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이 늙은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아주 흡족하였다.”
어쩌면, 노인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오래전 손에 쥐고 휘두르던 권력의 맛이 그리웠던 것일까? 그즈음까지 미리 대비와 관계를 돈독하게 쌓아두라는 도겸의 조언이 역효과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청은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가끔 이리 허물없이 말벗을 해 줄 수 있겠느냐?”
대비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을 보면 확실하지 않나. 청은 공손히 답하였다.
“언제든 불러주시옵소서.”
저도 제법 즐거운 대화였지 않나. 수명이 다른 이종족이라 하여도 시기에 따라 깨닫는 바가 비슷한 듯하니 이 땅에서는 노인들 정도면 제법 대화가 될 것 같았다.
“기이한 일이지. 맹랑한 아이와 대화를 하였는데 묘하게….”
내도록 청을 바라보던 대비가 언뜻 탁한 눈동자에 이채를 띠며 중얼거렸다.
“또래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말이야.”
한낱 미물이라 생각했던 인간도 긴장케 할 때가 있음을, 청은 대비를 보며 배웠다.
***
“그러고 보니 좌상 댁 따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함께 차나 마시면 좋을 터인데.”
찬바람을 오래 쐬지 못하는 대비가 먼저 환궁하고 난 뒤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조설아만 찾아댔다.
“곧 빈궁이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맞지요. 벌써부터 그 일을 축하하겠다면서 팔도에서 귀한 선물을 들고 오는 자들이 대감댁에 줄지어 서 있다 들었습니다.”
왕과 세자, 그리고 주요 대신들이 모두 사냥에 나간 참에 사냥터에 따라온 부인들은 대비도 없겠다, 더 크게 떠들어댔다. 여기저기서 가식적인 웃음꽃이 피었다.
“한데 이번에 마찬가지로 처녀 단자를 넣은 해주 목사의 여식이 범상치 않다던데요.”
물론 거기에 낄 의무가 없는 청은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 때까지 대충 상대해 주다 슬쩍 빠져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숨은 채였다. 아무리 거리를 두어도 이야기가 들리는지라 피곤했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그 미색이… 아까 보셨습니까? 어찌 그리 얼굴에 부족함이 없던지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좌상 댁 조 소저도 보통 미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출중한 처녀인들 미색으로만 세자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누군지는 몰라도 드디어 청이 동의할 만한 의견을 내는 자가 나왔다.
“결국 간택은 배경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세자빈은 조 소저가 될 터인데요.”
“또한 맞지요. 그래 봤자 아까 보니 눈치 없이 대비와 떠들고 있지 않았습니까? 끈 떨어진 연에 무어 볼 것 있다고.”
…동의, 취소다.
“하긴, 그리 정해져 있는데 무어 길게 끌 게 있을까요? 어서 금혼령이나 거두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아는 집 여식은 혼인을 올리기도 전에 덜컥 아이가 생겨 시일이 급한데, 하필 금혼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도….”
이어지는 대화는 영양가가 없는지라, 청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귀담아듣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리 큰 소란이 있었는데, 어찌 아직 처녀 단자를 받는단 말입니까?”
“저도 그 생각입니다. 대체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건지….”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정말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건 아닌지라, 청은 괜히 기분이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한참이나 왕을 욕하던 이들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건 역시나 그들이 시간을 내어 구태여 참가하지도 않는 사냥에 따라온 이유였다. 자연히 저런 인간들을 두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온화하게 웃던 대비가 떠올랐다.
인간들은 수명이 짧고 능력이 부족할지언정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 소저는 인사만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린 걸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요즘 워낙 찾는 이들이 많아서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아까 대비와 대화를 나누며 살필 때만 해도 장막 안에 앉아 있던 것 같은데, 대비를 보내고 돌아서니 보이지 않았다.
기회만 생기면 바로 시비를 걸어올 것이라 예상했건만 싱거울 지경이었다. 먼저 명분을 만들어 준다면 청은 언제든 받아줄 의향이 있었기에 내심으로는 기대하고 있기까지 했는데 왜 사라진 걸까.
혹시 도겸과 언을 노리고 있을지 몰라 청은 이무기의 냄새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이무기는 아직 이곳에 있다.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거추장스럽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전부 두고 홀로 돌아갔을 리가 없지 않나.
“흐음.”
사냥터 바깥에 빠져있다면 참 좋겠지만, 이무기 특유의 물비린내와 기운이 사냥터 안쪽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조설아가 아닌 제게 한창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올 때 사라진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얼마간을 걸어 숲속으로 더 들어갔을 즈음, 청은 화살에 꿰뚫려 죽어 있는 꿩을 발견했다. 와락 구겨지는 미간은 저조차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난 불쾌함의 표출이었다.
가련히 죽어갔을 꿩의 몸에서 붉은 깃이 달린 화살을 뽑아낸 청은 이무기를 찾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땅을 팠다. 그러곤 죽은 꿩과 화살을 함께 잘 묻어주었다.
