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하늘을 보며 아슬아슬하게 걷던 언이 중얼거렸다.
“해결된 건 하나도 없고 갈수록 오리무중이라 하여도 말이지.”
도겸은 묵묵히 세자의 앞에 돌부리가 없나 조족등으로 비추어 보았다. 그 틈에 갑자기 자세를 꼿꼿하게 세운 언이 이제 알겠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간택을 지체시키기만 하고, 가짜 심청을 세자빈 자리에 제대로 앉히지 않겠다 한 것이었나?”
“…예.”
“거참, 자넨 무어 그리 욕심이 없는 것인가? 심청이라는 여인이 가짜라 하여도 비범한 존재이니 자네에겐 큰 기회 아닌가. 기회를 잡으면 권세를 좀 누려 볼 야망도 키우고 그래야지.”
도겸은 여전히 세자의 앞길을 살필 뿐이었다.
“저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그래.”
조족등이 밝히는 길을 여유롭게 걷는 언은 미처 도겸이 혹여 자신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걱정하며 비추어 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도리어 도겸을 보며 마음을 쓸 뿐이었다.
“자네는 원하는 길을 가게.”
“…….”
정작 이 말을 권하는 본인은 원하는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슬픈 뜻이 담긴 기원이었다. 앞길을 비춰 주고 있던 도겸은 잠시 스스로는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맞나 고민이 되었다.
잠시 뒤 도겸이 내린 결론은 그저 묵묵히 조족등을 고쳐 쥐는 것이었다. 달빛이 내려앉은들 높은 나무에 가려 오싹한 분위기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한데, 그대는 바른길로 가고 있는 것인가?”
슬슬 상황이 궁금한 언이 묵직한 어둠을 뚫고 나가는 청에게 말을 걸었다. 청은 무려 세자가 물어보는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냄새가 점점 진해져. 다 온 것 같은데.”
청은 유서에서 얻은 모든 흔적을 기억해 둔 뒤 세책점에서 만져 본 책에 남은 흔적들과 하나씩 대조하여 겹치는 것을 찾았다고 했다.
수사 과정에서 유서를 만진 이들은 보통 부녀자들이 즐겨 찾는 세책점을 이용하지 않는 사내들이기에 얻은 흔적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청은 말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인 도겸의 상식선에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는 청의 말부터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다 왔다면서 어찌하여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냐?”
“흔적이 이쪽으로 이어지는 걸 어떡해?”
세자에게 이리 되바라진 대꾸를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도겸이 제재하려 하자 언이 전과 같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내 앞에서는 저 여인의 품행을 바로잡을 필요 없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을 때 숨통이 트이듯 저 여인도 편한 구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같은 이유로 청에게 곁을 허락했던 도겸이기에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저 여인이 불경하게 구는 건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는단 말이지. 뒤늦게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말이야. 꼭 홀린 듯 잔잔한 대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두 남자가 물끄러미 청을 바라보던 차,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여기야.”
청이 가리킨 곳은 마을에서도 약간 떨어진, 산 중턱의 한 허름한 초가 앞이었다. 걸음을 빨리하여 뛰어간 도겸과 언은 다음 순간 눈에 띄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도주를 한 듯한데.”
방이 두 개는 되나 싶은 작은 초가는 안타깝게도 거의 폐가에 가까워져 있었다.
누군가 한바탕 난장판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남아 있던 낡은 살림들조차 흙바닥을 나뒹굴다 발끝에 채고 있었다.
도겸은 언을 두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텅 비어 있을 게 뻔한 내부를 살폈다.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안은 싸늘하기만 했다.
“없습니다.”
도겸과 언이 간절히 사람의 흔적을 찾는 와중에도 청은 그저 처음 집을 발견한 채로 가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놓친 듯싶습니다.”
“사실 찾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만….”
“안 놓쳤어.”
아무런 흔적이 없음에도 청의 주장은 일관됐다. 집의 안팎을 전부 뒤져 본 도겸이 청에게 따져 물었다.
“놓치지 않았다지만 집에 아무도 없지 않느냐?”
“…그들은 지금.”
청은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그저 아까부터 서 있던 곳의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다니까.”
순간 도겸과 언은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사색이 된 사내들이 반사적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평소 유난히 귀신을 두려워하는 언이 도겸에게 매달릴 듯이 들러붙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나마 침착한 도겸이 조족등으로 되도록 넓게 비추며 물었다.
“우리가 찾는 이가 땅속에 있다는 것이냐?”
“그래.”
“한데 ‘그들’이라니?”
“내가 찾은 냄새는 둘이었어. 흙냄새가 섞인 산 자의 체취. 그리고 죽어 가는 자가 썩는 냄새.”
