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누구십니까. 박 참판댁 정부인 마님이 아니십니까?”
“…그간 격조하였네, 숙부인.”
“지난번에 찾아뵈었더니 고뿔에 걸리셨다 하여 돌아와 귀한 약재를 구해다 댁으로 보내드렸는데, 그건 받아보셨습니까?”
“약재? 그런 건 받은 기억이 없는데.”
“…예? 그럼 청에서 들여와 겨우 구한 약재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훈련원은 악공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며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인사를 나누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본래는 무관들을 뽑기 위한 시험장이자 무예 훈련을 위해 사용되는 엄격한 군사 시설이지만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이는 날인지라 훈련원도 한바탕 만남의 장이 되어 있었다.
대사례는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즐기는 단합의 장이다. 거기에 무관들이 무력을 쓰더라도 덕을 행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 문관들은 지나치게 글을 숭상하는 풍조를 경계하도록 하여 문무의 균형을 잡기 위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목소리로는 도통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렵겠군.”
소란스러운 주변을 보며 도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이리 장터처럼 소란스럽진 않았는데 말이다.”
근래 도성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 워낙 많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입방아를 찧느라 더 그런 듯했다.
게다가 도겸에게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은지라 보통 정신없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조정 대신이며 관리들이 전부 모일 때가 흔치 않은 것을 고려하면 지금이 새로운 세자빈 후보를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면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할 듯싶은데, 괜찮겠느냐?”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청은 주변의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는지 곧 제 말투를 정정하였다.
“소녀는 개의치 마셔요.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왠지 그 말이 더 못 미덥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도겸은 어여쁜 누이를 흐뭇해하는 오라비로서 부드럽게 웃어주려 노력하였지만 어쩐지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아마 오늘은 직접 마주칠 일이 딱히 없을 터라 별일은 없겠다만….”
집에 돌아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을 터였다. 도겸이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청의 뒤에 선 점희는 눈만 굴리고 있었다.
혹시 몰라 언의 도움을 받아 주변에 익위사들을 배치해놓았기에 위험해질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고는 늘 불시에 일어나지 않나.
“최 직각 나리!”
그때 전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송유화가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도겸을 찾았다.
“이리 또 뵙습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송유화는 이름처럼 한 떨기 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복숭앗빛 치마가 사락거렸다. 도겸은 송유화의 뒤에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주시하는 직제학 송 씨를 의식하며 깍듯하게 굴었다.
“아, 유화 낭자. 그날은 잘 들어갔소?”
도겸이 당사자보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더 의식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송유화가 뺨을 붉혔다.
“혹여 나리께서 전갈을 주실까 하여 그날 이후로 쭉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찌 아무런 연통이 없으셨는지요?”
상대가 상당히 저돌적인지라 도겸이 아무리 마음 먹었다 하여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오. 일이 많아 사사로이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소.”
“어찌 그런가? 요즘 시간 맞춰 칼같이 퇴청하지 않았나. 그사이에 한 번 만나줄 틈이 없던 겐가?”
기어이 송 씨가 끼어들어 가볍게 질책했다. 살살 권유하는 것을 거절하자 대놓고 밀어붙이기로 한 걸까. 도겸은 당혹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직제학 영감, 그것이….”
“제 탓입니다.”
그때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청이 끼어들었다. 과하게 단장하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을 과시하기엔 충분히 아름다운 여인이 불쑥 도겸의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오라버니는 다른 여인에게 눈을 둘 틈 없이, 저를 돌보는 데 바쁘셨기 때문이지요.”
청의 뒤통수만 보고 있는 도겸은 점차 식어가는 송유화의 낯빛으로 청의 표정을 예상해 볼 따름이었다. 아마 냉혹하고 무심한 눈빛일 게 분명했다.
“…청아.”
도겸이 슬쩍 손목을 잡으며 말려도 소용없었다. 청은 도겸의 체온을 느꼈을 텐데도 꿋꿋하게 제 할 말을 다 했다.
“도겸 오라버니는 밤낮없이 미흡한 누이를 가르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니….”
도리어 팔짱을 끼며 싱긋 웃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도겸이 흠칫 놀란 틈에 청이 쐐기를 박았다.
“함께 차를 마실 사내가 필요하다면 다른 이를 찾아봄이 어떻겠소?”
기어이 송유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상처 받은 여인은 무어라 말도 잇지 못하고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홱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아니, 낭자….”
