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아씨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마치 따르는 사람을 수십은 데려온 모양새였다. 모르고 보면 중전이라도 되는 듯이 조설아는 여러 사람들을 부리며 털가죽을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화려한 꽃에 벌이 꼬이는 법이다. 다른 관리들의 자제들은 행여 꿀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입을 벌리고 온갖 찬사를 쏟아 냈다.
“이리 좋은 옷감은 어디서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저랑 같은 것인데 아씨가 입으셔서 그런 것인가요?”
“살결은 어찌 이리 고우신지요! 빛깔이 꼭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차갑고 희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 색감의 옷이나 다 어울리시는 모양입니다. 저는 파란빛이 도는 옷은 통 어울리지 않아 입어보지도 못하는데 말이어요.”
아무리 멀리 앉아도 귀에 대화 내용이 전부 흘러들어왔다. 청은 차라리 땅에 기어가는 개미의 소리를 듣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권력이란 게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이미 들어서 전해 들을 필요가 없는데도 혹시 아는 목소리나 생김새를 가진 사람이 있나 염탐하러 갔던 점희가 조용히 돌아와 구태여 상황을 전했다.
“온갖 아첨에 아부에… 귀가 다 녹을 지경이에요.”
점희가 소름 끼친다는 듯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청은 아까부터 도자기로 빚어놓은 인형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씨는 좀 어떠세요?”
“그만 물어봐도 될 정도로 괜찮아.”
“나리께서 딱 붙어서 잘 살피라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잖아요.”
“내가 안 괜찮다 해도 최상의 상태인 너보다 훨씬 나아. 그러니 앞으로 오라버니의 당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그리고….”
처음엔 태어나 처음 겪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납득이 됐다. 역시 뭐든 흥분했을 때 감정에 과하게 매몰되어 단정 지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흉을 보고 싶거든 웬만하면 입 밖으로 내뱉지 말고 생각만 해. 비는 좀 소심하게 뿌리지만 이 정도도 못 들을 만큼 모자라진 않을 테니까.”
“…예?”
아무것도 모르는 점희는 의아해하기만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청은 그런 걸 구구절절 설명해 줄 만큼 친절한 아씨가 되질 못 했다.
“뭐, 나보단 참을성이 많긴 하네. 코앞에서 저리들 시끄럽게 구는데 그걸 참고 있는 거 보면. 아니면… 소심하게 뿌리는 비처럼 능력이 달려 못 듣는 건가.”
점희에겐 말을 아끼라 하면서도 혼자 중얼거리길 그치지 않은 결과, 저만치 앉아 있던 조설아가 벌떡 일어나 청에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은 조설아의 행동에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설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도 꿈쩍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설아 아씨가 오시는데 어찌 방자하게 앉아 있기만 한단 말입니까?”
누군가 지적하기에 그제야 청의 시선이 매끄럽게 옮겨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얼음으로 빚어 만든 창처럼 차고 매서운 시선이었다. 조설아의 편을 들며 으름장을 놓던 이가 움찔하며 눈을 피했다.
“오륜의 장유유서에 따라 나보다 어린 조 낭자의 인사를 먼저 받고 나면 나도 인사를 하려 함인데, 어찌 앉아 있다 탓을 하는지 모르겠소만?”
기껏해야 천년도 살지 못했을 이무기가 어디서 수천 년을 산 용에게 먼저 인사를 받는단 말인가. 어차피 유구한 세월, 이제는 나이라는 걸 따지는 게 무의미했지만 조선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면 청은 그 누구보다 엄격히 따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설아 아씨가 더 지체 높은 집 안의 자제신데 어찌!”
누군가는 조설아를 등에 업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쏘아붙였고, 다른 누군가들은 뒤에 숨어 이러쿵저러쿵 소곤거렸다.
저 여자가 바로 해주에서 막 상경해서 눈에 뵈는 게 없다던 그 여자냐는 둥, 한양 법도 무서운 줄 모르는 후안무치가 아니냐는 둥….
청은 가볍게 귀를 긁어 털어내며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지체 높은 집 안의 자제라면 신분이 같고 나이가 어려도 굽신거려야 한다는 성현의 말씀이 있었소? 이상한 일이오. 지금껏 내가 보고 익힌 책에 그런 말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이보시오!”
“보고 있지 않소? 말하시오.”
“…하!”
간단하게 누군가의 복장을 터트렸지만 청은 도리어 보고 있는데 왜 보라고 하는지 더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서 점희가 살짝 청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게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윤 낭자, 그만하면 되었소.”
내내 사람들을 방패처럼 세워놓고 있던 조설아가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나는 괜찮소. 어차피 눈앞의 심 낭자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사람이라는 건 일찍이 파악했으니.”
눈치를 보던 이들은 조설아가 미소를 짓자 판에 찍어낸 듯 똑같이 웃어댔다.
“하… 하하, 역시 설아 아씨셔요.”
