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자네가 그리 큰 도박을 걸다니, 나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군.”
그만하면 되었다는 듯이 송 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임 씨가 혀를 찼다.
“자넨 그만 가보게. 연회 대신 고관들만 참석하는 강무가 이어진다 하니 우리도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지.”
“…예.”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을 청이 걱정되었다. 도겸은 도망갈 틈을 만들어 준 임 씨에게 심심한 감사를 담아 고개 숙인 뒤 서둘러 물러났다. 그러곤 바람처럼 움직여 관리들의 가족들을 위해 임시로 쳐둔 장막을 찾아갔다.
“자넨 이리 어여쁜 누이를 홀로 두고 어딜 그리 돌아다니는 겐가?”
그곳엔 청을 마치 인질처럼 데리고 있던 조익환이 도겸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마당에 나무라도 심으려는 것이냐?”
오전 내도록 꿍하게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벅벅 긁으며 시무룩해 있는 순이에게 지나가던 남산댁이 가볍게 물었다. 기가 죽은 채로 혼자 훌쩍이는 조그만 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무어, 상추 씨앗이라도 구해다 주리?”
“그런 거 아니어유.”
“그럼 왜 쓸데없이 그리하고 있느냔 말이야. 그리 땅을 파놓았다가 지나던 아씨가 걸려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퍼뜩 고개를 든 순이가 서둘러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놓은 흙을 가져다 다시 바닥을 메웠다.
“그건 안 돼쥬.”
“아씨가 널 떼어놓고 가셔서 내도록 툴툴대더니 왜, 아씨가 넘어지시는 건 싫으냐?”
“아씨가 조금 밉긴혀두 그 고운 피부가 상하는 것을 우째 봐유. 지는 그런 꼴 못 봐유.”
주먹을 쥐어 땅을 다지기까지 한 순이가 채신머리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주저앉았다. 그러곤 긴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남산댁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 한숨을 쉬면 땅이 다져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어느 사이에 저리 아씨와 친해지다 못해 맹목적으로 따른단 말인가. 남산댁은 가던 길도 잊고 내친 김에 근처 마루에 앉아 짧은 담뱃대를 꺼내어 물었다.
그러는 동안 순이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지가 저기 별당 손님보다야 훨씬 잘 할 수 있었구먼유.”
무엇을 말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청이 간택 전에 처음 얼굴을 내비치는 공식적인 자리이고, 늘 자신이 대단히 아름다운 청의 시중을 든다는 것에 자부심 느껴오던 순이였으니 당연히 따라나서고 싶었을 게 아닌가. 지금도 엉엉 울고 싶은 것을 꾹 참는 게 보였다.
“빨리 크고 싶어유. 지도 빨리 열다섯이 되고 싶구먼유.”
“너는 노비도 아니면서 누굴 그리 모시려 하느냐?”
“아주매도 아시잖아유. 지가 나리께 큰 은혜를 입은 것이유. 그래서 지는 나리에게 꼭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구, 아씨를 모시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아니것슈?”
어린아이치고는 제법 똑소리 나는 대답이 돌아왔다. 담뱃대를 분해하여 하나씩 청소하던 남산댁이 의외라는 듯 웃었다.
“왜, 아씨의 비밀을 너만 아는 것 같으니 없던 사명감이라도 생긴 것 같으냐?”
“…예?”
소스라치게 놀란 순이의 눈이 대번에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즉각 아닌 척 고개를 숙였지만 남산댁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그리 어수룩해서야 어찌 아씨를 모신단 말이냐? 겨우 낯빛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주제에.”
“그, 그것은… 아주매가 갑자기 그런 이야길 꺼내셔서 그런 것이어유!”
“그럼 미리 이런 이야길 꺼낼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사흘 전에 서신이라도 부쳐두었어야 하는 게야? 겨우 그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아씨를 모신다고? 턱도 없는 소리지!”
“아니어유. 아주매가 먼저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니 그렇쥬!”
“그래도 어련히 시중드는 이라면 알아도 모르는 척, 모르면 더 모르는 척했어야지. 기본 중의 기본도 안 된 철부지가 어찌 감히 앞으로 세자빈이 되실 분을 모신단 말이냐? 너는 거기 땅을 파고 있을 자격도 없다!”
아픈 곳에 소금을 뿌린 탓일까. 기어이 순이의 입술이 씰룩이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우째유. 지 맘대로 안 되는 것을 우째유!”
“이것이 어디서 나몰라라야? 그러다 참으로 너 때문에 나리께서 도모하시는 거사가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너는 그런 때가 되어서도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쩌냐 생떼라도 쓸 것이냐?”
이래서 어중간하게 마음만 앞선 어린아이들이 위험하다.
남산댁은 과거 궁에서 생활할 때 이제 막 계례식을 마치고 나인이 된 햇병아리들이 제가 무어 대단한 것이라도 된 줄 알고 활개를 치다 큰 사고를 쳤던 일들을 떠올렸다.
순이나 그 아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충분히 판단력 있는 의젓한 사람이라, 헛된 판단을 쉬이 내리며 무턱대고 무모하게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진 나리와 아씨께서 대단한 분들이시라 네 철없는 짓들을 그저 귀엽게 여겨주셨는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리 나대다간 크게 경을 칠 일이 생길 것이다. 내가 그동안 그런 일을 한두 번 보았겠느냔 말이다.”
