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82)화 (67/197)

“주상 전하 납시오!”

왕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상체를 숙여 주군을 맞이했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곁에 선 청이 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싫으면. 도겸은 모두가 땅을 보고 있는 틈에 가만 청의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시선에 그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무심코 기운을 주고 싶다 생각하고 한 일인데 이리 바보 같은 짓이 또 있을까. 민망해진 도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손을 놓으려던 차, 이번엔 가느다란 손가락이 도겸의 손을 꽉 잡아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너.”

말을 탄 임금을 위시하여 내금위군이 지나가느라 결코 고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청이 작게 말하는 것이 그 어떤 소리보다 크고 분명하게 들렸다.

“역시 병에 걸린 것 같아.”

잔잔한 눈빛을 한 여인이 확언했다.

“네 심장이 이상해.”

도겸이 변했노라고.

***

“그래. 네가 규장각 최 직각의 사촌 누이라고?”

“예, 마마.”

“어찌 이리 고울꼬.”

사냥은 역시나 진부하게도 남성들의 영역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도겸에게 당장 투덜댔겠지만 어차피 내키지 않던 일이라 청은 여인들이 모여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 있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자리라 제 행실에 부쩍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은 귀찮았지만 말이다.

“자네에 대한 소문은 구중궁궐의 뒷방까지 흘러들어와 이 늙은이도 알 정도라네.”

무엇보다 갑작스레 왕의 모친인 왕대비가 와 있었다. 명실상부 내명부의 최고 윗전인 만큼 눈에 들어둘 필요가 있다며 도겸은 청에게 자리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조익환과 조설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몰래 사냥에 따라가려던 계획도 대비의 등장으로 인해 무산된 채였다.

“표낭도를 잡기도 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가진 장신구까지 모두 팔아 쌀을 사 나눠주었다지?”

쌀을 사서 나눠주다니.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청의 머릿속엔 전혀 없는 사실무근의 일이었다. 다만 도겸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가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에 청의 이름이 냇물처럼 흘러가 스며들도록 그녀의 이름으로 돈을 퍼다 뿌리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그저 소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마마.”

조선에 떨어져 참 별짓 다 한다. 하다 하다 가식이라는 것까지 떨고 있지 않나. 청이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동안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대비가 허허 웃으며 아낌없이 칭찬을 내어주었다.

“어여쁜 아이가 어여쁜 말만 하는구나. 심 목사가 참 잘 가르쳤어.”

사실 무슨 소문을 들은 것이냐 되묻고 싶었지만 남산댁이 함부로 반문하거나 대뜸 질문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질문하여도 되느냐 먼저 묻는 게 예의라고도 했던 것 같다.

“아….”

무슨 대화가 이리 복잡한가. 청은 그냥 단순하게 하기로 했다. 먼저 질문하지 않고 그저 물으면 답하고 칭찬하면 겸손히 굴기로.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런데 하나 의아한 것은, 왕실의 가장 어른이 나타난 자리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인사만 한 뒤에 어른을 배려한답시고 주변을 싹 비웠다는 점이었다.

경치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를 대비에게 내어준 사람들은 저들끼리 저 아래에 마련된 장막 아래에서 하하 호호 떠들기 바빠 보였다.

그리고 청은 인간들의 귀가 저보다 어두운 것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서구나, 하고 깨달았다.

“다 늙어빠진 노인네가 어찌 이런 곳까지 왔답니까?”

“한 때는 수렴청정해서 권세를 쥐어본 사람이지 않습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직 그 힘이 공고하다 여기는 것이겠지요.”

“쯧쯧,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저리 버티고 앉아 있는 건지 원….”

몰래 소곤대는 저런 뒷말들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청이 서늘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사이에 가만 맑은 경치를 바라보던 대비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세월이 어찌나 무상한지….”

윗전이 말씀하실 땐 가만 고개를 숙이고 경청해야 하기에, 청은 배운 대로 즉시 자세를 바로 했다.

“힘이 있을 땐 떠받들기 바쁘던 이들이 이젠 노망이 났다며 욕하기 바쁘구나.”

“예? 그걸 어찌….”

무심코 대꾸하던 청이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 인간은 이만큼 먼 거리에서는 제대로 들을 수 없지 않다 생각하고 있던 차라 아무리 청이라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궁중의 예법 따위도 잊을 만큼.

설마 대비도 사람이 아닌 건가? 하고 생각할 즈음 동그랗게 뜨인 청의 눈을 본 대비가 다시 작게 미소 지었다.

“나이가 들수록 눈도 귀도 어두워진다지만….”

다행히 청이 사소한 예법을 무시한 점에 대해서는 질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을 다루고 겪은 경험만큼은 쌓일 대로 쌓여 이젠 듣고 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게지. 이 노인을 보며 짓는 미소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할 수 있고 뱃속에 칼을 품었는지, 온기를 품었는지도 훤히 보이고 말이야.”

