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의 명예를 걸고!”
저만치서 제학을 비롯한 직제학들이 규장각의 대표를 열렬히 응원했다. 나머지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도겸은 저 멀리 준비된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왕의 어사례 때는 호랑이의 머리가 그려진 붉은 과녁이었지만 신하들의 차례가 되자 사슴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겸은 잠시 숨을 참고 과녁을 향해 힘껏 당긴 시위를 놓아 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리고 근방에 서 있던 누군가 안타까운 듯 깊게 탄식했다.
“아이고… 겸예문은 아니었나보군.”
기껏 날려 보낸 화살은 과녁이 아닌 과녁으로부터 열 보 밖에 떨어진, 상호군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대기하고 있던 왼쪽 핍에 꽂혀 있었다.
과녁까지 가 살필 필요도 없기에 상호군이 즉각 깃발을 들어 올렸다. 보통 화살이 과녁에 맞았을 때 그 위치를 판단한 상호군이 적, 황, 흑, 청, 백의 깃발 중 하나를 들어 올리지만 도겸의 경우엔 녹색 깃발이었다. 과녁에 아예 맞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수많은 시선이 쏠린 상황에서 첫발을 허무하게 잃고 나니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적중하면 악공들이 북을 치고 맞히지 못하면 금을 연주하는지라 가죽을 두드리는 우렁찬 소리 대신 줄을 뜯는 가냘프고 구슬픈 소리만 장내를 울렸다.
한편으론 이상하기도 했다. 분명 정확히 겨냥하였고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강하게 쏘았지 않나.
“또 낙이야?”
가까이에 와서 활쏘기를 구경하던 직제학 임 씨가 눈에 띄게 실망했다. 이번에 쏘아 보낸 화살은 핍도 아닌 곳으로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도겸은 더 이상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이 화살만 쏘았다 하면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까. 한 번이면 우연이라지만 두 번이나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부는 바람은 충분히 미심쩍기 마련이지 않나.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엔 조익환이 서 있었다. 잠깐 조익환 쪽을 바라보던 도겸은 다시금 시위에 화살을 끼워 시위를 당겼다. 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 더 빠르게 날려 보낼 작정이었다.
타앙! 바짝 당긴 줄이 강한 탄성으로 화살을 밀어내며 큰 소음을 내었고,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돌풍이 불어 화살의 진로 방향을 방해했다.
“아이고, 아깝다! 왜 활만 쏘면 얄궂게 바람이 부는 거야?”
세 번째 녹색 깃발이었다. 그러나 더 강한 힘을 준 덕에 화살은 바람에 맞서 간신히 과녁의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최 직각. 한 발만 맞히면 되네. 한 발이라도!”
송 씨가 혀를 차며 제학을 모시고 돌아간 틈에 임 씨는 끝까지 도겸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도겸은 마지막 화살을 시위에 걸어 신중하게 당겼다.
“한 발만… 어어, 최 직각. 지금 무엇 하는 것인가!”
그리고 방향을 틀어 조익환을 겨냥했다. 조익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왕좌왕하며 도망쳤지만 조익환은 달랐다.
“그쪽이 아니질 않나!”
“압니다.”
조익환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뒷짐을 진 채로 도겸을 바라볼 뿐이었다. 호위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둘러싸는 게 보였다.
“한데 어찌 그러는가!”
도겸을 응원하던 임씨가 기함하며 도겸을 뜯어 말렸지만 도겸은 그럴수록 시위를 더 강하게 당겼다.
“…바람을 쏘아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특별히 윤허하여 주신 덕에 얻은 기회를 이리 허무하게 날릴 셈인가?”
“특별히 윤허하여 주셨으니 얻은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게 좌상을 쏘라는 뜻은 아니셨겠지!”
경악한 임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창졸간에 도겸이 활의 시위를 놓은 탓이었다.
“자네가 정녕…!”
이번에도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센 돌풍인지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이 가라앉을 즈음 핍에서 나온 상호군이 녹색 깃발을 들어 올리려다, 과녁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다른 깃발로 고쳐 들었다.
적색, 적중이었다. 과녁에 그려진 사슴은 미간이 꿰뚫린 채였다.
***
시사례가 끝나고 상벌이 주어졌다. 한 발만 적중해도 상을 받지만, 도겸은 다소 위험한 행동을 한 벌로 벌주를 마시게 됐다.
“어찌 그리 무도한 짓을 벌이고도 고작 벌주를 받는단 말입니까?”
“전하, 감히 어전에서 전하의 신하에게 활을 겨눈 자입니다. 당장 의금부로 압송하여 마땅한 벌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모두가 즐겁게 들기는 자리를 망칠 뻔한 도겸에게 더 큰 벌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어허, 그만들 하게. 어찌 좋은 날에 언성들을 높이는가?”
그러나 조익환이 인자하게 웃으며 다른 신하들을 만류하였다. 그리곤 도겸을 지그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전하께오선 마땅히 헤아려주시옵소서. 최 직각이야 그저 젊은 혈기에 좋은 성적을 내고자 무리하여 그런 일을 벌인 것이고 다른 신료들은 저를 걱정하여 과히 나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보우하시어 소신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정리되는 것이 옳다 사료되옵니다.”
