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례가 있는 날이었다. 조정의 백관들은 당연히 참석해야 하지만 그들의 가족도 참관할 수 있었고, 도겸은 누이 동생인 청을 그 자리에 불렀다.
백관이 참석한다면 당연히 좌의정인 조익환은 물론 조설아도 모습을 내비칠 것인지라 따르는 이는 자연스레 점희로 정해졌다. 남산댁은 자칫 궐의 사람들과 마주쳐서는 안 되는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라고 했기에.
“허지만은… 아씨를 모시는 건 지가 허기루 혔잖아유!”
“나를 모신다면서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직전에 내가 시끄럽다고 두 번이나 말하는 동안 하등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지? 그래서 내가 가마를 부순 게, 누구 때문일까?”
“…….”
청의 신랄한 지적에 대꾸할 길이 없는 순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이 씰룩대는 게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게 뻔했다.
“또 울면 이번엔 정말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두고 갈 거야.”
청이 저만치에 우뚝 서 있는 높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아이를 겁박했다.
“그려두….”
마지못해 미련이 남는지 아이가 우물쭈물하며 올려다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널 곁에 두는 건 내 필요에 의해서지 네 욕심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고 돌아가.”
기어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순이는 잽싸게 옷소매로 눈가를 훔쳐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가유. 가면 되잖아유.”
돌아선 작은 발이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조금씩 멀어져갔다. 청은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이를 집에 두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물론 도겸이었다. 지난번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모욕 아닌 모욕을 당한 조설아가 순이를 보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청은 조설아 백 명이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순이를 지켜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혹시 점희가 조익환을 모시는 사람들 중 낯익은 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도겸의 말에 청은 별수 없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한들 따르는 이가 많을수록 거추장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새로 채우는 기력보다 빼앗기는 기력이 더 많다 보니 갈수록 기운이 없어 예민해지고 있기도 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조금 더 둥글고 간단하게 순진한 아이를 다룰 수 있었을 텐데, 그 전에 둘 다 데리고 가는 것부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스스로의 능력치가 떨어짐을 체감하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날카로워진 신경을 제어하지 못하고 기어이 아이에게 날 선 감정을 드러낸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깊은 바다는 쉽게 파도가 일지 않는 법인데, 어찌 이렇게 가벼워진 걸까.
“그럼 가자.”
가마꾼들이 열어 주는 입구로 다시 들어가 앉은 청은 잠시 저 혼자 먼저 대사례가 열리는 훈련원으로 가서 가마꾼들과 점희를 기다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접은 건 훈련원이라는 곳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동안 나리도 아닌 아씨께서 저를 어찌 지켜 주신다는 것인지, 도통 믿지 못하였습니다만….”
가만 곁에서 걷던 점희가 뻥 뚫린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리 힘이 세신 것을 보니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네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 적 없으니까 조용히 따르기나 해.”
“예?”
“그리고 천자문 외우는 데 열흘씩이나 걸렸으면서 순이더러 느리다고 비교하고 조롱하지 마. 내 눈엔 너도 똑같이 느려 터졌으니까.”
“…….”
간단히 점희의 입을 다물게 한 청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더 일찍 바람구멍을 내 버릴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은 대체 왜 스스로 예쁜 감옥에 기어들어 가는 걸까. 이 땅은 역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
“오는 길에 대로에서 습격이라도 당했느냐? 가마가 왜 이리 부서진 것이냐!”
물론 대사례가 열리는 훈련원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도겸이 뒷목을 잡으며 기함했다.
“그냥 살짝 건드렸는데 부서진 거야.”
우아한 자태로 가마 밖으로 나온 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도겸은 청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상한 곳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그럴까 봐 가장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달라 한 것인데… 다친 곳은 없느냐?”
“없어.”
큰 행사가 있는 곳답게 운종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도겸이 제 가마를 단박에 찾아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씨께서 맨주먹으로 부수신 것입니다!”
곁을 따라온 점희가 냉큼 도겸에게 일러바쳤다. 청이 냉랭하게 대한 것에 앙금이 남았는지 뚱한 얼굴이었다.
“제가 보았습니다.”
도겸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확언하기까지 했다. 몸을 쓰거나 능력을 써서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고서야, 청은 웬만하면 무심한 편이기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을 살피던 도겸이 도리어 점희에게 매섭게 물었다.
“네가 청이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니고?”
“…예?”
“웬만하면 크게 반응하지 않는 아이인데, 가마를 부술 정도면 네가 뭔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냐, 이 말이다.”
“그, 그것은 순이가 자꾸 따라오며 아씨의 시중은 자신이 들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씨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입니다!”
