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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80)화 (65/197)

머릿속엔 잃어버린 가족들의 모습이, 그리고 아까 전 시위를 비틀어 화살의 방향을 달리 쏘아 보낸 것에 대한 후회가 끓어올랐다.

역시… 그냥 죽였어야 했다.

“내가 복수심을 왜 불편하게 느끼는지 알아?”

“…뭐?”

문득 청이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면 아마 도겸은 그 자리에서 활활 타 버렸을지도 모른다. 멍하던 정신을 깨워준 여자를 바라보자 청이 한숨과 함께 장옷을 약간 내려 얼굴을 전부 드러냈다.

“그건 결국 누군가를 해하고 싶다는 악의가 되기 때문이야. 동시에 스스로를 갉아먹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워. 그렇게 되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평정심을 잃어서 복수는커녕 자기 자신만 잡아먹겠지.”

도겸은 뜨끔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평소에 불결하다 말하던 기운이 강해지기라도 한 걸까. 청의 미간이 약간 구겨져 있었다.

“내게서… 또 더러운 냄새가 나느냐?”

“응.”

더러운 냄새가 난다며 청은 도리어 도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팔목을 덥석 잡혔다. 스스로를 깨끗하지 않다 여기고 나니 왠지 순수한 물과 같은 청에게 부정함이 닿을까 싶은 생각에 닿고 싶지 않아 빼내려 했다.

“그러니까 하나만 해.”

그러나 늘 그랬듯 청의 괴력은 도겸을 압도했다.

“…무엇을?”

“복수심처럼 안팎으로 곪는 거 말고, 차라리 누구 하나를 죽이고 싶은 생각만 하라고.”

“…….”

“그건 내가 해 줄 수 있으니까.”

일순 햇살에 비친 청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팔을 빼내려던 도겸의 저항이 멎은 건 그즈음이었다.

“뭐야.”

도겸을 놓아주는 대신 가슴팍에 대뜸 귀를 댄 청이 의아해했다.

“너 혹시….”

가만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던 청의 안면이 와락 구겨졌다. 도겸은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있을 뿐이었다.

“어디 병이라도 생긴 거야? 요즘 심장 소리가 이상해.”

“…그러게나 말이다.”

“집에 한참 불러들이던 그 의원이란 인간들 다시 한번 불러보든가.”

시큰둥하게 돌아서는 청을 바라보며 도겸은 잠자코 제 심장에 손을 올려보았다. 벌주로 마신 독한 술 때문일까. 마음에 자꾸 열이 올랐다.

기실 원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발작하듯 뛸 때마다 공통점을 돌이켜보면 답은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그 답이 그에게서 사뿐사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맑은 물과 같은 파란색 치맛자락이 잘게 펄럭였다.

“그래… 의원을 불러보자꾸나.”

그리한들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도겸은 청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푸른 계열의 치맛자락과 도포가 산들거리는 잔바람에 이는 모습은 마치 물결이 일렁이는 모양과 비슷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전갈을 보내자 예상보다 빨리 언이 도겸의 집으로 찾아왔다. 오후에 있을 꿩 사냥엔 세자도 참석하게 되어 채비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조익환의 여식은 이무기가 확실하더냐?”

자연스레 사랑의 상석에 앉은 세자는 남산댁이 준비한 다과상엔 손도 대지 않고 봇물 터지듯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조익환은 그걸 알고 이용한 것이었고?”

“예. 능력을 써서 제가 시사를 할 때 제 화살의 방향도 틀어지게 만들더군요.”

“그것 보게. 내가 혹시 자네도 시사하게 될지 모른다고 했지 않나. 그런데 화살의 방향은 왜 틀어지게 한 건가?”

단순히 벌주를 마시게 하려는 장난으로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더군다나 직접 임금에게 청하여 시사하는 관리들의 품계를 낮추어 도겸을 굳이 포함하기까지 했다. 도겸은 차분히 조익환의 속내를 헤아려보았다.

“글쎄요. 저를 자극하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활에 맞고 싶었던 것인지….”

어쩌면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한들 자신을 뛰어넘을 순 없을 것이란 자신감을.

“어쨌든 청이가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조설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조익환은 사람이 맞다, 그리 보았고요.”

도겸이 청을 바라보자 얌전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고개를 끄덕여 재차 확인해 주었다. 그런 청을 바라보던 언은 심각한 얼굴로 침음했다.

“혹, 벌주에 무언가를 탄 건 아니겠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청이 도겸에게 불쑥 다가와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저었다.

“…술 냄새만 조금 나.”

설마 벌주 한 잔을 마신 것까지 탐이 나는 것일까. 습관적으로 물러나던 전과 달리 가만 앉아 청이 하는 대로 지켜보던 도겸이 돌연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한데 너는 아까 왜 좌상에게 진짜 조설아가 살아 있느냐고 물은 것이냐?”

“이무기는 나처럼 인간의 모습은 할 수 없으니까. 모습을 똑같이 바꾸려면 그 대상을 먹어야 해.”

둘의 대화를 들으며 드디어 마른 목을 축이던 언이 수정과를 뿜고 말았다.

“…먹다니?”

도겸이 서둘러 갖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주며 대신 되물었다. 고운 치맛자락에 언이 뿜은 수정과가 튀는 것을 본 청은 세자에게 건네려던 손수건을 덥석 빼앗아 제 치마부터 닦아냈다.

