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엿들어볼까 하다, 이미 대문을 넘어설 때부터 청이 알아차렸을 것을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올라 재빨리 문에서 떨어졌다.
“저하, 소신이 잠시 안에 들어도 되겠습니까.”
“호오, 정말이군! 그래. 어서 오게.”
문을 열자 서안 위에 뭔가를 놓고 청과 마주 앉아 있던 세자가 도겸을 반겼다.
“낭자가 갑자기 자네가 왔다고 하기에 무슨 소리냐 하던 참인데, 정말 대단하네!”
안으로 들어간 도겸은 청의 곁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각에 오셨다 하여 놀랐습니다. 어찌 오셨습니까?”
“사람을 보내기엔 말이 새어 나갈까 걱정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눈으로 직접 낭자가 이걸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서안 위에 놓인 종이들이 뭔가 했더니, 역시 지난번에 보내겠다 약속한 망자들의 유서들이었다. 청은 종이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들고 코를 갖다 대었다.
“다 같은 먹물과 종이 냄새긴 한데, 너무 여러 사람이 만졌어.”
그것만으로도 유서가 날조되었다는 큰 증거였지만, 문제는 청이 냄새로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임금이나 여타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청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기에.
“하면 방법이 없겠느냐?”
“이걸 썼을 법한 이들을 데려다 놓고 비교해 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청의 머리 위엔 남산댁이 앉아 있는 게 아닐까. 남산댁이 듣고 있지 않다고 바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영악한 용이 아닐 수 없었다.
“몇몇은 포도청에서 소환하여 조사해 보았는데… 아, 그때 네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체를 뒤로 젖혀 천장을 본 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단 소환해서 모아둘 테니 확인해 주겠느냐?”
청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도겸이 끼어들었다.
“아마 거기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앞선 소환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을 거고요.”
이유는 언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도겸은 청을 위해 설명했다.
“필사인이라고 하여 세책점에 따로 명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도성 안의 세책점이 한 곳도 아니지요. 그 많은 곳에서 활동하는 필사인들을 전부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 이 종이와 먹을 사용하는 세책점만 추리면 얼마나 돼?”
“그건 한 곳이었지.”
언이 씩 웃으며 한쪽에 놓아두었던 보따리를 서안 위에 자랑스레 올렸다.
“아마 지금껏 만져 보지 않은 종이와 먹이 없을 우리 최 직각 덕분에 운 좋게 단박에 찾았거든. 그날 바로 찾아가 그곳에서 취급하는 세책을 몇 권 구했지.”
도겸이 손을 뻗어 보따리를 풀자 몇 권의 세책이 나왔다.
청이 오로지 책의 냄새만 맡아야 할 듯하여 손을 대려다 말고 옷소매로 받쳐 들어 훑어보려는데 청이 알아차렸는지 마찬가지로 다른 책을 가져가며 말했다.
“네 냄새로 헷갈릴 일은 없어.”
“…….”
당연히 청이 이곳으로 와 그 누구보다 많이 겪은 사람이 저라서 그렇겠지만, 어쩐지 도겸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느라 청이 먼저 책을 살펴보는 게 빨랐다.
“이건….”
그런데 미간을 찌푸리며 언을 흘겨보는 게 아닌가.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거야?”
“뭐?”
황당한 언이 눈썹을 치켜떴다. 도겸은 아무리 편하다 하여도 이런 식의 언행은 무례하다 지적하려 했다.
“청아.”
도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언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해 보자는 거다. 딱히 너를 시험할 생각은 없었다만… 궁금하지 않느냐?”
세책점에서 가져왔다는 사실 외에, 언은 아무런 말도 없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했다. 도겸은 뒤늦게 책을 훑어보았다. 청이 화가 난 이유는 알 만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글자가 쓰인 빈 공간마다 세책을 대여해서 본 이들이 저마다 다르게 달아 놓은 감상으로 가득했으니까.
“거기서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말해 보거라.”
느닷없는 언의 시험에 청은 불쾌해하면서도 보란 듯이 작은 얼굴을 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곤 다른 감각보다 후각에 집중했다.
“먹과 종이는 유서와 같아.”
“거기까지는 당연히 나도 알고 있네만. 자네도 딱 알아차리지 않았나?”
도겸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짓궂게 장난을 칠 때 언은 꼭 저런 표정이었다. 어디에 호응할지 고민하던 도겸은 일단 언에게 동조했다.
“예. 확실히 상등품의 책지에 먹도 최고급까진 아니지만 적당히 질이 좋아 보입니다. 송연먹은 아니고, 아마 유연먹이겠지요.”
“…기다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자극 받은 청이 더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앉은 도겸은 얼결에 자존심 싸움을 하는 인간과 용의 사이에 앉은 심판이 되어 있었다.
“이거….”
보따리에 있던 책을 전부 조사한 청이 낸 결론은 단순했다.
“죽은 사람이 쓴 책들이잖아.”
언에게 답을 낸 청이 도겸을 보며 말했다.