점희는 도겸이 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편을 든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내가 듣기에 그런 사유는 핑계에 불과한데. 모시는 척이라 하여도 맡은 바 역할은 제대로 해야 한다. 네 처지가 어떤 상황인지, 이곳이 어딘지 잊었느냐?”
결국 믿는 구석을 잃은 점희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나리.”
청은 물론 도겸이 일부러 제 편을 든 것임을 알기에 그다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도겸이 가마꾼들에게 행사가 끝날 즈음에 다시 오라며 삯을 건네는 동안 누군가 다가와 청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송유화에게서 났던 나무 냄새가 나는 나이든 남자였다.
그리고 청은 이제 사람마다 달리 나는 특유의 나무 냄새가 바로 각자 사는 집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향이 밴 것임을 알았다. 고로 송유화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이보게 최 직각, 곁에 있는 낭자가 자네의 누이인 겐가?”
송유화와 도겸이 나누었던 대화까지 되짚어 보자 누군지 확실히 답이 나왔다. 청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직제학 영감.”
도겸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상체를 숙인 청은 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남자가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송유화의 아비일 것이라 판단했다.
“예. 이 아이가 제 사촌 누이입니다. 청아, 이분이….”
“규장각의 직제학 영감 되시지요. 오라버니께 익히 좋은 말씀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소녀 심가 청이라 합니다.”
대사례를 앞두고는 숨 쉴 시간까지 아껴 남산댁의 예절 수업을 들었다. 덕분에 청은 이제 정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조선의 어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어… 심 목사가 이리 어여쁜 여식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미처 몰랐구먼!”
“과찬이십니다, 영감.”
당연한 말을 들어도 겸손하게 대꾸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겸양의 미덕이란 게 중요하다고 하니 청은 그러려니 하며 그저 이왕 임한 일에 완벽을 추구할 뿐이었다. 그런 청에게 도겸의 흐뭇한 시선이 와닿았다.
“이제 슬슬 들어가 자리를 잡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감.”
“그렇지. 내 소문 무성한 자네의 누이를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여 저기서부터 가마를 내리고 뛰어왔다네.”
“당연히 안에 들어가서 인사를 드렸을 텐데요.”
“알잖나. 내가 궁금한 것은 최대한 빨리 해갈해야 한다는 걸. 아, 우리 유화도 왔네. 일전에 세책점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던데, 인사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주변을 돌아보던 청이 직제학을 바라보았다. 결코 달갑지 않은 제안인 탓이었다.
세책점에서 송유화를 만났던 그 날, 청은 송유화의 눈에서 도겸을 향한 소유욕을 읽어 낸 기억이 있었다. 최도겸은 제 것이지 않나.
“한데 그러기엔 영감.”
청이 막 송 씨의 제안에 훼방을 놓으려던 차, 도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화 낭자도 이번에 단자를 넣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기야 하다만 정해진 이가 있다 하니, 훨씬 가능성 있는 사내와 인사시키는 게 더 좋을 듯하여.”
송 씨가 허허 웃으며 겸연쩍은지 수염을 쓸어내렸다. 도겸은 그저 너그럽게 마주 웃으며 상황을 유연하게 이끌었다.
“일단은 들어가시지요. 인사는 차차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세.”
마치 부자지간처럼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눈 도겸이 직제학 송 씨를 앞세워 보내고는 다시 청을 챙겼다. 웃음기 있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긴장한 채였다.
“미리 얘기했지만 다시 한번 새겨듣거라. 뭔가 위험을 감지하면 바로 몸을 사려야 한다. 절대 홀로 대적하여서는 안 돼.”
청은 주변을 둘러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니까.”
아직까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조익환이 사람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확인해 볼 수 있는 날이 아닌가.
도겸이 가장 궁금했겠지만 청도 내심 신경이 쓰이는지라 다른 때보다 더 온 신경에 날이 서 있었다.
“네가 다칠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겸이 다른 때와는 달리 굴어 청을 당황스럽게 했다.
“…뭐?”
되묻는 청에게 그는 그저 긴 팔로 가볍게 감싸며 제 할 말만 전하였다.
“뭔가를 느끼거나 겪는다 하여도 너무 깊이 들어가선 안 된다. 알겠느냐? 어떻게든 나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청은 도겸과 함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번쩍 들어다 나무를 타 넘어 집으로 데려다 주었던 그날, 종일 파랗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위급할 때 과연 도움이 될까.
“알았어.”
그러나 일단 대답은 도겸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골라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청을 들들 볶아 댈 게 뻔하지 않나.
“좋다. 그럼 들어가자.”
“…응.”
도겸은 알지 못했다. 청이 조선의 법도를 익히고 인간의 습성을 배울수록, 겉과 속을 분리하는 방법도 익혀 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