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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75)화 (60/197)

파란 하늘 아래 높게 설치된 하얀 장막이 물결처럼 잔잔하게 펄럭였다. 어수선하게 분산되어 있던 사람들은 왕이 도착하자마자 모두 함께 마중하는 예를 치른 뒤 각자의 자리에 서서 식순에 따라 움직였다.

“좌방(左方)이오!”

장막 아래로 놓인 세 개의 단, 그중 가장 높은 상단은 휘장과 햇볕을 가리기 위한 차일로 둘러싼 왕의 어좌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단엔 용이 수놓아진 자주색의 방석이자 왕이 활을 쏘는 자리인 어사위가 정갈하게 놓인 채였다. 종친들과 문무백관들은 그 아래 하단에 섰다.

동쪽의 문관들과 서쪽에 늘어선 종친 및 무관들은 어사위를 밟고 선 왕의 활쏘기 시범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은 남쪽으로 90보 밖에 놓인 과녁을 보며 침착하게 어궁의 시위를 당겼다. 왕의 주변엔 자줏빛 복색을 한 장교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주군을 호위했다.

“유(留)이옵니다!”

호랑이를 수놓은 과녁으로부터 열 보 밖에서 가죽으로 만든 방어막인 핍을 치고 대기하고 있던 상호군이 화살이 약간 아래쪽에 꽂혔다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악공들이 북을 치고 종경을 울렸다. 어사취시관이 달려가 과녁에 꽂힌 어시를 처리하였다.

“한때 신궁이라 불리셨던 전하께서, 어찌 세 번 중 두 번이나 겸양의 미덕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느긋하게 보고 있던 조익환이 임금에게 조롱 섞인 농을 건넸고 주변 대신들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과인이 솔선수범하지 못하는 만큼 자네들이 본보기가 되어 주리라 믿네.”

근래 안력이 떨어져 활쏘기가 여의치 않은 임금은 노하는 대신 너그럽게 웃어넘겼다.

“쯧쯧, 금상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됐구먼.”

어디선가 혀를 차며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든 도겸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수많은 문관들 중 감히 누가 불경한 소리를 해대는지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잠자코 자세를 바로 하며 왕이 다시 어궁에 어시를 꿰어 시위를 당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념이 끼어들어 눈앞이 흐려졌다.

지금쯤 청이 헌가의 연주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진 않을까. 아까 조익환이 나타나자마자 가뜩이나 희미한 혈색이 싹 사라지며 괴로워했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붙잡은 팔이 전보다 여위어 있는 게 느껴져 부쩍 걱정도 되었다.

“조익환이라는 자가 인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돼. 모르겠어.”

온갖 미물의 말을 듣고 죽은 것에 남은 원한까지 읽어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르면 어쩔 수 없다 생각했지만 청은 달랐다.

“상대의 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내가 아는 이유로는….”

제 손가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반지를 원망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양(揚)이옵니다!”

다시금 상호군이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쏘아 보낸 왕의 어시는 과녁의 중앙에서 위쪽으로 치우쳐 꿰뚫은 채였다. 다시금 악기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도겸은 저만치 앞에 서서 비웃는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고 있을 게 분명한 조익환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귓가엔 청이 한 말이 맴돌았다.

“상대보다 격이 낮을 때.”

그러느라 모두가 허리를 숙여 왕의 활쏘기에 읍을 하여 예를 표할 때도 도겸은 한 박자 늦게 따라 움직였다.

“시사례를 행하라.”

“예, 전하.”

어사례를 마치고 들어간 왕의 명령에 앞으로 나선 병조판서가 행사를 지휘했다.

“시사자들은 시사례를 준비하시오!”

왕의 시범이 끝나고 나자 본격적으로 신하들의 활쏘기가 시작되었다.

보통은 종2품 이상인 왕의 부마를 포함하여 종친들 10명과 정1품을 포함한 문신 10명, 그리고 정3품 이상의 무신 10명까지 총 서른의 시사자들이 다른 백관들을 대표해 네 발씩 쏘았다.

이번 시사례의 시사자로 선발된 직제학 송 씨가 망신살을 당할까 걱정하며 중얼댔다.

“벌주를 받지 않으려면 한 발만 적중시켜도 되지 않던가?”

“그렇지. 한 발만 맞춰도 활과 요대정도는 하사받지 않던가?”

지난번 시사자로 나섰다 벌주를 마셨던 직제학 임 씨가 느긋한 얼굴로 긴장하는 동료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활시위를 가볍게 당겨보며 채비하던 송 씨가 씩 웃으며 자신의 목표를 정했다.

“작년에 자네가 한 발도 적중하지 못하여 벌주를 마셨었지? 옳거니, 그럼 나는 한 발을 목표로 하여 자네만 이겨도 만족하겠네.”

“뭐야?”

품계가 낮은 관리들은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에 도겸은 슬슬 눈치를 살펴 청을 보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청에게 조익환 부녀를 보이는 것이고, 이미 청의 반응을 보았으니 되었다 생각하던 차였다. 부딪칠 일이 없게 아예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행사를 고른 보람이 있었다.

