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환은 조설아를 향해 찻잔을 슬쩍 밀어주었다.
“마셔라.”
심청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여 자존심이 상한 이무기는 여전히 분이 나 있었다.
화가 난 건 조익환도 마찬가지였다. 제 손의 패가 이 땅에서 가장 훌륭한 패인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나니 눈앞의 이무기를 당장이라도 패대기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설령 심청이 얼마나 강한들, 이무기보다 약해지도록 만들면 그만이다.
“조금 이따 너도 사냥에 함께 나서야겠구나.”
“왜!”
빽 소리치다 말고 서늘한 조익환의 눈치를 본 이무기가 제 언행을 바로잡았다.
“…가야합니까?”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군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세자의 날개에 가지치기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뚝섬에 위치한 왕의 전용 사냥터 초입엔 임금의 행차가 있음을 알리는 대장군의 깃발이 높이 세워져 있었다. 그 근처에서 곧 도착할 왕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 서 있는 사람들 중엔 도겸과 청도 있었다.
“시끄러워.”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엔 조익환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자연스레 아까 전 훈련원에서 조익환이 화를 내가며 도겸과 설전을 벌인 것을 아는 이들이 보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다들 너와 나를 욕해.”
그런 이들이 작게 쑥덕거리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청은 아마 도겸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불쾌할 터였다. 도겸은 청이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당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게 따라나설 필요가 없대도 왜 따라나선 것이냐.”
이번에야말로 제 활을 챙겨온 도겸은 어깨에 걸친 화살통을 고쳐 메며 청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아까처럼 기다리기만 할 터인데.”
이제 조설아와 조익환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했으니 조설아의 정체를 밝혀 조익환을 압박하면 될 일이다. 도겸은 주변을 살펴 근방에 조설아가 있는지 확인한 뒤 청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 물에 들어가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마음 놓고 물에 들어가 쉬기엔 네가 너무 약한 걸 어떡해.”
장옷을 쓴 청은 도리어 도겸을 위아래로 훑으며 마뜩잖은 얼굴을 했다.
“…겨우 내 냉기에 죽을 뻔할 만큼.”
“그, 그거야…!”
“자네들 여기 있었나?”
도겸의 귀가 또 뜨거워지려던 차에 천만다행으로 구원자가 나타났다. 언이었다. 그럼에도 도겸은 안심하지 않았다.
“저하, 제가 처음으로 드린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흠… 장인이 만든 두 번째로 좋은 황모필(黃毛筆, 족제비털로 만든 붓)이었지. 가장 좋은 것은 전하께 진상하지 않았나. 내게는 두 번째로 좋은 붓을 가져왔다고 말한 게 기억이 나.”
뜬금없는 문답에 청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의아해했지만 두 사내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도겸은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하면 자네는, 내가 남산댁의 술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 보게.”
“술이라 하면 단연 감홍로나 이강고, 또 죽력고….”
도겸이 유명한 술을 대는 동안 언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아마 원하는 대답이 아니기 때문일 터. 도겸은 슬쩍 웃으며 답을 정정했다.
“…가 유명하지만 저하께서는 소나무 순으로 만든 송순주를 가장 즐기시지요.”
“하, 어찌 이런 순간에 짓궂게 구는가!”
언이 팔꿈치를 세워 도겸의 옆구리를 가격하려 했지만 도겸이 가볍게 피하며 웃었다. 언은 제 긴장을 늦춰주려는 친우의 배려를 알아차린지라 더 화내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가만 지켜보던 청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의문을 드러냈다. 도겸은 언과 뿌듯한 눈빛을 교환한 뒤 청에게 설명해 주었다.
“혹시 모습을 훔친 이무기일지 모르니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실을 물어 확인하는 것이다.”
“아니면 암호를 정하는 게 어떻겠느냐? 너무 어릴 적에 있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저하.”
언이 의욕적으로 다른 의견을 내는 동안 청은 팔짱을 끼며 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내 앞에선 그럴 필요 없는데.”
제 능력을 무시당한 것처럼 느꼈는지 청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도겸과 언은 그런 여인을 어린 누이 보듯 흐뭇하게 웃으며 대했다.
“너야 물론 단박에 알아보겠다만 나처럼 둔한 인간은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맞다. 그저 한번 해 본 것이지. 근데 자네는 괜찮겠나?”
“예?”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이지만 꿩을 가장 많이 잡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벌주를 마신다지 않나. 가뜩이나 자네는 술도 약한데 괜찮겠냐는 말이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까 받은 술도 어찌나 독했는지 아직 속이 좋지 않습니다.”
도겸이 친우에게 슬쩍 약한 모습을 보이며 많이 잡으면 잡은 것을 좀 나누어 달라 청하려던 차, 청이 다시 끼어들었다.
“근데 꿩을 잡는 건 먹으려고 잡는 거야?”