몇 걸음을 가자 또 같은 꿩의 사체가 보여 같은 방식으로 땅에 묻어주었다. 간혹 사냥 중인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청이 꿩을 찾는 게 더 빨랐다.
“…먹을 것도 아니면서.”
누구의 화살인지는 몰라도 괘씸했다. 도겸과 언이 먹을 만큼만 잡겠다 약속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않나. 이미 인간들은 이런 잔혹한 놀이를 오래도록 즐겨왔을 터라 오늘만큼은 제 눈에 띈 이상 즐기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청은 근방의 피 냄새를 찾아다니며 같은 방식으로 죽은 꿩들을 죄다 묻어주었다. 내친김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모든 꿩의 자취를 찾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잡고는 몰래 사냥터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이언과 최도겸을 포함해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을 사소하게나마 골탕 먹이고 싶었다. 그러느라 잠시 이무기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지만 곧 짙어지는 물비린내가 이무기의 존재를 재확인시켜주었다.
“귀찮게 하네.”
약간 파릇한 새순이 올라오는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 청은 거침없이 이무기를 따라갔다. 물론 몇 걸음 못 가 발견하는 죽은 꿩을 묻어주면서였다.
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벌써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는지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깃발들도 보였다. 청이 미간을 구긴 이유는 이무기의 흔적과 많은 인간들의 흔적이 겹친다는 점이었다.
“…그냥 같이 갈걸.”
청은 그 자리에서 거치적거리는 장옷과 저고리, 치마를 모두 벗었다. 그 속엔 혹시 몰라 껴입은 무명의 저고리와 바지가 있었다. 이리저리 펄럭이며 여기저기 찢기고 걸릴 우려가 있는 치마보다야 훨씬 간편하고 편했다.
“왜 성별이 다르다고 옷까지 다르게 입어야 하는 거지? 번거롭게.”
지금껏 이 땅에 머무르며 배운 게 많았지만 배울수록 도리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많아졌다.
“하여간에 남자만 부인을 여럿 둘 수 있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솔직히는 펑퍼짐하기만 한 치마보다야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제법 인상적인 남성의 도포가 더 아름답다 여기고 있어서가 아닐까.
청은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레 취향의 영역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도 배워가던 차였다.
벗은 옷들을 대충 접어 한쪽 구석에 숨겨두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청은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어디론가 훌쩍 뛰었다. 이무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 하나 나지 않게 조설아에게 다가간 청이 덥석 이무기의 팔목을 붙잡았다.
“몸종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대감댁 아씨가.”
“……!”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청은 숲속에서 조설아가 홀로 하려던 짓이 뭔지 가늠해 보았다. 왼손으로는 꿩의 목을 붙잡고 다른 손엔 화살을 쥔 채였다.
모르긴 몰라도 화살은 한 손에 쥐고 짐승을 찌르는 창이 아니라 활시위에 걸어 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었나.
불과 아까 전에도 도겸과 언이 활쏘기를 준비한다며 활시위를 가볍게 퉁겨 점검하는 것을 보았기에 조설아가 하려는 짓은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화살 깃이 붉었다.
“이… 이거 안 놔?”
벗어나려 뿌리치는 힘은 역시나 인간이 가진 힘보다 훨씬 대단했다.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완력을 쓰게 된 청은 한참을 조설아와 옥신각신하다 어차피 제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계산 하에 상대를 놓아주었다.
“어린아이를 때리는 일은 몸종을 시키면서 왜 더 험한 일은 직접 하지?”
조설아가 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사납게 굴었다.
“네가 알 바는 아니잖아?”
“넌 꿩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안 들리는 미물이라 모르겠지만 난 귀가 아플 지경이거든.”
“뭐, 미물?”
그러고 나니, 비로소 조설아가 메고 있는 화살통과 이미 주변에 화살이 꽂힌 채 죽어 있는 꿩이 몇 마리쯤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꿩을 땅에 묻으며 본 화살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설마, 조익환이 잡은 것처럼 하려고 미리 꿩을 잡아두려는 거야?”
아마 화살의 생김새로 누가 잡았는지를 분별하는 것 같았다. 많이 잡아야 벌주를 마시지 않는다 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내기의 승패를 가르기 위해 약한 동물을 죽인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했다. 아마 인간을 포함한 미물들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에 놓여있기에 들을 수 없는 모양이지만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 이런 사냥놀음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널 갈기갈기 찢고 싶지만….”
눈에 불을 켜고 청을 노려보던 조설아가 콧김을 내뿜으며 손아귀로 화살을 부러트렸다. 두 동강 난 화살이 차례로 땅에 떨어졌다.
“아버지가 참으라고 해서 참는 거야.”
화를 참는 척하는 건 아마 봐주기 위함이 아니라 청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여 몸을 사리는 것일 테다.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청은 만난 김에 의문이나 해소하고자 했다.
“진짜 조설아는 살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