“전하, 신이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각자의 활과 화살을 준비하는 시사자들에 앞서 조익환이 임금에게 허리를 숙였다. 어수선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백관들은 물론 종친들까지 실세나 다름없는 조익환의 눈치를 살피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그를 모르지 않을 왕이 되물었다.

“무슨 청인가?”

“매년 고관들만 시사례를 행하니 상을 받는 이들도, 벌을 받는 이들도 달라지는 것 없이 늘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슬쩍 자리를 비울 틈을 찾던 도겸은 멈칫하며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여, 올해는 기준 이하의 관원들에게도 기회를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참으로 악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본디 군신 간의 예를 확인하며 화합을 도모하여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또한 민심을 다스리는 행사가 바로 대사례이지 않나.

더불어 국정의 방향을 정하는 정치적 의미도 깊기 때문에 시사자는 되도록 고관이어야 했다. 활을 쏘기 전, 그리고 상을 받거나 벌을 받을 때에도 왕에게 절을 하며 신하로서 예를 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하급 관리들에게 넘겨 버리면 고관대작들은 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게 된다. 조익환이 원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뻔히 그려졌다.

“무어라?”

당연히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임금이 불쾌한 기색을 바로 드러냈다.

“그대들이 어린 관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무엇보다 이 대회엔 전하께서 하사하시는 좋은 상품이 걸려있으니 요즘 같은 때에 녹봉도 변변찮은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익환은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왕을 압박했다.

“설마, 전하께오서는 그저 시사를 하급 관리들에게 맡긴다 하여 대사례의 엄중한 의미가 퇴색된다 여기시는 것입니까?”

아무리 다수파의 수장이라 하여도 감히 왕에게 이런 식으로 비꼬는 언사를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다 못한 도겸이 무어라 하려던 차였다.

“저…!”

“나서지 말게.”

어찌 알았는지 직제학 송 씨가 다급히 도겸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자네가 나서나, 나서길?”

“하지만….”

눈치 빠른 임 씨도 나서서 나직이 도겸을 말렸다.

“나서서 잠시 잠깐 백관들 앞에서 좌상에게 면박을 준들, 자네에게 잘했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말이네.”

“그럼 전하께서 모욕을 당하시는 것을 이리 무력하게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자네가 나선다면 전하께서 더더욱 치욕감을 느끼실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가?”

“그…!”

별수 없었다. 도겸은 조익환의 옆모습을 노려보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다른 시사자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왕은 차분하게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소, 소신은 좌상의 청이 매우 합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영의정은 왕이 아닌 조익환의 눈치를 살피며 좌상을 두둔했다. 일국의 최고 재상이 동의하니 다른 이들의 의견은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왕에겐 도겸이 예상한 대로 요청을 불허할 명분이 부족했다.

“…윤허하겠다. 병판!”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그대가 행사를 지휘하고 있으니 새로 시사자로 참여시킬 하급 관원들의 기준을 정하여 속히 진행하게.”

“예, 전하!”

“병판. 속행을 위해 내가 첨언 해도 되겠는가?”

철저하게 짜둔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왕에게 즉답을 해 놓고도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병조판서에게 조익환이 다가섰다. 병판도 자신에게 뻗어오는 구원의 손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입니까?”

“종친과 의빈부에서는 방계 이하, 문신과 무신들은 각 청의 정4품에서 정6품까지, 그중에서도 연소자 위주로 10명씩을 뽑게 하면 어떻겠는가?”

도겸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조익환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면 규장각에서 시사자로 나갈 사람은 바로 저이기 때문이다. 직각의 직책을 갖고는 있지만 품계로만 따지면 정4품의 응교와 같은 데다 규장각의 대교보다도 나이가 어리지 않나.

“와중에 훌륭한 조언이십니다! 자, 좌상 대감의 말씀대로 진행하게!”

조익환이 시키면 똥이라도 퍼먹을 기세로 넙죽 의견을 받아들인 병판이 나머지 관원들에게 조익환의 말대로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럼 우리 규장각에서는 최 직각이 나가야겠군? 자, 궁시는 내 것을 쓰게.”

한 발도 맞추지 못할까 긴장하고 있던 송 씨가 한시름 놓은 얼굴로 도겸에게 자신의 활과 화살을 건넸다. 당연히 고관들에게 시사의 기회가 돌아가리라 예상하고 아예 시사 준비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최 직각 활 솜씨를 못 봤네.”

긴장에서 벗어난 영감들이 신나게 도겸을 응원했다.

“규장각의 명예를 걸고!”

“자네 활쏘기 성적이 의궤로 남아 후세에 남겨지는 것 잊지 말고!”

“자네, 내 막내딸에게 상처를 준 일을 만회하려면 규장각의 겸예문이 되어야하지 않겠나?”

벌주를 안 마셔도 된다는 생각에 신난 송 씨까지 있는 대로 부담을 주니, 도겸은 절로 어깨에 긴장이 들어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병조의 관원이 시키는 대로 단상에 올라 순서를 기다리던 도겸은 마침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조익환과 눈이 마주쳤다.

조익환은 여느 때와 같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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