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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79)화 (64/197)

“귀한 차를 대접할 테니 한번 들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선 조익환은 찡그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도겸은 우선 가볍게 묵례하며 다가섰다.

“어찌 이리 비싸게 군단 말인가, 자네는?”

“저보다는 당연히 대감께서 더 바쁘시지 않습니까.”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어찌 함부로 위험한 굴에 찾아 들어가겠는가.

힐끔 살핀 청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탓에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읽어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별일이 없거나, 있다 하여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니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대신 도겸은 점희에게 더 물러나 눈에 띄지 않도록 슬쩍 눈짓했다.

다행히 눈치 좋은 점희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조익환의 시야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쓸데없는 겸양은 말게. 자네라면 언제든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겠나?”

쓸데없는 인사치레를 계속해서 주고받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도겸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며 청의 팔목을 잡아 자연스레 제 뒤에 서게 했다. 비로소 도겸과 청, 그리고 조설아와 조익환이 마주 보고 섰다.

“제 누이동생과는 벌써 인사를 나누신 것입니까? 제가 소개해 드리려 하였습니다만.”

“그 소문 무성한 서촌의 미인이라면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네.”

조익환이 웃으며 청을 바라보았다.

“그 미인이 진짜 심 목사의 딸이 아니라는 것도.”

“어찌….”

저도 모르게 청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미처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조익환을 맞닥뜨린 상황이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고민스러웠다. 혼자가 아닌 둘이면 나을 줄 알았는데, 더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처녀 단자를 넣자마자 도성 안팎에 굉장한 미인이 나타났다며 소문이 나기에, 그간 해주에서 살아왔다면 그 소문이 도성까지 닿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알아봤을 뿐인데… 그러하더군.”

“…….”

“해주에 살던 심 목사의 딸 심청은 이미 장례를 치렀다질 않나?”

“아, 그 일 말입니까.”

청이 재간택, 삼간택에 든다면 아마 결점을 찾으려 혈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예상보다 다소 일렀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한 바였고 충분히 고민도 해두었다.

“맞습니다. 이 아이는 양녀이지요. 저희 숙부님 친척의 딸이었습니다.”

처녀 단자에 적을 필요가 없던 내용인지라 웬만하면 들키지 않고 지나가길 바랐건만, 들킨 이상은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괜히 거짓을 늘려봤자 들통 났을 때 곤란함만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예 다른 혈족의 양녀를 간택에 올렸다간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기에 적당한 진실과 거짓을 섞는 방식을 택했다.

“한데 어찌 죽은 자와 같은 이름을 쓴단 말인가?”

“소리는 같으나 쓰는 글자가 다릅니다.”

“처음엔 심 목사가 딸을 너무 오냐오냐 길러 눈에 뵈는 게 없이 경거망동한다 생각했는데, 그저 덜 배워서였군?”

온화한 말투였으나 스스럼없이 사람을 낮잡아보는 조익환의 언행에 도겸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결코 간택에 임하기엔 모자람 없는 아이입니다만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감.”

빙빙 도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도겸은 과연 조익환이 어디까지 알아냈을지 캐내기 위해서 어떤 미끼를 던져야 할지를 고민했다.

“염려라고 하면 따로 있네만. 이미 세자빈으로 우리 설아가 내정되어 있는 걸 아는 자네가 괜히 무리하는 것 같아 더 걱정이네.”

“…….”

“그 아일 간택에 넣은 것은 심 목사의 욕심인가, 아님 자네의 무리수인가?”

“제 욕심입니다, 대감.”

그때 도겸이 애써 숨긴 청이 앞으로 나서며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제가 감히 욕심을 내었습니다.”

조익환을 바라보는 청은 쉬이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조익환이 눈썹을 살짝 씰룩였다.

“이리 건방진 것을 보아하니 정말 갈 길이 멀어 보이는데….”

조익환이 청을 비웃으며 위아래로 훑는 동안, 청도 마찬가지로 조익환을 가만 살폈다. 아마 거리를 좁혀 앞으로 나온 건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함이리라.

“제가 감히 욕심을 내어도 될 만큼, 조 낭자가 부족하다 생각되지는 않으신가 봅니다.”

“…무어라?”

시종일관 웃는 낯이던 조익환이 대번에 정색하며 노기를 드러냈다.

“지금 네가 무슨 망발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감히 어느 안전에서 그딴 소리를!”

도겸이 다시 청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가녀린 여인은 도겸의 힘을 무시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곤 도겸이 어떻게 간을 볼지 고민하는 문제를 불쑥 수면 위로 먼저 끌어냈다.

“그리 태연히 양녀인 저를 낮잡아보시고 오라버니를 욕되게 만드시는 것을 보니 조 낭자가 대감의 앙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지요?”

“양, 양녀라니, 우리 설아에게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도겸이 아무리 긁어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위인이 단박에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를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차라리 정공법이 최선이었나.