“검시소에 가서 봤던 사체.”
“호오…!”
언이 감탄하며 활짝 웃었다. 그의 감정이 진심으로 전해졌는지 청은 새침한 얼굴로 턱을 좀 더 높이 들었다.
“뭐,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어.”
우쭐해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딱 어린 소녀 같아서, 도겸도 그만 언과 함께 미소 짓고 말았다.
“맞다. 망자가 쓴 세책이지. 전에 집에 남아 있던 종이를 보여 주며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필체가 정갈하고 가독성이 좋아 다른 필사인들이 찾아 쓸 정도였다고. 그런데 아무리 기를 써도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찾을 수가 없더군. 심증이 분명한데도 말이야. 수배령을 내린 놈들도 한패일 수 있어 꼭 찾아야 하는데.”
“그럼… 이제 청이의 능력도 확인되었고 날조된 것도 확실하니 제대로 찾아봐야겠군요.”
언의 의도를 읽은 도겸이 말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세자도, 늘상 무심한 용도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도겸의 시선은 서안 위에 놓인 유서를 향했다.
“저 유서를 쓴 사람을.”
***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밖에 나갔다 궐로 돌아와 동궁으로 향하던 언은 누군가 굉장히 반갑게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리고 못 들은 척 그대로 갈 걸 그랬노라 후회했다.
“…좌상 대감이 아니십니까.”
어딜 가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조익환이 언을 보며 웃고 있었다. 무례하게 인사조차 목례가 다였다.
“어딜 다녀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잠시 궐 밖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다수파를 이끈 덕에 영의정보다 월등히 강해져 버린 당신을 잡기 위한 일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언은 대신 뜬구름을 잡아 댔다.
“부쩍 날이 풀리지 않았습니까? 우수도 지나 이제 진짜 봄이 된 듯합니다.”
“이번 회강 때 불통을 하나 받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궐 안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이는 언의 회강 평가까지 꿰고 있었다.
“그런 성적으로 어찌 궐 밖에 나가 봄을 누리신단 말입니까?”
게다가 변명의 여지도 없는 빌미를 대며 언을 압박했다.
“신하인 저는 백성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추운 겨울에 사는 듯한데, 어찌 장차 이 나라를 이끌 분이 혼자 봄을 만끽하면서!”
실세나 다름없는 좌의정의 호통에 주변을 지나던 관리들이며 나인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사라졌다.
“혹 세자 저하께서는, 지금 궐 밖에서 벌어지는 일엔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어찌 없겠습니까”
결국 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누군가 왕실을 능멸하려 살인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꾸며 애꿎은 사람을 넷이나 죽였습니다. 그들을 지키지 못했지만 적어도 망자들에게 한은 남지 않도록!”
좌상의 말투를 찍어 내듯 따라 한 언이 고스란히 조익환에게 돌려주었다.
“진실을 찾아 만천하에 드러내고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자께서 직접 그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니신 겝니까?”
비꼬는 게 분명한 조익환에게 언은 여전히 정색한 채로 대꾸했다.
“예. 생각보다 범인이 허술한 놈인지 여기저기 흘린 게 많더군요.”
다 떠나서 당장 관리들이 모두 나서서 범인을 찾으려 혈안이 되지 않는 분위기부터 정답을 알려 주고 있음이나 다름없었다. 언은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조정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는 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세자로서 발악해야만 했다.
조익환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안 이상 더더욱.
“게다가 간신히 잡아들여 문초를 다 끝내지도 못한 죄인들이 옥 안에서 전부 죽는 일이 벌어졌지요.”
간밤에 갑자기 하옥된 죄인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다 못해 또 다른 살인 사건이 발생한 기괴한 일도 이어졌다. 서로를 죽이고 자결해 버린 탓에 날이 밝은 뒤에 시신을 몇이나 수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까진 도겸이나 청에게 밝히며 맡기고 싶지 않아 아직은 쉬쉬하고 있던 차였다.
“들었습니다. 직접 잡은 죄인들을 관리하는 것이 기본인 것을…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이리 미숙하신데, 어찌 사건을 해결한단 말입니까?”
조익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언은 이미 예상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전에 가족이라며 누군가 들어와 사식을 건넸다 들었습니다. 그때 뭔가 이야기를 전한 게 아닐까 의심하며 그 가족이라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익환의 집 근처에 사람을 심어두었다. 거기서 드나드는 이들을 모조리 감시할 생각이기도 했다. 위험한 일들이기에 익위사들 중에서도 정예만 뽑아 은밀히 지시해 둔 일이었다.
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조익환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비웃음 같기도 했고 이기지 못할 싸움을 걸어오는 세자를 향한,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옅은 동정심 같기도 했다.
“그 또한 좌상의 말대로 제 불찰이니 죄인은 꼭, 제 손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저하께오서 하루 빨리 죄인을 추포하기를 고대해 봐야겠군요.”
조익환이 여유로이 뒷짐을 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