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뭐 잡아서 먹기도 하겠지만 사냥 그 자체를 위해 잡는 것이지. 장애물을 피해 움직이는 표적을 화살로 맞히는, 또 그 과정에서 몰이꾼과 사냥꾼이 협력하는 군사 훈련의 목적도….”
“그러니까.”
감히 세자의 말허리를 자르며 재차 질문하는 청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살기 위해 잡아먹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재미를 위해 약한 짐승을 잡는다는 거네.”
“무어….”
무어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언은 몰라도 도겸은 열을 올리며 축첩제를 비난한 청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겸 자신은 날 때부터 조선 사람이라 몰랐던 잘못된 관습을, 청은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런 청이 허례허식 가득한 사냥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정말이지.”
그 눈에 도겸과 언을 향한 경멸을 담고 있는 것도 뻔히 보였다. 어쩌다 보니 인간을 대표하여 용족의 왕에게 혼나는 모양새가 됐다.
“그, 그러면 그… 먹을 만큼만 잡으면 되지 않겠나?”
“맞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벌주를 마시는 것만 면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렇지? 나도 오늘 동궁의 궁인들과 나눠 먹을 만큼만 잡아가야겠군.”
도겸은 물론 눈치 좋은 언도 서늘한 청의 눈빛을 읽어내고 대화를 얼버무렸다. 그러곤 딴청을 피우며 갑자기 몸을 풀거나, 들고 있던 활시위를 가볍게 퉁겼다.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저하, 전하께서 곧 당도하십니다.”
“뭐어? 아바마마께서 소자를 찾으신다고? 그럼 어서 가야지. 이따 보세!”
“아니, 당도하신다는 게 어찌 찾으신다는 의미…!”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싸늘해진 참에 언은 익위사의 부름에 냉큼 자리를 떴다. 늘 좋아하던 친우였지만 혼자 남고 나니 처음으로 원망 어린 마음이 들었다.
청은 가만 도겸을 바라보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 정도로 서늘해 도겸은 팔을 쓸어내렸다.
“그, 너무 노여워 말거라. 인간들이 불순한 미물이라 마뜩잖겠지만 조금만 너그럽게 봐다오.”
“됐어. 그런 건 이제 기대도 안 하니까.”
“안… 한다고.”
안 한다니 또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가, 청은 도겸의 마음을 냉수에 담갔다 꺼내어 불에 태우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뭐, 어찌 됐든 나도 내 한 몸 처신할 정도는 되니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왔어.”
순간 청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참는 듯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조익환의 등장이었다.
“…적응 안 돼.”
“괜찮겠느냐?”
“저런 인간은 여러 번 보기도 싫은데 역시 그냥 죽이면 안 돼?”
살인을 극도로 꺼리는 것을 알게 됐는데도 청은 여전히 거침없이 굴었다.
“또 그러는구나.”
사실 도겸 역시 처음엔 그런 청을 무기로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저 하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 불편해졌다. 아니, 괴로워졌다. 그저 이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모순을 더는 저 눈에 비추고 싶지 않았다.
청을 통해 더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로잡고자 결심하여 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인데, 지금은 저부터도 모순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 어이가 없었다.
“…그럼 저 인간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며 따르는 이들까지 죽여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
“열 명이면 돼? 그럼 물에 들어가 천 년쯤 정양하지 뭐.”
“그보다 많을 텐데. 게다가 네가 물에서 모든 부정한 기운을 씻고 나올 때쯤이면 이 땅의 강산은 백 번도 더 변해있을 것이다.”
그때까진 아무리 날아다니는 조익환일지라도 살아 있지 못할 터인데. 심각한 와중에 설핏 웃음이 나고 말았다.
“무엇보다 조익환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죄를 지었다면…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그 죄를 물을 순 없지 않겠느냐.”
“그럼….”
청은 고개를 돌려 점차 가까워지는 큰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이무기를 잡아 가둬두고 시치미 떼면 되지.”
격언도 자연스레 쓰는 청은 정말이지 조선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감격스러웠지만 일단 그 마음을 눌러 담은 도겸은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문제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아닌 이무기를 가두는 게, 가능한 것이냐?”
이무기의 체력이나 능력이 어느 선에 미치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에 섣불리 잡아놓았다간 당연히 더 큰 화를 입게 될 터.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적당히 주변 환경을 생각한 청이 쉽게 납득했다.
“하긴, 나무로 지은 집으로는 이무기를 가둘 수 없겠지. 내가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테고.”
제 하얀 손을 내려다본 청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힘을 잃지만 않았어도 얼음에 가두면 간단한 일이었을 텐데….”
우울해하는 청을 바라보는 도겸의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반쪽 짜리일지라도 청룡의 신물을 찾았다면 이렇게 울적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죽은 무녀도 저라면 청룡의 신물을 우선으로 찾겠다 하였으니 말이다.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나무꾼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도겸은 오래된 설화에 자신을 투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