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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72)화 (57/197)

“우째 아셨대유? 꽃 필 때 맞춰 책거리 하려고 미뤄 둔 것이구먼유!”

폴짝폴짝 뛰어 자신의 방이 있는 쪽으로 사라지는 순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도겸이 점희를 향해 돌아섰다. 점희는 마찬가지로 폴짝거리며 사라진 어린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땐 살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지금은 소용없음을 알았으니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이에게 다정다감하게 굴던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도겸의 냉담한 물음에 점희는 이 집에 온 이후로 한결 말끔해진 모습이었으나 훨씬 더 주눅이 든 채로 두 손을 모았다.

“어차피 앵속각에 중독되어 내일도 생각지 않고 약을 구걸하던 이들보다야… 겨우 자유를 얻은 어머니가 하루라도 더 사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하였습니다.”

“오만하구나. 네가 무엇이라고 감히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판단하여 저울질한단 말이냐?”

“제게 주어진 선택지가 그런 것뿐인데 그럼 어찌합니까.”

기어이 점희가 풀썩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매일 툭하면 아버지에게 맞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며 조부모님께 무시당하며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어머니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쳤어요.”

그뿐만 아니라 점희의 아비는 아직 어린 딸을 나이 든 신랑의 재취 자리에 팔아넘기다시피 시집보내려 하였다.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에게까지 무디게 느껴지진 않을 터였다.

“번듯하게 살고 싶어 구걸하듯 얻은 책으로 공부도 하였지요. 열심히만 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와집에 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머니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길쌈을 하며 함께 일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병 때문에 손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병으로 사지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딱하고 기구한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 땅을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조금씩 적시던 점희가 또박또박 제 사정을 읊어 나갔다.

“아무리 배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값도 제대로 벌기 어려운 필사뿐이었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글씨를 팔지 못하면 몸이라도 팔아야 한다지만 그럼 어머니를 돌봐 줄 이가 없기에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와중에 그런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를 그런 집에서 데리고 나온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리하였습니다!”

도겸이 말없이 내려다보는 동안, 결국 점희는 홀로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를 위하였음에 저는 결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건만, 어머니는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

“어머니가, 집에서 도망친 것을 후회하며 우셨습니다…!”

바닥을 짚은 점희가 마른 흙을 쥐곤 꺽꺽대며 통곡했다.

“저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이리한 것이란 말입니까.”

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낮추어 앉았다. 그러곤 엎드린 점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간, 참으로 고단하였겠구나.”

점희는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기껏해야 열다섯쯤 됐을 소녀가 맞닥뜨린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였다.

그런 점희에게 도겸은 쉽사리 위로를 건넬 수도, 다시 한번 냉담하게 굴어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릴 수도 없었다.

“언제나 옳은 길만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나 결과가 좋지 못하다 하여 네가 고른 길이 반드시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면 너는 결국 스스로를 경멸하게 되었을 테니.”

“적어도, 어머니가 후회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그 책임은 네 몫이 아니다. 또한 너를 따라 집을 나선 어머니의 결정이 아니었느냐? 적어도 그때는 네 어미의 사지가 멀쩡하였을 터인데.”

도겸은 흙을 쥔 점희의 손등 위에 수건을 올려 두고 일어났다.

“그러니 죄의식을 느끼려거든 억울하게 죽은 네 명의 처자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 게 더 낫겠지. 겁박을 받아 한 일이니 과한 처벌을 받진 않겠다만, 그렇다 하여 네가 한 짓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도겸은 그길로 제 방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아직 바닥에 엎드리고 있던 점희가 울분 어린 투로 물었다.

“그럼 저는… 언제까지 약자로만 살아야 합니까?”

“…….”

“저는 결코 강해질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결코 어머니처럼 누군가의 마누라로 살며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되고, 그러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천대를 받는… 그런 인생은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을 걸고 저지른 일이 수포로 돌아가다 못해 안 한 것만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절망적일까.

“아득바득 산들 이런 삶이라면, 더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네 어미가 죽으면 따라가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왜, 한 번 네 결정이 틀렸음을 알고 나니 목숨을 끊고 싶냐 묻는 것이다. 그 선택은 옳은 선택이라 자신하느냐?”

그저 어여쁨 받고 자랐다면 점희도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매맞지 않고 지아비를 모시는 것이 큰 기쁨이라 점잖게 가르침 받고, 또 아들을 낳는 것이 큰 영광이라 다정하게 가르침 받았다면…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싶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자라난 불씨는 점희로 하여금 다른 삶을 꿈꾸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겸은 억지로 그 불을 꺼트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스스로 꺼지려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그는 흔들리는 불꽃 앞에 섰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예?”

“세책점에서 네가 적은 필사본을 찾을 때, 네가 직접 쓴 소설도 보았다. 진취적인 여성이 등장하여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보기 드문 작품이더구나. 이런 시대에도 그런 생각을 해내는 작가가 대단하다 여겼고 실제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라,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런 삶을 살고 있기에 꿈으로만, 상상으로만 여기고 허구로 그려 낼 수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후회하게 되더라도 끝까지 너의 삶을 믿고 나아갈 생각이 든다면 내게 증명해다오.”

흔들리는 불꽃 앞에 선다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날 선 바람들을 모두 막아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삶들을 모두 돌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손에 닿는 만큼은.

“누군가의 아내나 아이를 생산해야 하는 의무로만 살지 않는, 점희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마.”

그의 말에 비로소 점희가 고개를 들었다. 도겸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으나, 그 어조의 결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단 말 몇 마디로는 안 된다. 증명하지 못하면 이 일이 끝나는 대로 내 보호도 끝날 테니 그리 알아 두어라.”

점희의 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도겸은 그길로 더는 멈추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점희의 어미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

“나리, 철봉이가 왔습니다요.”

행랑아범이 아뢰자 책을 읽던 도겸이 책을 덮으며 반겼다.

“어서 들라 하게.”

“예.”

며칠에 한 번 도겸의 집에 들르는 전인 철봉은 사랑으로 들어와 도겸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품에서 서신 꾸러미를 꺼내어 건넸다. 도겸은 서신의 수를 세어보고는 뒤에 선 행랑아범에게 지시했다.

“먼 길 오가느라 고생하였을 텐데 든든한 식사부터 준비해주게.”

“예, 나리.”

철봉과 행랑아범이 나간 뒤 도겸은 지체 없이 서신 봉투를 열었다. 사안에 따라 바로 철봉을 통해 회신해야 할 수도 있는 탓이었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는 손길과 줄글을 읽어 내리는 눈길이 바빴다. 즉시 먹을 갈아 회신할 편지를 적어 내리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러나 마지막 서신을 열었을 때, 도겸의 손길이 멈칫했다.

성수청 무녀들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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