조익환은 참으로 악랄한 말재주를 지닌 자였다. 하늘의 보호라니, 누군가는 천운으로 화살에 맞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듣는다면 감히 임금을 앞에 두고 자신을 더 우월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다 조익환을 비호하고 나선 이들 모두 조익환의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다수파의 모두가 조익환이 대단해 보이게끔 떠받들며 판을 만들고 있었다.
미묘하게 어긋난 어감을 느꼈을 임금이 슬쩍 한쪽 눈썹을 치켜떴지만,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은지 가벼이 넘겼다.
“…당사자가 저리 간청하는데 어찌 달리 명하겠는가. 그대로 진행하라.”
임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담당관이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벌주를 받을 이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도겸을 포함해 벌주를 마시게 된 관리는 총 3명이었다. 예관이 뿔잔으로 술을 떠 술잔을 받는 그릇인 잔대에 올려두었고, 도겸은 왕이 앉아 있는 북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왼손엔 시사 때 쓴 활을 든 채였다. 벌주인 만큼 왕이 직접 하사하는 일은 없었다. 곧이어 쓰디쓴 술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도겸은 다시 왕에게 예를 다하여 절을 올리고 내려왔다.
“자네는 목숨이 몇 개인데 그리 무모한 짓을 하는가!”
당연히 상관들에게 혼쭐이 나는 시간이 이어졌다. 평소 도겸을 아끼던 직제학들은 당연했고 심지어는 말수가 적고 온화하던 규장각의 수장인 제학마저 노기를 드러냈다.
“평생의 운을 오늘 다 썼다 생각하게. 좌상 대감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저로 인해 많이 곤란하셨을 줄로 압니다.”
“지금 내가 곤란한 게 문젠가? 자네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구는 게 문제지!”
“…송구합니다.”
애석하게도 도겸은 조익환이 놓은 덫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겸을 자극하고 기어이 일을 치게 했으니 말이다.
“근데 말이지.”
한참을 혼나고 나서야 송 씨가 가라앉은 분위기도 쇄신할 겸 내내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그리 갑작스레 돌풍이 불었는데 어찌 과녁의 중앙에 정확히 맞힌 겐가?”
“아, 그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뭐? 우연히 맞아떨어진 게 아니었단 소린가?”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직제학들을 바라보며 도겸이 옅게 웃었다.
“설마 제가 정말 전하께서 보고 계신 자리에서 감히 좌상 대감을 죽이려 하였겠습니까.”
“그럼?”
“앞선 세 발의 화살이 바람에 얼마나 비껴가는지, 그 각도를 가늠하여 평균을 낸 뒤 처음부터 반대 방향으로 더 기울여 쏜 겁니다.”
나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규장각의 학자들답게 도겸의 설명의 행간을 읽어내고 맹점을 짚어냈다.
“하나 그건 바람이 계속해서 같은 세기로 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걸 사람이 어찌 예견한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네.”
“그것은 결국 좌상이 맞아도 상관없다는 각오가 아니고서야….”
의식의 흐름대로 차례로 생각을 꺼내놓던 직제학들이 나란히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지는 것은 도겸을 의심하는 눈초리들이었다. 도겸은 서둘러 상관들을 설득했다.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바람이 불지 않거나 약해지더라도 사람은 다치지 않게 시위를 비틀어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게 하였습니다. 영감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처음부터 도겸은 과녁을 겨냥한 게 아니라 오른쪽 핍과 과녁 사이 어디쯤을 노린 것이었다.
제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활을 쏠 때 곁에 있던 임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순간 눈을 질끈 감느라 시위를 당기는 손끝까지는 볼 겨를이 없었을 임 씨는 눈을 끔벅이며 뒷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아니, 그리 흙바람이 부는데 무얼 볼 수나 있겠느냔 말이지.”
“그것이 다 최 직각이 젊은 패기로 저지른 모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아무리 우리가 연구를 완벽히 해낸 정책이라 한들 예상대로만 나오던가? 어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숱하게 벌어질 변수들조차 무시하고 그리 무모하게 군단 말이야!”
바람이 인위적이었음을 차마 설명하지 못한 대가로 기어이 호된 질책이 돌아왔다. 여전히 도겸을 걱정하는 송 씨가 쉬이 화를 가라앉히지 않고 사납게 몰아붙였다.
“역대 최연소로 장원에 급제하여 이른 나이에 그만한 직책에 올랐어도 지금껏 누구보다 겸손하고 바르게 행동하기에 칭찬만 해 왔더니 기어이 교만해진 것인가? 너무 조용히 지내어 기어코 이런 사고를 치는 것이냐 묻는 것이네!”
“송구합니다.”
억울했지만 별수 없었다. 이리 혼나는 것도 당연했다. 도겸은 더 이상 변명이나 해명을 하는 대신 저 때문에 마음 졸였을 직제학들의 꾸지람을 달게 받았다.
“지금까진 자네가 해 온 게 있으니 고작 벌주 따위로 무마되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이런 요행? 꿈도 꾸지 말게.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