 인간에게 복종하며 따르는 거냐고. 네가 뭐가 아쉬워서!”
“누가 할 소리야? 인간인 척 같잖게 구는 게 누군데!”
“너만 멈추면 나도 더 그럴 필요 없어. 더는 살생하지 마.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벼락이 연달아 떨어지다 보니 소란이 적지 않은 터라 역시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설아와 청은 치고 박고 구르며 사납게 싸우면서도 인간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먼 곳으로 피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낭떠러지 직전에 외따로 떨어져 있던 꿩 한 마리가 난데없이 튀어나오며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청은 그대로 두면 싸움에 휘말릴 것 같은 꿩을 재빨리 품에 안고 뒤로 물러나 비탈길 아래에 내려주었다.
“너, 용 아니지?”
여전히 청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은 조설아가 씩씩대며 따라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멍청하고 아둔하면서 어떻게 네가 용이야?”
“무슨 소리야?”
청이 의아해하자 만신창이가 된 채로도 신나게 웃던 조설아가 별안간 정색하며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청의 눈엔 균형이 깨져 이도 저도 아닌 듯, 괴이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너랑 내가 쓸데없이 시간을 태우는 동안 네 오라비라는 인간은 지금쯤 무슨 일을 겪고 있을까?”
“뭐?”
“내가 왜 벼락까지 떨어트리면서 널 붙들어놨겠어.”
제가 붙들렸던 것인가. 내내 자신이 조설아를 잡아두고 있다 생각했기에 청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나는 너와 제대로 이야기를 하든, 붙어보든 해 보고 싶었을 뿐이야.”
어차피 도겸도 청으로 하여금 이무기만 잘 지켜봐 달라 하지 않았나. 청이 무신경하게 굴자 조설아가 더욱 날카롭게 자극했다.
“그사이에 네 오라비가 죽었대도?”
“…죽다니.”
그제야 청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
“하… 끝이 없네.”
지친 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겸 또한 청과 같이 용은 아닌지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초반에 화살을 두어 개씩 쏘아 버린 덕에 화살이 부족해 어느 순간부터는 빼앗은 검으로 적을 하나씩 베고 있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그럭저럭 괜찮네. 자네는?”
피하고 막아도 여기저기 베이는 건 별수 없었다. 청이 첫 만남 때 날린 얼음 창에 다쳤던 팔이 또다시 부상을 입었지만 도겸은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괜찮습니다만… 조금 이상합니다.”
손등까지 흘러내린 뜨끈한 피 때문에 손잡이를 잡는 게 번거로웠다. 피를 닦아낼 틈도 없이 괴한들이 연이어 들이치느라 몇 번이나 검을 놓칠 뻔했다.
악력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도겸은 전방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쥔 검으로는 요령 좋게 놈들의 신경을 끊어놓았다.
“또 무엇이? 아니, 이미 이상한 상황인데 여기서 더 이상할 게 있단 말인가?”
“제가 가늠한 실력에 비해 적들이 너무 약하게 굴지 않습니까.”
“자네가 약한 게 아니고?”
세자가 지친 기색으로도 아직 농을 던질 기력이 남은 듯하여 도겸은 안심하며 답하였다.
“소리도 없이 나타나서는 그저 대련을 하듯 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죽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도겸의 말을 이해했는지 세자가 막 발로 적의 복부를 강타하며 수긍했다.
“하긴, 그 부분은… 그보다 나는 자네가 지금껏 버틴 게 더 용하단 말이지.”
“저하, 뒤쪽입니다!”
앞에서 밀려오는 공격을 감당하느라 세자의 등 뒤가 비었다. 허점이 생긴 것을 알아차린 적이 검을 높이 들며 뛰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돌아보던 언이 나무뿌리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미처 거리를 좁히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언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의 몸에서 무자비하게 화살을 뽑아냈다.
피가 묻은 화살을 방패처럼 쓰고 있던 활시위에 걸고 강하게 당겨 쏘아 보내는 데까진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크억!”
적이 언을 가르기 전에 화살이 먼저 적의 미간을 꿰뚫었다. 웬만하면 생포하여 사주한 자를 실토하게 하려 했지만 감히 세자를 해하려 드는 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저하!”
도겸은 만사 제치고 달려가 언을 챙겼다. 세자는 짓쩍게 웃으며 도겸의 손을 잡았다.
“자네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둘로 갈라졌겠어.”
“예체에 흠이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에 언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옷을 털어냈다.
“왜 그러나. 둘이 되면 체감하는 일과가 반일 터인데.”
“네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몸이 하나임에 감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도겸과 언은 다시금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족히 스물은 되던 자들이 이제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수적으로는 이쪽이 훨씬 열세인데 어찌 뒷걸음질 치는가?”
언이 적들에게 물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즈음 적의 뒤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들이냐!”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은 내금위군이었다. 불청객들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검을 뽑아 든 이들이 사방에서 적들을 포위했다.
“세자 저하께서 기습을 당하셨다!”
“세자 저하를 모셔라!”
이내 말을 탄 왕과 함께 사냥을 하던 대신들까지 나타났다. 그즈음 급속도로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런 참에 나무 그늘에 공기마저 가라앉은 숲속이 캄캄해지는 것은 더욱 빨랐다.
“언아!”
왕이 소리치며 꿩을 잡기 위해 들고 있던 활을 괴한들에게 겨누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어궁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그때 어시보다 빠르게 날아온 화살 하나가 괴한의 몸을 꿰뚫었다.
“저하!”
빨간 화살 깃의 주인, 조익환이었다. 그는 바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조익환이 언을 구하려는 듯 화살을 들자 호위군에게 둘러싸인 괴한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각자 쥐고 있던 검을 스스로 목에 대었다.
그 순간 낮게 울던 하늘이 기어이 분노를 표하며 꽈르릉하고 매서운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려댔다.
“전하를 모셔라!”
번개 때문에 눈앞에 번쩍번쩍한 잔상이 이는 와중에도 언과 도겸은 괴한들을 보며 경악하기 바빴다.
“안 돼!”
“멈추어라…!”
서둘러 말리려 했건만 여기저기서 붉은 피가 비산하며 괴한들이 픽픽 쓰러졌다. 도겸은 그나마 살아 혼절한 괴한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멀리 차 냈다.
그러나 멀쩡한 이들이 저리 허무하게 죽어 버릴 정도라면 지금 목숨을 부지한 이들 또한 같은 결정을 할 공산이 컸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은데.”
우르르 뛰어온 군사들이 언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러나 세자는 도겸을 먼저 챙겼다.
“우리 최 직각이 오랜만에 붓이 아닌 검을 들어 내일 앓아누울지도 모르겠네.”
책을 읽기 위한 체력도 필요한 법인지라 오래도록 수련해 온 도겸은 조금 억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금위군과 어긋나거나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때는 정말 저나 언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지라 이런 농쯤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한데 이 난데없는 천둥번개는 무어란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리저리로 뻗은 나뭇가지 때문에 산산조각이 난 하늘을 유심히 살핀 언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그러진 않을 모양이군.”
난데없이 내리친 벼락은 몇 번인가 굉음을 내며 혼란케 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벼락이 떨어진 곳도 반대편 숲이거나 더 먼 곳인 듯했다. 다행히 급히 피신하지 않아도 되었다.
혹시 사냥터 초입에 남겨두고 온 청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당장 뛰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청이라면 같은 용을 만나는 게 아니고서야 능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나. 잔뜩 걱정이 되면서도 세자의 곁에 있는 게 더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알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