도겸이 따라가려 했지만 청이 욱신거릴 정도로 붙잡는 터라 말뚝을 박듯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괘씸하게 느껴졌는지 직제학 송 씨까지 불유쾌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가 자네를 그리 어여삐 여겼는데 어찌… 내 딸에게 이럴 수가 있나!”
“여, 영감. 그게 아니라…!”
송 씨마저 분노를 콧방귀로 분출하며 매섭게 돌아서 귀한 막내딸을 찾아 나섰다. 도겸은 여전히 청에게 붙들린 채였다. 그는 우선 왠지 모르게 뿔이 난 여인부터 설득했다.
“청아, 이것 좀 놓거라. 이러다간 팔이 부러지거나 땅에 박히지 않겠느냐?”
“…차라리 그렇게 할까.”
“뭐?”
“네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신기한 일이었다. 주변이 소란하다 투덜거린 게 얼마나 됐다고 모든 잡음이 흐려졌다. 도겸의 귀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잇는 청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잊어버리다니. 무얼 말하는 것이냐?”
“서로 독점하기로 한 거.”
청이 눈을 들어 도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거, 넌 내 것이라는 뜻이잖아.”
“그렇기야 하다만….”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지만 기실 머릿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해 서로를 최우선으로 하여 모든 일을 협의하고, 그 과정에서 숨기거나 진실을 숨기지 말자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으니까.
그 뒤로 청을 볼 때마다 울렁이는 마음은 그저 몇 번이고 제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초월적인 존재에게 느끼는 두려움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왜, 지난번부터 청이 꼭 제 이성 관계를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자신이 청을 두려워하고만 있었다면 그런 생각으로 이어질 리 없지 않나.
“…겨우 차 한 잔 마시는 일에 어찌 그리 반응하는 것이냐?”
아니, 생각이란 원래 두서없는 법이다. 심중이 어지러운 것은 가라앉히면 그만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된다. 도겸이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는 넌.”
청이 태연자약하게 잔잔한 그의 수면에 파도를 일으켰으니까.
“겨우 차 한 잔 마시는 일로 오래 기다렸다 생색내는 송유화한테는 왜 그렇게 말 안 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로는 송유화의 뒤에 선 직제학 송 씨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그러나 솔직히는, 청이 저를 사수하려 날을 세울 때마다 요동치며 불길이 이는 마음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좌상 대감 오셨습니까!”
그때 누군가 조익환의 등장을 큰 소리로 알렸다. 삼삼오오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란을 멈추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마치 물이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도겸은 굳이 가까이 가지 않고도 큰 키를 활용해 사람들 너머를 먼저 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입구 안쪽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와 웃으며 내리는 조익환과 마찬가지로 크고 화려한 가마에서 내리는 조설아가 보였다.
주변에서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사람들만 보면 임금의 행차나 다름없었다. 심란하던 마음이 단박에 가라앉고 냉철해진 도겸이 반사적으로 청을 감싸며 나직이 말했다.
“청아, 저들이다. 저들이 바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은 틈에 얼른 조익환과 조설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어쩐지 청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파랗게 질린 청은 이마를 짚으며 휘청하기까지 했다.
“청아, 어찌하여 이러는 것이냐!”
“대체 뭐지?”
“낯빛이 좋지 않다.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도겸이 펄쩍 뛰며 난리를 치는 통에 조익환에게 인사를 하러 가려던 사람들 중 몇몇이 돌아볼 정도였다. 근방에 서 있던 점희도 깜짝 놀라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와중에도 청은 그녀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은 듯 혼란한 얼굴이었다. 도겸에게 안겨있다시피 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연 것은 그러고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람들이 향하는 쪽으로 몇 걸음인가 나아가 저만치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청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누구라고?”
“조익환이다. 조설아의 아버지.”
청은 사람들이 양 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숙여가며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들어오는 조익환을 보고 있었다.
“저기 저 인간이… 조익환이라고.”
여전히 어딘가 괴로운 듯 그 고운 미간이 한껏 찌푸려진 채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스스로 눈을 비벼가며 재차 확인할 땐 점희가 기겁하며 뜯어말리려 했다.
“아씨, 곱게 화장한 것이 전부 지워집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씨!”
“언성을 낮추거라, 점희야.”
기함하는 점희를 물리며 청의 곁으로 다가선 도겸이 다시 물었다.
“무어라 하였는지 듣지 못하였다. 청아, 괜찮은 것이냐?”
혼란한 얼굴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청은 도겸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긴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충격을 받은 청이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답을 주었다.
“조익환이라는 자가 인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돼.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