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가는 사람들에 치이다 점점 구석으로 몰린 둘은 어느새 그다지 인기가 없는 책들이 모인 서가 한쪽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도겸은 벽처럼 청의 곁을 지키고 앉아 그녀가 사람들과 스치지 않게 해 주었다.
“…난 그런 모습도 궁금한데.”
여전히 책에 눈을 꽂아 둔 채로 청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겸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렇고 책 읽는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인간 세상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쩍 호기심이 많아졌구나.”
그러자 청이 드디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그래.”
여러 책을 끌어안고 곁을 꿋꿋하게 지키던 도겸은 여전히 청이 대견한 듯 웃는 낯이었다.
“심청으로 살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웃는 얼굴로 놀리는지라 청은 도겸이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같은 말이라 해도 상대의 표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음에 많이 헛갈리는 듯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진지하게 묻는 거야, 놀리는 거야?”
도겸은 정직하게 대답하려다, 약간의 심술을 담아 대꾸했다.
“반반이다.”
조선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함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번과 같은 폭주가 또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진지한 거면 진지한 거고 놀리는 거면 놀리는 거지, 반반이 어디 있어?”
“여기 있지.”
“…….”
바야흐로 청이 인간 세상의 모호함과 직면한 순간이었다. 도겸을 빤히 노려보던 청이 폭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더니, 진짜 귀찮아. 난 애매한 게 싫다고.”
쭉 혼자 지내 왔으니 당연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도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약한 물고기 떼에 불과하다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안에도 나름의 서열이 있고 잡연한 관계와 삼라한 상황들이 있는 게지. 당연한 것이다. 어떤 집단이든 마찬가지고.”
도겸의 차분한 말을 들으며 청은 여기저기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세책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깜빡이는 눈망울은 마치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저거.”
그러다 별안간 청이 벌떡 일어났다. 얼결에 따라 일어나던 도겸의 품에서 책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왜 그러느냐?”
도겸이 의아해하는 통에 청은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다른 이가 들고 서 있던 책을 덥석 빼앗았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지만 청은 그 책을 펼쳐 보고 냄새를 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도겸이 심심찮은 사과를 건네야 했다.
“미안하오. 그, 내 누이가 꼭 찾던 책인 듯하여… 혹 양보해 줄 수 있겠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버럭 화를 내며 따지려 돌아선 여인이 정작 도겸을 보고는 얼이 빠진 얼굴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리의 누이시라면 소녀가 양보해 드려야지요. 마, 마음껏 보시어요!”
“고맙소.”
도겸의 미소에 양갓집 처녀로 보이는 여인이 뺨을 붉혔다.
“나리께서는, 규장각의 각신 나리시지요?”
청이 무얼 찾은 것인지 궁금해 정신이 팔려 있는 와중에 양보해 주었다고 생각한 여인이 자리를 뜨지 않고 도겸에게 다시 말을 걸어 왔다.
“…맞소만, 어찌 아는 것이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희 아버지가 바로 규장각의 직제학 영감이신 송 현자 익자 되시는걸요.”
“아…!”
한양이 좀 좁은 곳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한양에서는 스치지 않아도 인연일 수 있었다. 도겸은 상사의 여식에게 제대로 인사를 건네기 전, 먼저 힐끔 눈을 돌려 책에 집중한 청을 살폈다. 이쪽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혹시 저희 아버지께 말씀을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으나 소녀는 저희 집안의 셋째, 송가 유화라 합니다.”
“직제학 영감께 이야기 많이 들었소. 나는 규장각 직각 최가 도겸이오.”
“어찌 모르겠습니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궐에 갔다가 먼발치서 몇 번이나 뵈었는걸요.”
도겸으로서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저는 전혀 알지 못하는데 상대가 이렇게까지 잘 안다고 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랬소? 인사 한 번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하니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와 차 한 잔 어떠십니까?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아, 한데 동행이 있어 말이오.”
“당연히 함께 계신 누이분께서도 함께하셔야지요.”
도겸이 다시금 청을 살피자 송유화가 눈치 빠르게 옷고름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별일 없으시다면, 잠시 시간 내어 주시겠습니까?”
다른 규수라면 몰라도 하필 상사의 여식인지라 도겸이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던 때, 청이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억울한 피해자가 더 생기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찌 사사로이 차를 마실 시간이 있겠습니까?”
청은 무심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송유화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송 낭자에겐 미안하지만 당장 오라버니와 저는 긴히 수행하던 일이 있어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예? 아… 하면 어쩔 수 없지요.”
