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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71)화 (56/197)

“괜찮으냐?”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선의 아침은 파루가 치는 동시에 시작됐다.

거리는 장사를 시작하는 상인들과 물건을 대려는 사람들, 물을 길어 가거나 끼니를 때우고 일터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일찍부터 북새통이었다.

청이 불편해할까 싶어 아직 신경이 쓰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건 적응됐어. 근데….”

“근데?”

다만 오가며 눈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마주 인사하던 도겸이 가볍게 되물었을 땐,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도겸은 즉시 청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왜 그러느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냐?”

“짙어졌어.”

“짙어지다니.”

“죽은 사람들에게서 나던 양귀비 냄새 말이야.”

도겸의 걸음이 멈추었다. 나란히 걷던 청도 두어 걸음 걷다 멈추고 돌아섰다.

“처음에 장터에 나왔을 때보다 많이 느껴지는데. 너는 안 그래?”

도겸은 신중하게 제가 느낄 수 있는 오감에 집중했다. 그러곤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르겠구나.”

아무리 기찰하여 한양으로 드나드는 이들을 검문하고 금령을 내려 시시때때로 수색한들 약이 퍼져 나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언제 전염병이 창궐할지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에 닥친 상황은 더 악랄하기만 했다. 도겸은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고, 그런 그에게 청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여기다.”

그리고 피맛길 끄트머리에 다다를 즈음, 목적지를 찾은 도겸이 멈춰 섰다.

“각신 나리 오셨어요?”

주막에 들어서자마자 뛰어나온 주모가 두 남녀를 맞이했다.

“요즘 통 안 오시더니!”

“일이 많았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서 이리로 앉으셔요!”

유난히 도겸을 반기는 통에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도 한 번씩 힐끔댈 정도였다.

“국밥 한 그릇 하러 왔네. 국밥 둘에 탁주 한 잔 주게. 아, 방으로 들어가도 되겠는가?”

“그럼요. 근데 술은 잘 안 하시는 분이 어쩐 일이셔요? 대낮부터 술을 다 찾으시고.”

“내 누이가 이 집 술맛이 궁금하다 하여.”

그제야 주모가 청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눈을 키웠다.

“이분이 그, 소문 자자하신 아씨이시군요!”

그 시선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지 청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겸이 대신 웃으며 호응해 줄 뿐이었다.

“귀한 손이다만 최대한 바람이 잘 드는 시원한 방으로 주게. 함께 걷다가 와서 조금 몸이 더워서 말이지.”

“그럼 이 방으로 드셔요. 금방 상 차려다 드릴 터이니.”

도겸은 청을 먼저 방에 들이고 따라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자그마한 곁방은 봉놋방과 달리 외풍이 들어 서늘했지만 그게 바로 도겸이 원하는 것이기에 만족스러웠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에 청이 괴로울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이 정도면 답답하진 않겠지?”

“뭐….”

다소 허름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방을 둘러본 청이 도겸이 깔아 주는 방석 위에 앉았다. 물색 치맛자락이 청의 주변에 물처럼 둥글게 고였다.

배운 대로 가볍게 옷이 너무 퍼지지 않게 정리한 그녀가 맞은편에 앉는 도겸에게 대뜸 물었다.

“근데 이 땅에 사는 여자들은 전부 너를 아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도 질문인데 내용 또한 잘못 들으면 도겸이 여색이나 밝히고 다니는 사내가 될 판이었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여기 오는 도중에 마주친 여자들이 전부 너를 알아봤잖아.”

“아, 그것은….”

“그동안 순이랑 장터에 나가면 나더러 서촌 각신 나리댁 아씨가 아니냐면서 값을 받지도 않고 뭔가를 더 주거나 잘 지내시느냐며 안부를 전해 달라고도 하던데.”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청은 도겸을 알아본 여자들을 줄줄이 대며 따져 물었다.

“그리고 세책점에서 만난 송유화도.”

“송 낭자야 직제학 영감의 여식인데다 나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도겸은 설마 청이 그리 생각하진 않겠지만 서둘러 오해를 불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은 무어… 그, 내가 네게 글을 가르치듯 우리 집에 오가며 물을 길어 가며 인사를 주고받다 연이 닿은 것이다. 간혹 송사에 휘말리는 이들이 있으면 도움을 주기도 하고, 글을 읽지 못하여 곤란한 이들이 문기를 가져오면 읽어 주기도 하며 말이지.”

“그래?”

다행히 오해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청이 이해됐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너를 보면 심장 소리가 커지던데, 그건 왜 그런 거지?”

그러나 중얼거리는 말은 도겸을 적잖이 당혹스럽게 했다.

“그저… 반가워 그런 것이겠지.”

“나리,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마침 주모가 인기척을 내더니 큰 상을 들고 들어와 도겸과 청의 앞에 놓아주었다.

“…아니, 나는 그저 국밥 두 그릇에 탁주 한 잔이면 되는데.”

어쩐지 상이 크다 싶더니, 상 위엔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어찌 나리께 그냥 국밥만 드립니까. 나리 덕분에 제가 무사히 시집살이를 벗어났는데요.”