잘못을 하여 벌을 받고 반성을 한들 어린아이의 반성은 결코 뼛속까지 사무칠 줄 모른다.
순이가 해주에 있을 적에 아이를 지키다 매 맞아 죽었다던 노비처럼 대단히 충격적이지 않고서야 깊이 박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을 모시는 과정에서 그만한 충격을 받을 일이 생긴다면 그건 필시 이미 대단한 피해가 발생한 뒤일 터라 남산댁은 미리미리 단속을 해두어야겠다 판단했다.
“계속 그런 정신머리로 살다간 자칫 네가 그리도 끔찍하게 여기는 나리와 아씨를 모두 잃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생떼만 쓸 것이냐?”
“…예?”
순이는 금방이라도 통곡할 듯이 오만상을 구겼다. 들이쉬는 숨까지 잘게 떨렸다. 보통 서러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남산댁은 들으라는 듯이 혀를 끌끌 차댔다.
“네가 오늘 아씨를 따르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네가 어린아이라서가 아님을 모르는 게로구나.”
“그게, 무슨 말이어유?”
순이가 옷소매로 콧물을 닦아내며 되물었다. 남산댁은 순이가 스스로 의지를 다지게끔 더 밑밥을 깔았다.
“몸이 작아서가 아니라 정신머리가 덜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굳이 피곤하게 말해 주어야 아는 것이야?”
“그럼… 그러면은, 열다섯이 되지 않어두 지가 정신머리만 잘 챙기면 아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이어유?”
“멍청하긴, 당연한 소릴 하구 있어!”
그 이야기에 언제 울었냐는 듯이 순이가 벌떡 일어나 섰다.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어유?”
그럼에도 크게 눈높이가 달라지진 않았지만, 남산댁은 제법 비장해진 아이를 보며 조금은 웃기고 또 조금은 슬퍼졌다. 마냥 철부지로 살아도 될 아이를 이리 이끄는 게 맞는 것인지, 벌써부터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지가 정신머리를 잘 챙겨서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들키지 않고 잘 숨길 수 있는 것이어유?”
“…정말 알고 싶으냐?”
“그러믄유!”
당차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남산댁은 태연하게 착잡한 심정을 숨겼다.
“맨입으로?”
“…예?”
“그동안 나리께서 주신 용돈 아껴가며 전부 모은 것, 알고 있다. 그것을 전부 가져오너라. 그럼 내 예전 궁궐에서 살 적에 생각시들이며 어린 나인들을 가르치던 경험을 모두 활용해 너를 새로이 거듭나게 해 줄 터이니.”
갑작스러운 금전 요구에 순이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것을 전부 달란 말씀이어유?”
“그래. 그 정도는 내어놓아야 나도 내가 수십 년간 모은 경험을 풀어놓을 게 아니겠느냐?”
어린아이들은 조리를 모르고 조르기만 하면 당연히 대가를 치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안일함을 건드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수업의 첫걸음임을, 아이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도겸과 청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만약 전 재산을 내어놓지 않겠다고 하면 남산댁은 도겸에게 청의 시중을 드는 일에서 순이는 아예 배제 시켜 달라 청할 참이었다.
위험한 일인 만큼, 아이가 진심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가 몇 년을 모은 돈인데….”
잠시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던 아이가 이번엔 절로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아냈다.
“여기서 잠깐 꼼짝 말고 계셔유.”
그러곤 뭔가를 결심한 듯 제 방이 있는 쪽으로 사라지나 싶더니 이내 제 품보다 더 큰 나무함을 낑낑대며 들고 다시 나타났다.
“받으셔유.”
마루가 무너져라 무거운 상자를 내려둔 순이가 코를 훌쩍이며 당차게 말했다.
“여기 온 뒤로 한푼 두푼 꾸준히 모은 것이어유. 나리께서 워낙 용돈을 많이 주셔서 상자가 자꾸 커졌구먼유.”
남산댁은 확인하는 척 관심도 없는 목함을 열었다. 아이의 말마따나 제법 많은 엽전 꾸러미가 보였다.
“정말 이걸 내게 다 줘도 되겠느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아이가 이내 굳은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다 가져가시고, 가르쳐 주셔유.”
아직 흙이 묻은 손으로 상자를 남산댁에게 밀어 보낸 순이가 다시금 간곡히 청했다.
“지가 어떻게 허면은 별채 손님보다, 아니 세상 누구보다 더 아씨를 잘 모실 수 있는 것이어유?”
담뱃대를 들고 있던 남산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돈이야 교육이 끝나면 기념으로 돌려주어도 상관없지 않겠나. 남산댁은 마지막까지 재차 확인했다.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느냐?”
“그럼유!”
“좋다.”
청소를 마친 담뱃대를 다시 버선에 찔러 넣은 남산댁이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럼 이제 깨부수어볼까?”
“무엇을… 말씀이셔유?”
“그야 당연히….”
엉성한 모래집처럼 잘못 형성된 너의 정신머리가 아니겠느냐? 곧바로 쏴붙이고 싶었지만 아이의 성장 과정에 있던 불행한 일들은 결코 아이의 탓이 아니었지 않나.
남산댁은 다시 말을 골랐다.
“어린아이는 귀한 분을 모실 수 없다는 불문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