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라도 관아에 고하였어야지.”
“…….”
“누군가 너를 겁박하였느냐? 그렇다 하여도 너는 관아에 고하고 또 보호를 청하였어야 했다. 단순히 어미를 구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너는 감히 국부와 국본을 능멸하는 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모두를 구할 수 있었는데…!”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도겸이 벌떡 일어났다.
“그 일을 준 이가 발설할 생각은 말라 하였습니다. 거절한 다른 필사인 중엔 실종된 자도 있단 말입니다!”
“일을 준 이는, 누군지 기억하느냐?”
“그 이에 대해서는 진정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점희도 질세라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호를 받아도 제 어머니의 약값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 숨어 산들 이 땅에서 갑자기 여자 된 몸으로 그런 돈을 어디서 번답니까? 늘 아버지에게 매 맞던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치며 이미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를 두 손 놓고 돌아가시게까지 하며 또다시 불효를 저지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그쯤 하여라.”
드디어 입을 연 언이 중재에 나섰다.
“어찌 됐든 저 여인도 피해자인 것은 마찬가지지 않느냐.”
다소 서글퍼 보이는 언이 상황을 정리했다.
“유서가 날조된 사실을 증명할 증인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잡으면 된다. 점희라 하였느냐?”
“…예.”
“네게 그런 일을 하라 협박 아닌 협박을 한 이에 대해 무엇이라도 증언해 줄 수 있겠느냐? 아니면 그자가 남긴… 뭔가 작은 물건이라도 있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텐데.”
마지막 말을 할 때 세자는 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점희는 고개를 저었다. 보다 못한 도겸이 다시 차분하게 설득했다.
“여긴 병자에게도 좋은 환경은 결코 되지 않으니 적어도 범인을 잡을 때까진 너와 네 어미가 안전하게끔 보호할 수 있다. 의원에게 진료도 받을 수 있게 해 주마.”
채찍보단 당근이 나은 법이지 않나. 도겸이 약속하고 나서야 점희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젊은 사내였습니다. 한데 검은 복면에 온통 검은 옷, 거기다 삿갓을 써서 이목구비는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지.”
그때까지 횃불이 밝히는 범위 밖에 조용히 서 있던 청이 빛의 경계 안으로 젖어들 듯 소리 없이 걸어 들어왔다. 청의 존재도 미처 몰랐다는 듯 점희가 화들짝 놀라며 약간 뒤로 물러났다.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를 듣고 판별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범인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감옥에 있어서는 범인과 마주치지 어렵지 않겠나. 도겸이 가만 생각하던 때, 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으로 데리고 가자.”
“뭐?”
무심코 반박한 도겸은 곧 그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언은 단박에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죄인을 함부로 사가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감옥도 위험합니다. 우리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조선 팔도에 그자의 손이 안 닿는 곳은 단 한 곳이지 않습니까.”
도겸이 말하는 곳이 어딘지 바로 알지 못한 언이 의아해했다.
“그곳이 어딘가?”
그리고 도겸의 시선은 다시 홀로 하얗게 빛나는 여인을 향해 있었다.
“청이의 곁입니다.”
***
타악! 아침 공기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산중에 한차례 목도가 부딪치는 소음이 일었다.
“어찌 점희를 집으로 데려갈 생각을 다 했느냐?”
도겸의 움직임을 읽은 청은 여유로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분명 같은 목도를 내리쳤지만 어쩐지 도겸은 나무가 아니라 쇳덩이를 내려치는 기분을 느꼈다.
반발력에 뒤로 밀리는 걸 간신히 버텨 냈다. 자칫하다간 최소 중상, 운이 나쁘면 어이없게 죽을 수도 있어 그의 등엔 진땀이 흘렀지만 청은 숨 한 번을 급하게 쉬지 않고 여유롭기만 했다.
“간밤에 세자를 만났을 때….”
횡으로 도겸의 검을 걷어 낸 청이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반격을 행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어.”
도저히 사람의 눈으로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닌지라 도겸은 순수 감으로만 간신히 받아 냈다.
“죽음의 냄새라니. 저하께서는….”
“역겨워서 같이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재차 이어지는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연달아 목도가 부딪쳤다. 사실 검을 가르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청은 검을 다루는 법을 알려 주자마자 파죽지세였다.
이쯤 되면 검술을 알려 준다기보다 도겸의 수련 강도가 더 높아진 게 맞았다.
“잠시만 멈추어라!”
“일단 발검하면 상대를 쓰러트릴 때까지 밀어붙이라 할 땐 언제고?”
청의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빨리 읽고 다음 동작까지 예상한다. 그 힘은 한 번씩 받아 낼 때마다 팔과 어깨가 저릴 만큼 드셌다.
도겸은 제 발이 뒤로 물러나기가 바쁘게 거침없이 거리를 좁히며 목도를 휘두르는 청을 막아 낼 방법을 짜내야 했다.