인간은 오감이 무뎌질수록 여섯 번째 감각이 예리해지는 모양이었다. 부정한 기운을 읽어내기라도 하는 것일까. 가만 듣던 청은 조용히 대꾸했다.

“…고단하지는 않으시옵니까.”

“음?”

“너무 많은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말이옵니다.”

불경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비는 도리어 눈을 가늘게 뜨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였느냐?”

당연히 제가 겪어왔기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없는 청은 적당한 말을 골랐다.

“외람되오나 소녀, 그리 말씀하시는 대비마마께오서 전혀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았사옵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느니라. 이 늙은이가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을 하여 웃어도 전연 웃는 것 같지 않던데?”

“그것은….”

이래서 육감을 가진 자들끼리의 대화는 차라리 진실로만 이루어져야 편했다. 청은 머리를 굴리며 말을 고르다 곧 포기했다. 되지도 않는 가식이나 융통성은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처음 뵙는 왕실의 최고 어른께서 하시는 말씀이온지라 솔직한 답을 올리는 것이 맞는 일인지 소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내 오랜만에 사람의 입에서 나온 진심이 듣고 싶구나.”

그 지루하고 피곤해 보이는 눈빛을 모르지 않았다. 청은 어쭙잖게 가식을 부리는 짓 따윈 내려놓기로 했다.

“솔직히는… 제가 한 일이 아니라 기쁘지 않은 것이옵니다. 저는 제 장신구를 내놓은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놓을 생각도 없사옵니다.”

“이제야 또래의 처녀다운 대답이 나오는구나.”

대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물길처럼 깊게 파인 주름이 그 사람이 그동안 자주 지어왔을 표정을 지으며 길을 냈다.

청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탁해졌을지언정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청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하오나 진정으로 내놓았다 하여도 기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호오, 어찌하여?”

“그야 누군가를 돕고자 하였다면 그저 조용히 도우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순수한 이유는 하나면 족하지 않겠사옵니까?”

이것저것이 섞여 오염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청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그러나 대비는 도리어 마뜩잖아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것을 일석이조라 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다 할 터인데, 영특한 아이가 어찌 모르느냐?”

조금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목이 마르는지 대비가 물음을 던져놓고 찻잔을 들어 입 안을 축였다.

역시 궁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여인은 달랐다. 남산댁이 익히 가르친 내용 그대로를 실천하는 것을 보니. 무엇보다 찻물을 두 손으로 공손히 다루고 입가에 남은 한 방울의 물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손수건으로 조심히 닦아내는 우아하고 고상한 품격이 청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런 우연에 기댈 것이라면 저는 차라리 처음부터 ‘내가 이리 좋은 일을 하니 모두 똑똑히 보고 새겨 두라’라고 온 세상에 알릴 것이옵니다. 그러면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천조, 일석만조는 될 터인데 어찌 겨우 두 마리에 만족하겠습니까?”

물론 새를 그만큼이나 잡을 생각은 없었지만, 인간들의 논리가 그렇다니 잠시 어울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청의 되바라진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인지, 어이가 없었는지 작게 웃던 대비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이리 명랑한 아이가 다 있을까!”

“소녀는 그저 대비마마께서 진실을 듣고 싶다 하시어….”

“그래, 그래. 내 아주 오랜만에 즐거웠느니라.”

대비는 입가를 닦던 수건으로 이제는 눈에 절로 고이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표정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늙은이도 솔직히 물어도 되겠느냐?”

“하문하시옵소서.”

“내게 고단하지 않느냐 물었지.”

“예.”

“나는 너처럼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질문이 나오는지, 그것이 의아하더구나. 너는 어찌하여 그런 눈치가 고단하게 느껴지는 것이냐? 그런 것에 눈을 뜨면… 그래, 어떤 사내가 너를 은애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도?”

“외람되오나 소녀에게 그런 것은 중하지 않습니다.”

“하면?”

“사내의 마음을 알아보기에 앞서 제가 그 사내를 원하는 지가 더 중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런 이야기를….”

가만 듣던 대비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뜨며 청에게 넌지시 말했다.

“세자와 혼인하고자 사주단자를 넣은 처녀가 세자의 할미인 이 늙은이에게 해도 되는 것이냐?”

덫에 걸린 것일까. 한참 미물이라 생각하였던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다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하여 거짓을 고하였다면 저는 우선 대비마마께오서 진실을 말하라 하신 명을 거역한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잘게 기침한 대비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모자식 간에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허물없는 대화를 처음 보는 아이와 나누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청은 그런 대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나 인간은 피곤하게 산다 생각하였다.

“주제넘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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