“그래도 이리 주면 장사는 어찌하려고 그러나.”

“몇 번 오시지도 않으시는데 뭐 얼마나 축나겠습니까?”

주모는 도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생글거렸다. 깜짝 놀란 도겸은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손길을 떼어 냈다.

“고맙게 잘 먹겠네.”

“쇤네는 이만 나가 볼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시어요! 그리고 나리, 그….”

“응?”

덥석 무방비한 도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 주모가 수줍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힌 방 안엔 당황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진 도겸과 느릿하게 한쪽 눈썹을 들었다 놓는 청이 만들어 낸 정적만 남았다. 다만 둘의 사이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는 국밥만 부지런했다.

“꼭두새벽마다 서낭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문제가 있다면 짓궂게 장난질을 친 주모가 속삭인 말을 청이 대단한 청력으로 모두 잡아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청이가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건 아닐까.

뜬금없이 부채를 꺼낸 도겸이 마구 부채질을 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청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 일단 들거라.”

먼저 술을 권하는 날도 오다니. 한 잔을 부탁했건만 주모가 상에 아예 작은 술동이를 올려놓은 탓에 도겸은 직접 사발에 술을 퍼다가 청에게 건네기까지 했다.

“근데 너 왜 아까부터….”

의아해하던 청은 확 퍼지는 곡주의 향에 홀린 듯이 하던 말도 잊고 술에 집중했다.

“이건 왜 이렇게 탁해?”

딱 봐도 투명하지 않은지라 탐탁지 않은 게 분명했다. 도겸은 슬쩍 부채를 도로 집어넣으며 당황하지 않은 척 차분히 설명했다.

“그래서 탁주라고 부르는데 네가 즐겨 마시던 소주와는 다른 것이지. 소주는 흔히 마시긴 어려운 귀한 술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주를 더 자주 마시기도 한다.”

도겸이 권하는 대로 일단 한 모금을 마셔 본 청이 다시 조금 그리고 다시 조심스레 들이켰다. 다른 것은 맛이 어떻든 정성을 따지더니 술은 유난히 맛을 따지는 게, 마시는 것이라면 뭐든 깐깐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뭐, 먹을 만하네.”

이윽고 청이 완전히 탁주에 빠져들었고, 도겸은 비로소 청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은 것을 슬쩍 숨길 수 있게 되었다.

“입에 맞느냐?”

“깨끗한 게 더 좋긴 하지만….”

“다행이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왜 이리 쉽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인지, 도겸은 알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

벌써 몇 번째 의원이 집을 다녀갔는지 모른다.

“이미 썩어 들어간 손발은 어찌… 고칠 수가 없습니다요.”

절단을 해야 한다는 의원도 있었고, 썩은 부위가 절로 떨어질 것이라 말하는 의원도 있었으며, 절단을 하거나 절로 떨어진들 병세가 깊어 회생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 말하는 의원도 있었다.

“수고했네. 자네는 서둘러 다녀오게.”

“예.”

마찬가지로 비슷한 내용의 처방이 담긴 화제를 받았지만 도겸은 행랑아범을 구리개로 보내어 약을 지어 오게 했다. 사소하게 달라진 약재가 어떤 효능을 발휘할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나리.”

막 의원과 행랑아범을 보내고 돌아서는데 점희가 조심스레 도겸을 불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제… 의원은 더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를 위해 범죄에 가담하기까지 한 사람이 할 말인가. 도겸은 낯빛을 굳히며 되물었다.

“어찌하여?”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화제는 조금씩 다르지. 같은 약재라 해도 다른 약재와 만났을 때 상성이 다르니 어떤 조합의 약이 차도를 보일지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어머니의 병세는 화타가 와도 못 고칠 만큼 깊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가 남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는 일에 가담해가면서까지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였나?”

“그땐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점희가 소리치자 앞마당을 쓸던 순이가 흠칫 놀라며 빗자루를 끌어안고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순이는 그쯤하고 들어가거라. 오늘 치 글공부는 다 하였느냐?”

“아, 그것은… 너무 재밌어서 아껴 뒀구먼유!”

한창 밖에서 뛰어노는 게 좋을 나이에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려 하면 그것 또한 문제긴 했다.

물론 도겸은 그런 독특한 문제아였기에 순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배려할 줄은 알았다.

“맛있는 간식과 배움의 기회는 미루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되면 날이 더워 글공부를 하기 어려워질 터이니 지금 할 수 있는 공부를 해 두는 것이 좋아.”

청이 <천자문>과 <동몽선습>, <격몽요결>을 단 며칠 만에 익히는 동안 순이는 아직도 <천자문>의 초입에 머물러 있었다.

도저히 하기 싫다면 자유로이 자라나도록 내버려 둘 참이긴 했지만 아직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직접 정하기에 순이는 너무 어렸다.

물론 그것이 교육을 강요할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닌지라, 도겸은 적당히 길잡이가 되는 쪽을 택했다.

“꽃이 만개할 때쯤엔 책거리로 꽃구경을 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어릴 적,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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