꽃처럼 붉어졌던 송유화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그럼 다음에 뵈어요, 나리.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망치듯 세책점을 빠져나가는 송유화를 바라보기보다 도겸은 직전의 청의 언행에 더 놀란 채였다. 그러느라 미처 송유화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고 말았다.
“…아니, 청아.”
“왜?”
송유화를 쫓아낸 청은 다시금 태연하게 책장을 넘기며 이곳저곳을 냄새 맡느라 바빴다. 도겸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어 보였다.
아무리 영리한들 그간 부단히도 조선의 법도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겠구나,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는 네 집중을 방해할 소리도, 냄새도 지나치게 많으니 흔적이 느껴지는 책을 가져가 조용한 곳에서 다시 살피는 게 어떠냐?”
“그럴 필요 없어. 이거니까.”
청이 송유화에게서 빼앗은 책을 도겸에게 안겨 주었다. 청을 믿어 의심치 않는 도겸은 더 묻지 않고 황급히 세책을 펼쳐 필사인의 서명부터 찾았다.
“…점희.”
점희라는 이름을 가진 필사인이었다. 이제 이 사람의 소재지를 찾아야 했다.
“청아.”
“왜?”
“이제 네가 할 일은….”
그 전에 도겸은 이 대단한 일을 해낸 청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읽고 싶은 세책을 전부 고르는 것이다.”
***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진귀한 광경임이 분명하다.”
캄캄한 밤이 된 뒤 함께 필사인을 찾기 위해 합류한 언은 두어 걸음 앞서 걷는 청을 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도겸은 세자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나타난 데엔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무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청을 구경하고픈 욕구가 더 크리라 생각했다.
“안 그런가? 나온 증거라고는 추측뿐인데 어찌 이리 정확한 길을 찾아간단 말이냐.”
도겸을 툭 치며 묻는 통에 그가 들고 있던 조족등이 흔들렸다. 언보다는 확실히 청을 겪은지라 도겸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래서 제가 욕심내어 저 여인을 이 일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도겸과 언은 어렵사리, 그러니까 중앙 세책점을 비롯한 한양의 세책점마다 얼마간의 돈을 찔러 넣어 주고 정보를 얻는 식으로 점희라는 필사인이 혜화문 밖 어느 촌계에 산다는 것까지 알아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부근에 도착해서는 청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날 내가 규장각에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면 함께 발견했겠군.”
“그랬겠지요.”
그랬다면 적어도 허공을 가르고 날아드는 새하얀 창의 공격을 받을 때의 당혹감을 홀로 느끼진 않았겠다. 도겸은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저 여인이 심청이 될 수 있었을까?”
치하하듯 묻는 언의 말에 도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제가 아니었어도 청이가 원했다면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겸손은.”
“참입니다.”
언이 웃었지만 도겸은 진지했다. 청이 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꾸며 내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제 설득에 응한 정도였다면 이리 빨리 주변의 것들을 익히진 못했을 겁니다.”
“적응력만 따져도 경이롭지. 며칠 사이에 대화하며 느끼던 위화감이 눈에 띄게 줄어 있던데.”
세자도 마냥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느끼고 있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건 저도 느끼는 중입니다. 저야 글이나 몇 자 가르칠 뿐, 직접적인 훈육은 남산댁이 하고 있는데 늘 감탄하더군요.”
“마침 세자빈 훈육 상궁이던 신 상궁이 자네 집에 가 있었다니, 운명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혜빈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며 스스로 목을 매려 했던 신 상궁이었는데… 자네 집으로 보내길 정말 잘했어.”
두 손을 모아 뒷목을 받치며 높은 하늘을 올려다본 언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남산댁을 도겸에게 맡겨 놓고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이다.
“신 상궁은 어딜 가나 환영받을 만큼 유능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제겐 행운이었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군.”
도겸은 나무 위를 타고 가고 싶은 걸 꾹 참고 꾸역꾸역 걷는 청의 뒤통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지금 청이를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신 상궁의 술이기도 하고요. 그때 저하께서 남산댁을 구하신 건 참으로 잘하신 일입니다. 당연히 구해야 하는 것을 떠나 신 상궁만 생각해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게 따지면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네. 신 상궁이 생각시 시절을 사온서에서 보내어 양조 기술을 그만큼이나 익혀 둔 덕에 이렇게 농익은 술을 궐 밖에서도 마실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 덕분에 청은 처음부터 과하게 수준 높은 술을 마신 뒤로 조잡한 술은 냄새만 맡고도 콧방귀를 뀌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천덕이라는 놈을 따라갔다 얻어 마신 술에 양귀비가 섞여 있던 탓에 두려움이 생긴 건가 했더니, 그저 경험의 횟수가 늘다 보니 맛을 가릴 줄 알게 된 것이었다.
“무어,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