청은 주저하지 않았다. 기겁한 언이 비명을 지르며 도겸을 끌어안았다.
“익위사. 익, 익위사…!”
“저하!”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익위사들이 곧장 언을 둘러싸며 검을 뽑아 들고 사주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죽은 것이냐?”
언을 익위사들에게 맡기고 청에게 다가간 도겸은 여인이 가리킨 곳을 빛으로 비추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잔뜩 덮인 땅인지라 발로 대충 치워 보니 과연 진흙에 절은 멍석이 드러났다.
“살아 있어. 아직은.”
“아직은?”
살아 있다니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크게 다치기라도 했을까 걱정이 된 도겸은 즉시 맨손으로 멍석을 들어 젖혔다.
아래는 웬 널빤지가 깔려 있어 그것까지 걷어 내자 제법 깊은 구덩이가 드러났다. 시커먼 어둠 속을 향해 조족등을 드리우자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
“…….”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상황을 본 도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곁에 선 청은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이 없었다.
“어, 어떻기에 말이 없는 것인가?”
“…저하께서도 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도겸이 위험하지 않다 확인해 주자 익위사들이 언에게 길을 터 주었고, 조심스레 다가온 세자가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이냐.”
언은 흙투성이가 되어 겁을 먹은 채 위를 올려다보는 여인을 향해 몸을 낮추었다.
“괜찮은 것이냐?”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누군가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이 조심스레 반문했다.
“어찌 오신 것입니까? 혹 저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본인이 동조하여 저지른 일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우선 이들을 위로 올려야 제대로 된 대화가 되겠군.”
언은 익위사들을 동원하여 구덩이 안에 숨어 있던 여인과 여인이 끌어안고 있던 병자까지 끌어 올렸다. 퀴퀴한 냄새가 퍼져 익위사들 가운데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 이도 있었다.
조족등 하나로는 부족하기에 도겸은 다른 익위사들과 횃불에 불을 밝혔다. 비로소 질척한 어둠이 빛에 녹아내렸다.
“네가 한양 세책점에 세책을 필사하던 필사인 점희가 맞느냐?”
그리고 본격적인 사실 관계 파악을 위한 문초가 시작되었다.
“…예.”
“저이는 네 모친이고?”
멍석 위에 무릎을 꿇은 여인은 도통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드디어 조작된 유서를 쓴 사람을 찾아내어 조금은 흥분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도겸이 점희를 따라 몸을 낮추었다.
“예, 제 어머니입니다.”
“병세가 깊은 것 같은데.”
“소갈(당뇨병)입니다.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질 않더니 결국 손발이 썩기 시작해 이제는 눈이 멀고 거동하지 못합니다.”
도망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자 혼자선 병자를 데리고 움직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있던 것이냐?”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숨어 있던 것이지?”
그제야 고개를 든 여인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으며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하여라.”
와중에 도겸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 청이 답을 찾았지만 과정을 증명할 수 없기에 함정을 놓고 덫에 제대로 걸려들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제 도겸의 몫이었다.
“왜 병자인 어머니를 집이 아닌 저런 척박한 곳에 두고 있었는지 묻질 않느냐.”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하니… 그 화가 제게도 미칠까 하였습니다.”
“너도 간택 단자를 올릴 수 있는 신분이더냐?”
“그, 그것은 아니지만….”
“죽은 처자들은 전부 양반가의 여식이었다. 네가 간택 단자를 올리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면 이리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넌 세자 저하께 그리 말했지.”
“예? 저, 저하라니!”
“저분이 바로 세자 저하시다. 예를 갖추어라.”
언이 세자임을 알아차린 점희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간신히 긴장을 놓았던 이가 다시금 벌벌 떨어 댔다. 병자 못지않게 앙상하게 마른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하나 먼저 사실을 고한다면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네 사정을 참작해 달라 내가 대신 청할 수도 있지.”
점희는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칼을 찬 익위사들의 위엄이 넘실대는 불길 아래 무섭게 그늘져 위협하는 듯했다.
“저는 그저… 어머니의 약값이 필요했습니다. 필사하는 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됐지요.”
간신히 고개를 든 점희가 눈물을 쏟으며 읍소했다.
“남의 필체를 따라 하여 유서를 쓰라는 일을 듣자마자 알았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하는… 그릇된 일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를 건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돈을 받지 않으면 저는 당장 그날 밤에 어머니를 차가운 땅속에 묻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소인은… 소인은 어찌해야 했던 것입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이었을 점희의 하소연에 둘러선 이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와중에 도겸은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매섭게 답을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