그러느라 또 도겸과 언이 얼이 빠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야. 살점을 먹어도 되고, 털이나 뼈를 먹어도 돼. 하지만 영구적인 건 아니라서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할 텐데.”

언은 손수건을 받으려 내민 손을 떨떠름하게 물려야 했다. 도겸은 서둘러 서랍장에서 다른 수건을 찾아 세자에게 건네며 상황을 무마시켰다.

“어렸을 때 한두 번, 그러고 나서 오늘 본 게 전부인지라 같은 사람의 외형인지는 모르겠다만 내 기억에 조 낭자는 어릴 적 큰 병을 앓느라 요양을 가야 할 정도라고 했었다. 아마 그 병이 낫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은데.”

“그럼… 이무기가 이미 죽은 시체를 먹으며 조설아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인가?”

결론을 내린 언은 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은 듯 안색이 질려 있었다. 도겸은 새삼 피붙이를 이무기에게 먹인 조익환의 잔혹함에 경악한 나머지 말을 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살아 있는 이를 먹는 것보다는….”

“그만하게. 며칠간 밥이 안 넘어갈 듯싶으니까.”

“…사실 이하 동문입니다.”

두 사내가 눈에 띄게 가라 앉았지만 청은 빛깔이 물을 닮아 제법 만족스러운 제 푸른색 치마를 닦아내기 바빴다.

없어서 구하지 못할 만큼 비싸고 희소한 옷감이라 시전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했는데, 어찌 도겸의 귀에 흘러 들어갔는지 그가 어디론가 서신을 보내자 며칠 만에 한 상인이 집으로 옷감을 몇 필이나 들고 왔었다. 덕분에 청은 같은 색으로 치마며 저고리를 몇 벌이나 만들 수 있게 됐다.

“꼭 뼈와 살을 취하기보다는 보통 머리카락이나 손발톱을 먹을걸.”

“부족하면 곧바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는 무관하던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수많은 정보들을 들추어야 했다.

“다시 되돌아 갈 전조가 나타나겠지. 예를 들면 사람처럼 동그란 동공이 아닌 뱀의 길쭉한 동공으로 변한다든지, 피부에 비늘이 돋아난다든지.”

“그럼 사람의 모습을 유지해줄 그… 조설아의 흔적을 없애 버리면 조익환도 더는 이무기를 함부로 쓰진 못하겠구나. 비를 내리고 바람을 일으키기까지 하니 지금으로선 그게 급선무겠지.”

언의 정리에 도겸이 첨언했다.

“동시에 우리는 물론 우리 주변 사람들의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한 조각 잃어버리는 일 없게 해야 합니다. 언제 이무기가 우리 주변으로 침투할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허!”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언이 당장 청에게 돌아앉기까지 하며 캐물었다.

“누군가 의심스러울 때 그자가 이무기인지 사람인지 판별하는 방법이 있느냐?”

“판별하는 방법?”

“제발 있다고 해다오, 제발!”

“일단 이무기를 기준으로 자신보다 격이 높은 존재의 모습은 훔칠 수 없으니 나는 제외하고….”

밖에 남산댁이 없을 때는 청이 바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도 언은 개의치 않았다. 말을 잇던 청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뜸 뚱하게 굴었다.

“그야 당연히, 외양만 훔치는 것이니 속은 모를 것 아니야?”

***

“감히 그년이 내 비를 협소하다고 했어. 감히!”

조설아가 작은 발로 바닥을 쿵쿵 울릴 때마다 우지끈하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조익환은 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다관을 데울 뿐이었다.

숙우에 미리 차로 우릴 물을 담아 식히고, 다관에 담았던 물을 다시 찻잔으로 옮겨 담아 잔을 데우는 손길이 익숙했다.

“진정하거라. 간지럽게 긁는 말 몇 마디에 그리 흥분해서야 되겠느냐?”

귀한 찻잎을 덜어내 데운 다관에 넣고, 숙우에서 식힌 물을 주전자에 따랐다.

“그러는 아버지도 화냈잖아요!”

“…크흠, 언성 낮추라 하였을 터인데.”

부쩍 낮아진 어조를 알아차린 조설아가 숨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게 해야 돼. 고개를 쳐들어도 보이는 건 내 꽃신뿐이게 해 줘야 하는데!”

“앉아라. 모든 일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이야.”

모든 일은 이미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조익환은 찻잔에 따라둔 물을 퇴수기에 내 버렸다.

“심청이란 아이는 사람이 맞느냐?”

갑자기 나타나 심오균의 딸이 된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년은 네가 뭔지 알아차린 것 같은데.”

씩씩대던 조설아가 조익환의 눈을 피했다. 조익환은 조설아를 한 번 보고는 다관을 적당한 높이로 들어 기울였다. 찻잔에 연한 황매화 색 찻물이 적당한 높이로 차올랐다.

“최도겸이 그리 보호하는 것을 보면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조익환은 최도겸이 정색하며 심청을 뒤로 숨기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소중한 유리구슬 다루듯 조심스러웠지 않나.

“그런데 왜 너는 모르는 것이냐?”

그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떨어트려 놓고 싶은 충동이 들어 이상하다 여겼는데, 이무기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충동은 확신이 되었다. 둘을 떨어트려 놓아야 뭔가 일에 진척이 생길 것이란 계산이 섰다.

갑자기 모종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심청이 나타난 뒤였다. 아마 최도겸과 더불어 세자의 양 날개가 되었으리라.

“설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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