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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84)화 (69/197)

기어이 조설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뜨끔했거나, 자극이 쌓여 슬슬 임계치를 넘어서는 중인 듯했다.

“아마 죽었겠지? 그럼 너는 조설아의 시체를 먹으면서 그 모습을 유지 중인 건가? 조설아인 척 살아가면서?”

“…닥쳐.”

“조설아는 네가 죽였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설아, 아니 이무기가 튀어 올랐다.

손엔 어디서 꺼냈는지 제법 긴 칼을 쥔 채였다.

***

“그러고 보니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이젠 대화할 적에 어긋나는 구석이 거의 없더군.”

“예?”

“청이 아씨 말일세.”

언이 장난스레 청에게 ‘아씨’란 호칭을 붙여 말했다. 그녀가 사람이 아닌 기묘한 존재라는 인식을 이렇게 드러내고픈 게 아닐까. 도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매일매일 일취월장 하다못해 오전에 보고 오후에 보면 또 달라져 있더군요. 어느 순간엔 적응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사실 아직도 청이를 볼 때마다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그리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자네도 그런데 나는 어떻겠나.”

돌연 꿩을 발견하고 재빨리 활시위를 당겼던 언이 다시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수풀이 흔들리기에 긴장했건만 빼꼼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애꿎은 멧비둘기였다. 아마도 언이 끝까지 침착하지 않았다면 단박에 몸통을 관통당해 죽었을 것이다.

“근데 말이지. 자네는 그 아씨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던가?”

“예?”

질문을 받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도겸은 언이 말하는 바를 얼추 이해했음에도 모른 척 되물었다.

“어떤 생각이 들다니요?”

“아니, 신기하다 여기는 이유 중에 말이야. 나는 그 여인이 있으면 왠지 너른 대양을 마주한 듯 마음이 참 심온해지거든. 어쩐지 숙연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마찬가지였다. 청의 눈과 머리칼은 밤만 되면 바다를 응축해놓은 양 짙푸른 빛을 띠지 않나. 도겸은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저하께서 청이를 처음 만나셨을 적에 그 아이의 푸른 머리 색과 눈을 보신 탓이 아닙니까? 그때만 하여도 밤이면 속수무책으로 푸르게 변하는 그 아이의 머리카락 때문에 제가 숨기는데 꽤 애를 먹었으니 말입니다.”

“어? 어… 그랬나?”

언이 움찔하며 도겸의 눈치를 살폈지만 도겸은 약간 흔들리는 수풀 안쪽을 살피기 바빴다.

“밤에 천변에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근데 그… 워낙 어두운 사위에 본 것이라 긴가민가하지 않았나. 귀신을 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아, 그러셨지요.”

도겸은 언이 갑자기 자신과의 대화보다 사냥에 더 집중하며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뒤로도 꿩을 찾던 세자가 결국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법 앞서서 왔다 생각했는데….”

이리저리 마른 수풀을 헤집던 언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꿩이 씨가 말랐나. 한 마리만 잡으려 해도 보이질 않으니 원.”

“그러게나 말입니다.”

함께 꿩을 찾던 도겸이 긍정하며 씁쓸해했다. 저만치서 꿩을 몰아오기로 한 익위사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최소 쉰 마리, 못해도 서른 마리는 풀 텐데.”

이러다간 꼼짝없이 또 벌주를 마시게 될 것 같았다. 이미 술 한 잔에 속이 상당히 메스꺼운 터라 도겸은 더 이상 벌주에 취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마셔본 벌주는 이름답게 여파가 상당했다. 약간의 두통까지 내내 그를 따라다니고 있지 않나. 잠시 이마를 짚던 도겸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저하.”

“음?”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하다든지.

“…어, 듣고 보니.”

사방을 둘러본 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몰이꾼들이 함흥차사여도 이렇게 함흥차사일 수 없지.”

활로 꿩을 잡기로 한 규칙이 있지만 상황이 달라지자 언의 손이 절로 허리춤의 검집으로 옮겨갔다. 검술을 즐겨 수련한 이다운 행동이었다.

“근방의 꿩을 놓치더라도 이해해 주게.”

사전에 도겸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넨 언이 크게 소리쳤다.

“익위사!”

그 부름에 나타난 것은 익위사들이 아닌, 온통 검은색 천으로 얼굴까지 가린 괴한들이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을 만큼 상당히 단련된 자들임이 분명했다.

언과 도겸은 반사적으로 서로의 등을 맡기고 섰다. 사냥 내기이다 보니 반칙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왕을 제외하고는 호위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보기 좋게 말려든 처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하여 당혹감에 평정심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는 바보가 되진 않았다. 근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이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예감을 늘 하고 있었던지라 어쩌면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봄이 더 맞았다.

약간의 걱정이 있다면 대충 세어보기에도 적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입을 봉한 것을 보니 사주한 자는 듣지 못할 것 같군.”