“어찌 이리도 너그러우실까. 좌상 대감께서 워낙 어진 분이라 아씨께서도 그런 것일까요?”
“말해 뭐합니까?”
왕이기에 힘을 갖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겸의 말은 무조건 맞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른다?”
청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조 낭자, 설마 아직도 간파당한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르는 것이오?”
“…뭐요?”
인내심이 깊다 생각했건만, 조설아는 생각보다 방어력이 약했다. 청의 한마디에 벌써 붉으락푸르락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나는 며칠 전 비가 내렸던 날, 조 낭자가 한 일을 알고 있소.”
청은 도겸이 되도록 조설아나 조익환과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하라 당부했던 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막상 부딪쳤을 때 한 일에 대해서는 잘했다며 칭찬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부득이 부딪친다면 아득바득 이겨야 함이 맞았다. 머릿수가 부족한 것쯤은 청에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많이 다치게 할까 걱정이 되는 게 아니라면.
“지, 지금 감히 설아 아씨께 겁박을 하는 것이오?”
누군가 득달같이 청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겁박이라니. 설마 내가 한 말로 당신들의 아씨가 타격을 받는다면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당신들에게도, 여기 이 조 낭자에게도.”
“나를 위해 함께해 주는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이지만.”
조설아가 청을 노려보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켜 줘야겠어요. 심 낭자의 말마따나 혼자서도 충분한 일에 너무 과분한 힘을 쏟고 있지 않나 싶어서.”
“그, 그러면 저희는 자리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저런 자와 너무 깊게 말 섞지 마시지요.”
주춤대며 마지막까지 앞 다투어 조설아를 지키려던 사람들이 드디어 자리를 비웠다. 한결 조용해진 사위에 청은 점희를 단단히 가리고 섰다.
그사이에 뒤쪽을 흘끔 살핀 조설아가 서늘하게 웃었다. 직전까지 짓던 온화한 미소와는 온도 차가 제법 컸다.
“오늘은 다른 몸종을 데리고 왔네?”
“너도 그 몸종은 안 데리고 왔던데. 살아 있긴 해?”
“너 뭐야.”
기습적으로 바짝 청에게 다가온 조설아에게선 분 냄새가 났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마 상대도 비슷하게 느낄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를 파악하지 못했다니 내 예상에 더더욱 확신이 드는데.”
청의 여유에 조설아가 코웃음치며 반박했다.
“내가 왜 널 파악하지 못했겠어? 너 심오균의 진짜 딸도 아니잖아. 거짓으로 간택 단자 넣은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뒤에서 점희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있으라 하여도 순이처럼 온갖 인기척을 다 내서 곤란하게 했다. 청은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여지를 줘선 안 될 것 같아 일단 잡아떼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건 그런 시시한 일이 아니야. 난 며칠 전에 비가 너무 협소하게 내린 일을 말하고 있는데 왜 뜬금없는 이야길 해?”
“협, 협소? 너…!”
기어이 발끈한 조설아가 무어라 소리치려던 순간,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짐승이 낮게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천둥이 치기 전의 전조와도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지라 민감하게 하늘을 살피던 청은 곧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마찬가지로 퍼뜩 고개를 들었던 조설아가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너, 지금 나한테 기어오른 거 후회하게 될 거야.”
“기어오른 게 아니라 이미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해?”
“웃기지 마!”
갑자기 여유를 잃고 불안해하는 조설아는 어느 쪽인가를 의식하면서도 청에게 쏘아댔다.
“한 번은 봐줬지만 두 번은 없을 줄 알아. 곧 땅을 기어 다니게 될 거다!”
“그래. 기대할게.”
결국 청을 노려보며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도 조설아가 어디론가 급하게 사라졌다. 그대로 따라갈까 싶었지만 점희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었다.
들고 가기엔 도겸이 되도록 함부로 사람을 들어 옮기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고한 바가 있기에 또한 생각에 그쳤다.
“아씨… 괜찮으셔요?”
“말했지.”
그리고 지금은 놓쳐도 괜찮았다. 조설아가 저보다 격이 낮은 미물에 그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강하다고.”
***
본래는 직책이 높은 당상관들이 단상 위에 올라 활을 쏘고, 당하관들이 단상 아래에서 시사한다. 그러나 오늘은 이례적으로 시사자들이 모두 정4품 이하의 관리들인지라 정4품의 관리들이 단상 위에서 활을 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도겸의 차례가 되었다.
“규장각 직각 최가 도겸의 시사가 있겠나이다!”
도겸은 먼저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왕에게 예를 갖추고 숨을 고르며 활을 들고 섰다. 활쏘기 성적뿐 아니라 어떤 손으로 쏘았는지까지 의궤에 낱낱이 기록될 것을 생각하니 적잖이 긴장되었다.
송 씨가 준비한 활과 화살이 상당히 고급품인지라 결과가 나빠도 함부로 장비가 나빴노라며 탓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도겸의 차례가 되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