도겸이 언제든 청을 보호할 각오를 다질 즈음 청은 멈추지 않고 들이받았다.

“진짜 조설아는 어디에 있지요?”

“그…!”

“이미 죽은 것입니까?”

그 말을 들은 조익환이 반사적으로 보인 행동은,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다. 다행히 조익환의 호위무사들이 진을 치다시피 서 있어 다른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지만 언제든 조익환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면….”

“닥쳐라!”

도겸은 평정심을 잃은 조익환의 행동을 통해 청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음을 알아차렸다.

“다소 불민하여도 내 최 직각을 봐서 가련히 여기려 하였더니!”

잔뜩 화가 난 조익환은 청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듣기 싫다는 듯 홱 돌아섰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도겸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아까 내게 활을 겨눈 일은 사죄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 앞에선 벌주로 끝내자던 조익환은 보는 눈이 줄어들었다고 득달같이 도겸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게 분명하지 않나. 기가 찼다.

“대감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청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저도 더는 눈치만 보며 재고 따지지 않을 것이다.

“제가 대감을 겨누었다면 어찌 활이 과녁을 적중하였겠습니까.”

아마 시위를 비틀지 않았어도 화살은 조익환을 절대 다치게 할 수 없었을 터.

“무엇보다 대감께서도 저를 믿으셔서 피할 수 있는 겨를이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조익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린 게 아니라면 자네의 활 솜씨가 대단하다 생각하셨는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차분해진 조익환이 도겸에게 통보했다. 다만 눈가에 서려 있던 미소는 지워진 채였다. 아무래도 청이 급소를 제대로 찌른 듯했다.

“전하께서 자네도 오후에 있을 꿩 사냥에 참석하라 하셨으니 준비하게.”

비로소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

“송구합니다, 나리. 제가 아는 인상착의와 목소리를 가진 자는 없었습니다.”

점희가 미안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단박에 찾으리라 기대치 않았다. 도겸은 아쉬워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수고했다. 먼저 집에 가 있거라.”

“예.”

도겸은 흔들리는 가마가 끔찍이도 싫다는 청을 배려해 대신 점희를 안전하게 가마에 태워 서촌으로 보내고 돌아섰다. 청은 장옷을 쓴 채 눈만 내보이고 있었다.

“좀 걷겠느냐? 아니면 근처 어디에서라도 좀 쉬었다 가겠느냐?”

“…물에 들어가고 싶어.”

영락없는 반가의 규수처럼 하고서는 전혀 동떨어진 말을 하니, 도겸은 옅게 웃음이 났다.

“안다. 집에 가는 대로 안채를 비워줄 테니 마음껏 들어가거라.”

둘은 자연스레 서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사례를 끝낸 관리들과 구경을 하기 위해 따라나섰던 가족들이 해산하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느라 근방이 소란스러웠지만, 가마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간 뒤 훈련원 앞은 제법 한산해져 있었다.

“괜찮으냐? 아까 조익환과 처음 마주하였을 때 안색이 좋지 않아 걱정하였다.”

행사가 시작되어 직전까지 별다른 말도 없이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다행히 평소와 같아 보여 다행이었다. 도겸은 내심 안도하며 청을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길 안쪽으로 슬쩍 이끌었다.

“아픈 게 아니라, 잠깐 나보다 격이 높은 존재인 줄 알고 당황했을 뿐이야.”

“그럼 아닌 것이냐?”

처음부터 비를 내린 게 이무기라며 다소 하찮게 보던 청이 겁이 날 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조익환은 인간이야. 나보다 격이 높았다면 그런 존재가 겨우 그만한 비를 뿌렸겠어?”

“한데 어찌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치 못한 것이냐? 맥이 뛰는 것을 확인치 못해서 그랬느냐?”

“아니, 너무 역겨워서.”

“역겹다니?”

잠시 목소리가 커졌던 도겸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어조를 낮추었다.

“무엇이 역겹다는….”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던 도겸은 곧 설마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설마, 조익환에게서 어떤 ‘냄새’를 느낀 것이냐?”

청이 끔찍이 싫어하며 피하려 드는 냄새가 있지 않나.

그리고 청은 도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래. 죽음의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나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어.”

청은 서로를 독점하자던 약속을 철저히 지키려는 듯 자신의 생각과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도겸에게 전했다.

“본래 인간이 가지는 기척이나 냄새는 전부 가려져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도겸이 절로 주먹을 쥐는 동안 청은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 이를 갈며 말했다.

“…아마도 조익환이라는 인간은 지금껏 숱하게 많은 생명을 해친 거겠지.”

“…….”

“그런 인간을 두고 잠깐이라도 나보다 격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착각하고 긴장한 게 화가 나.”

그 말을 들을 즈음 도겸은 자연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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