도겸과 마찬가지였는지 등 뒤의 언이 태연하게 굴었다.

“자네는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 말게.”

“제가 모실 터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시기에 언이나 도겸을 위협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누군지 묻기엔 어차피 입만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 적당히 살려서 배후를 알아내도록 해 볼까.”

“옳으신 결정입니다.”

그럼에도 증좌는 필요하기에, 최대한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세자처럼 만일을 대비해 따로 검을 패용하지는 않은 터라 도겸은 여전히 활을 든 채로 적들의 다리를 겨누었다.

그리고 점차 거리를 좁히던 괴한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

도겸에게 검술을 배울 때면 그는 칼날이 위로 뻗어 나가는 방향으로 잡게 했었다. 그런데 이무기는 예리한 날이 새끼손가락 쪽으로 향하게 잡고 있었다. 훨씬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무기가 이렇게 살생을 저질러도 되는 거야?”

따지고 보면 이무기는 수많은 시험을 거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생물이었다. 아무리 용의 몸에서 난 청이라 하여도 또한 진정한 용이 될 때까지 최대한 몸을 사린 바가 있었다.

단단한 비늘이 돋지 않아 무르고 약한 몸에 딱 그만큼의 정신상태인지라 한 번 부정한 기운이 묻으면 쉽게 씻어내기 어려운 생물이 바로 이무기이지 않나.

어찌 용이 된다 하여도 오래 살 순 없을 터였다. 물론 강한 용이 될 수 없는 요인엔 수만 가지쯤 존재했지만 코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이무기의 경우엔 거의 확정적이라 볼 수 있었다.

“이무기로 죽을 셈이야?”

“상관 마.”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모은들 몸에서 돋아날 비늘보단 아름답지 않을 텐데. 그걸 보고 싶지 않아?”

“그래. 이제 알겠다. 너… 용이었구나!”

이무기가 칼을 한 번 크게 휘두를 때마다 큰 나무의 굵은 줄기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자잘한 나뭇가지는 버틸 새도 없이 썰려 나갔다. 침착하게 대꾸하긴 해도 이무기의 눈엔 당혹감이 그득했다.

“용이 왜 여기에 있지?”

신물에 대해서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자존심 강한 두 여인은 서로에게 답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며 서로를 재었다. 정확히는 서로가 가진 힘의 크기를 가늠했다.

“나만 베든가 해. 애꿎은 나무들 상처 내지 말고.”

“닥쳐!”

청의 귀엔 나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기에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뿐일까. 눈앞으로 쇄도하는 칼날을 피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흘러드는 수많은 냄새들, 촉각으로 느껴지는 희미한 바람의 결까지 하나하나 전부 느껴졌다.

그나마 한적한 숲이라 괜찮았지만 처음 순이와 장터에 나갔을 때 청은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바 있지 않나.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역시 물속이 편해.”

물론 수천 년을 살아온 청에겐 이러한 자극들이 익숙했고 또 익숙하도록 태어나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보통의 사람이 그녀가 느끼는 것과 같이 느꼈다면 아마 잠시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분명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조설아야. 내가 조설아라고!”

청이 한 대도 맞지 않자 기어이 약이 오른 이무기가 무리해서 무르익지 않은 힘을 꺼냈다. 삽시간에 모인 구름이 해를 가리고 서로 으르렁댔다. 번개를 내리칠 작정임이 분명했다.

“조설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먹어치운들, 너는 조설아가 못 돼.”

“그러는 너는 왜 땅에 떨어졌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날 방해하지?”

일촉즉발, 금방이라도 정수리에 뇌화가 쏟아지기 직전이었음에도 청은 쉽사리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득히 어린 이무기가 측은해졌다. 그녀는 이무기의 칼날에 잘렸지만 제법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도겸과 단련할 때 쓰던 목도보다야 당연히 부족했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청은 손날로 잔가지를 쳐 내고 기둥만 남겨 쥐었다.

“너는 그럼, 설마 이무기씩이나 돼서 용이 되는 게 아니라 겨우 세자빈이 되는 게 목표야?”

“용이 되어서 좋을 건 뭔데…!”

단아한 한복을 입은 조설아가 기괴하게 목을 꺾으며 눈을 부라렸다. 일순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더 길게 자라났다.

청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조설아가 이무기라는 사실은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아둔한 인간들 틈에서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겠지.”

“아등바등? 아니? 난 그냥 이 땅을 지배할 거야. 그게 뭐가 나쁜 거라고 감히 날 막느냔 말이야!”

다행히 아무도 없다. 안도하기가 바쁘게 청이 즉시 튀어 올랐다. 아스라이 뛰어오르는 몸의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청이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조설아의 노란 눈동자가 청을 향했다.

“왜 능력을 꺼내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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