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세자 저하를 사위 삼기 위해 귀한 딸을 내놓으려는 이 사람도 면이 설 테니 말이지요.”
서로 웃으며 으르렁거리는 꼴이었다. 이를 악문 언의 턱 근육이 씰룩였다. 와중에는 조익환은 점잖게 언을 헐뜯기 바빴다.
“외람되오나 신이 충심으로 기도를 올려 비까지 내리며 백성들을 달래는 동안, 여기저기서 말이 나온다 들었습니다. 세자의 덕이 부족하니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도 더딘 것 같다며.”
“좌상!”
“충신의 간언이니 저하께선 새겨들으십시오!”
간언이라는 허울로 좌상은 세자에게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신의 충심이 곡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저하께옵서 지금보다 더 유능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신이라는 말을 글자로 적는다면 과연 신하일까, 말 그대로의 하늘의 신일까. 언은 조익환의 공격 아닌 공격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럼에도 억지로 웃었다.
송곳니를 드러내야 할 때가, 결코 지금 이 순간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새겨 듣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의 간언 덕분에 아주 기운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갓의 가장자리를 칼날 다루듯 손끝으로 쓸어 낸 언이 가만히 조익환을 바라봤다. 언의 얼굴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으니 찰나의 시간도 길 위에 내버릴 순 없어 말입니다.”
그길로 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입가에 띠고 있던 온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
도겸과 청은 나란히 선 채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세책점 앞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장옷을 쓴 채로 눈만 내보이고 있던 청이 도겸을 불렀다. 도겸은 조금, 아니 굉장히 멋쩍은 얼굴로 곁을 내려다보았다.
“불렀느냐?”
“이게 맞습니까?”
“저하께서 가져오신 책들은 모두 망자의 것이 아니었느냐. 적어도 이 집에 유서와 같은 필사인이 일하는지는 알아봐야 한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오라버니.”
홱 돌아선 청이 눈만 들어 도겸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무시무시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저 잘 배워서 궐에 있는 웃전들을 만족시키면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주변의 이목을 신경 써 말투는 정제되어 있으나 어쩐지 이를 악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도겸은 무안하고 미안한 나머지 작게 헛기침하며 누이를 달래어 보았다.
“너에게 뭔가를 해내라는 게 아니다. 이미 너는 큰 것을 알아내 주었지 않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큰 관련이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그, 집에 있기만 하면 답답하니 이렇게 나오는 게…”
“더러운 냄새도 너무 많고, 소리도 많고, 부정한 기운도 많아서 나까지 다 탁해지는 기분이라고. 차라리 집에서 샘 위에 물결이 몇 개나 되는지 세는 게 훨씬 좋아.”
아무렴 맨입으로 부탁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청의 마음에 드는 장신구며 옷도 집에 잔뜩 쌓아둔 마당에 뭔가를 더 권하여 봤자 큰 효과를 볼 수 없을 터였다. 도겸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꺼내었다.
“흠, 광에 술이 몇 동이나 남았….”
“빨리 끝내고 가지요, 오라버니.”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청이 당차게 세책점 안으로 들어섰다. 도겸은 서둘러 작은 여인을 따라 사람들의 틈으로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간신히 문턱을 넘었다.
그만큼 주간의 세책점은 재미난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가락지며 비녀를 담보로 걸 의지도 불사한 여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책을 훔쳐 가는 이가 있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던 세책점 주인이 활짝 웃으며 새로운 손님을 응대했다.
“어떤 이야기를 찾으십니까? 도성의 화제, 기와집을 살 수 있는 가채를 가져온들 없어서 못 빌릴 만큼 인기가 좋은 세책들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책점 안은 손님들을 응대하기 위한 점원들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손님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있었다. 도겸은 장신의 키를 활용하고도 목을 길게 빼내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아씨는… 그 소문 자자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전에 저자에서 아씨를 뵌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리고 다녀도 존재감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치이며 찾을 필요 없이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는 곳으로 향하니 어렵지 않게 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가?”
분명 많은 사람들을 귀찮아하며 싫은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청은 제게 몰린 시선들을 즐기기라도 하듯 점원의 관심에 적당히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예. 아씨께서 표낭도를 잡지 않으셨습니까? 거기다 그….”
보는 눈들이 있는지라 점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아꼈다. 청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마다 그랬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거기다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아랫사람을 대하는 법까지 익혀 쓰는 건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했다.
“왜 있지 않습니까. 지체 높은 집 아씨와 저자에서 한바탕하셨던 거요.”
“지체 높은 집?”
“어허, 우리가 지금 찾는 책이 있는데!”
황급히 끼어든 도겸이 청을 가리고 섰다. 느닷없이 시야를 가득 채운 장신의 사내 때문에 점원은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예, 예?”