“…조금 비겁한 방법이긴 하다만.”
인간을 뛰어넘는 체력을 십분 활용하는 청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도겸은 단순히 물러나던 발만 바꾸어 관성대로 움직이고 있는 청의 발길이 꼬이게 만들었다.
그러다 발등이 밟힌 순간, 무심코 발밑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에 아래를 보는 여인의 목도를 쳐 내어 떨어트렸다.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듯, 도겸은 발등을 내어 주고 승리를 얻어 냈다.
“…이 땅에서는 이게 ‘조금’ 비겁한 거야?”
“눈에 흙을 뿌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분해하는 청에게 싸움엔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까지 몸소 가르친 도겸이 재차 요구했다.
“어째서 저하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느낀 것인지 말해다오.”
도겸을 완전히 청이 입술을 비죽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말 그대로야. 죽은 사람들, 아니 시체들과 함께 있었겠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더 짙었을 테고.”
당혹스러웠지만 언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보통 홀로 위험을 감수하려 할 때 더 말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마음이 쓰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겸이 답을 냈다.
“…지난번에 네가 잡아 주었다던 사람들이겠구나.”
“내가 잡아 준 사람들?”
“네가 저하께서 위험에 처하신 줄 알고 잡아 주었다던 그놈들 말이다. 저하께서 여러 사람의 죽음을 숨기실 일이라면 그것뿐이지 않느냐.”
그럼 놈들을 이용해 약을 더 구하려는 척 함정을 놓아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걸려들게 하려던 계획마저 무산되고 만다. 그쪽에서 무참히 꼬리를 자르는 바람에 이쪽에선 역으로 이용할 말을 잃은 셈이다.
“점희라는 아이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거든.”
도겸이 실패한 계획의 다음 절차를 생각할 즈음 청이 점희를 데려가자 먼저 권한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만 지키면 다른 건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였어. 어머니를 때렸다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왔다면서 악의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살인에 가담한 죄는 사라지지 않겠지.”
“용은 내가 죽거나 상대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야. 당했는데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순이 이후로 처음이었어.”
아마 보복할 수 없기에 애초에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고 체념한 게 아닐까. 아마도 청은 순수하게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 본 적 없는 존재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가 곁에 두겠다 말한 사람은 순이 이후로 처음이라 놀랍더구나.”
“네가 처음이었는데.”
청이 떨어트린 목도를 줍던 도겸의 손이 멈칫했다.
“…뭐?”
“내가 곁에 두겠다 말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다고.”
그야 각자의 목표를 위해서는 서로만 독점하여 소통하자 했으니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어쩐지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긴 하지.”
아무래도 청에게는 검술 수업이 무의미해 보이는데 그 어떤 수업보다 흥미를 보이는 터라 곤란했다. 가르친 그대로를 흡수하기에 자칫 제 잘못된 버릇까지 익힐까 걱정도 되었다.
글공부를 하며 필체마저 도겸을 따라오고 있지 않나.
“오늘은 이만 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
혹여 부모가 되면 이런 마음일까. 도겸은 제가 걸어온 자취를 그대로 따라오는 청을 보며 자꾸만 두근대며 긴장하는 마음의 인과를 생각해 보았지만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한 초월적인 존재의 위압감에, 거기다 몇 번이나 그 손에 죽을 뻔했기에 절로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벌써라니.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하늘을 올려다본 청이 다소 힘없이 돌아섰다. 요즘 들어 왠지 흥미를 갖는 일을 제외하면 퍽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기분 탓일까.
도겸은 그 등을 바라보며 갓끈을 매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늘은 먼저 돌아가거라. 나는 천천히 갈 테니.”
“왜? 빨리 갈 수 있잖아.”
빨리 갈 수야 있다지만 아낀 시간만큼 울렁이는 속을 달래야 하니 잃는 것이 더 컸다. 도겸은 느긋하게 걸어가는 편을 택했다.
“아침 먹기엔 늦은 시각이니 괜히 가솔들이 움직이지 않게 주막에 들러 끼니나 때우고 들어가려 하는데, 너는 밥은 잘 먹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 당연히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노라 말할 줄 알았다.
“그럼 나도 너랑 같이 갈래.”
하지만 청은 두 눈을 반짝이며 도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어찌하여?”
“궁금하니까.”
“무엇이?”
“주막에도 술을 판다며.”
“뭐?”
애주가도 이런 애주가가 없다. 남산댁이 만들어 내는 소량의 술로는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청은 아무리 실망하더라도 한양 안에서 마셔 볼 수 있는 술은 모조리 마셔 보고 있었다.
모름지기 세자빈이 되기 위한 자질로는 꽝이라 볼 수 있었다. 도겸은 난처하고 당혹스럽다 못해 기가 찼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결국 함께 산을 내려와 피맛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