“좀, 찾아주겠나?”
“아… 예, 나리.”
청을 보며 홀린 듯한 눈을 하고 있던 남성 점원이 도겸을 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떤 세책을 찾으십니까?”
“여기서 가장 인기가 좋은 필사인이 있지 않나? 그이가 쓴 책들을 좀 보고 싶은데.”
가장 인기가 좋은 필사인은 그만 죽어 버렸지만 따라 쓰는 이들이 있다 하니, 아마 점원이 아닌 척 전부 권하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부터 콕 짚어 원하면 밑지는 흥정이 될 것도 뻔했다.
“아, 나리께서도 읽기 좋은 책을 주로 찾으시는군요. 저희 세책점 책들이 전부 필체가 좋은 필사인들을 엄선하여 쓰인 것이긴 합니다만….”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서가에서 수 권의 책을 가져온 점원이 도겸에게 하나씩 권했다.
“이건 최근에 도성에서 아주 난리가 났던 세책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연애담이 제일 인기지요. 그리고 나리, 이것도 보시겠습니까?”
슬쩍 도겸을 구석으로 데려간 점원이 속닥거렸다.
“이게 요즘 집집마다 이불 밑에 숨겨 놓는다는 바로 그 춘화첩이지요. 담보를 맡기고 빌려 가도 회수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만큼…”
“누, 누가 그런 것을 보여 달라 하였나!”
원하는 것에 슬쩍 다른 것을 끼워 권하는 방식이야 흔하고 당연한 상술이라지만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었다. 기함한 도겸이 접선을 꺼내어 때 이른 부채질을 해 댔다. 점원은 음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점잖은 나리시군요.”
“그, 쓸데없는 것 말고 찾아 달라는 책이나 더 가져오게.”
“예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원이 다시 서가 사이로 사라진 사이에 몇 권의 책을 살펴보던 청이 물었다.
“춘화첩이 뭐야?”
“뭐?”
“뭔데 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거냐고.”
“아… 그게, 그게 말이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겸의 부채질만 빨라졌다. 답을 기다리면서도 책을 살피던 청이 도겸을 올려다보며 의아해했다.
“뭐야. 너도 모르는 게 있는 거야?”
이런 걸 설명해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 많은 책을 읽고도 침착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도통 가라앉지 않는 열기가 당혹스럽기도 했다.
“설명하기 곤란해서라곤 생각되지 않는 것이냐?”
“곤란할 게 있어?”
“어찌 됐든, 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불건전한 것이니 가까이 하지도 말고.”
“…뭐야.”
말릴수록 궁금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청은 큰 관심을 갖지 않고 보던 책에 더 집중했다. 도겸은 슬쩍 청이 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 함께 어깨를 마주하며 물었다.
“그래서 뭔가 알아낸 게 있느냐?”
“아니.”
“없다면서 무얼 그리 열심히 보는 것이냐?”
“이거… 집에서 본 건데 다음 권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청은 지금 수사의 일환으로 세책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읽고 싶던 책을 정신없이 읽고 있는 것이었다. 슬쩍 제목을 살피니 <소현성록>이라 쓰여 있었다.
송나라를 배경으로 하여 승서 직까지 올랐던 소현성의 가정사를 그린 이야기였다. 어서 중요한 일을 해 달라고 하기엔 책의 내용에 집중한 청의 표정이 자못 진지한지라 도겸은 점원이 찾아온 책들을 대신 받아 들고 조금 기다려 주었다.
“…재미있느냐?”
“하필 중요한 대목에서 끊겨 있었다고.”
왜 남성만 여러 부인을 둘 수 있느냐며 따져 묻고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정신없이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읽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았다. 도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셋째 부인이 개용단을 먹고 둘째 부인의 모습으로 소현성이 싫어하는 행동을 보여서 결국 소현성이 둘째 부인을 쫓아내고 끝났단 말이야. 그다음이 궁금했는데….”
“그래서 해갈은 좀 됐고? 전에 물어본 것 말고는 궁금한 게 없느냐?”
“궁금한 거야 많지. 왜 소설 속 여자들은 전부 남자의 부인으로만 나와? 나랏일은 전부 남자만 해? 실제로도 그래?”
그저 당연하다 여겨온 것들을 콕콕 짚어 물어보는 여인에게 도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와중에도 청의 의문은 끝나지 않았다.
“부인들은 무조건 질투만 해? 친하게 지낼 수는 없어?”
“알지 않느냐. 그런 행동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부러 쓰고 후에 화를 입는 모습도 반드시 보여 준다고.”
“경계하지 말고 권장하는 의미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잖아.”
“뭐, 그렇기야 하다만… 그럼 독자들의 흥미가 떨어지니 적당한 갈등을 넣기 위함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