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65)화 (50/197)

“전하께서 윤음(綸音, 국왕이 국민을 타이르는 내용을 담은 문서)을 내리셨지 않나.”

“예. 저도 보았습니다.”

임금이 내린 윤음의 주된 내용은 역시 세자가 직접 조사에 나선 바 연달아 벌어진 처녀들의 자살 사건이 자살이 아닌 살인 사건이었음을 천명하고 있었다.

직제학 송 씨와 임씨는 도겸이 듣기만 해도 알아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앵속각(양귀비의 다른 이름) 중독을 이용한 연쇄 살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사달이냔 말이네.”

“살인을 숨기려 간택령을 이용하다니… 이리 악랄할 수가 있나!”

“전하께서 이 일을 구태여 널리 알리신 건 역시 세자 저하를 폐위하라는 상소들 때문이겠지?”

“말해 뭐하나. 엄한 놈들이 저지른 살인 때문에 세자 저하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셨으니 당연히 바로잡아야지.”

다른 때 같았다면 진범을 잡기 전까지는 괜스레 분위기가 더 흉흉해질 것을 고려해 최대한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수사를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의 권위가 달린 문제인지라 임금에게도 선택지가 마땅히 없었으리라 예상했다.

“전국적으로 수배령이며 양귀비 사용을 금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하니 곧 잡히지 않겠는가?”

다소 태평하고 유유자적한 학자들인 직제학 송 씨와 임씨는 상황을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성향 덕에 중립을 지키고 긍정적으로 학문의 연구를 해 나갈 수 있었다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도겸은 기어이 트집을 잡았다.

“두 분 직제학 영감들께서는, 이 일을 단순한 연쇄 살인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그럼 무엇이겠나? 이미 암암리에 양귀비가 퍼졌다지 않나. 값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터인데, 당연히 투전판이나 기루 같은 곳에서 빚을 져 가며 샀을 테고 금전적 이해관계가 섞이니 범죄로 이어지기도 쉬웠을 테고.”

왜 정작 퍼질 필요 없는 일은 하루아침에 구석구석 퍼지면서 이런 일은 쉬쉬하고 무마되는 걸까.

“피해자들 모두 빚을 진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랬나? 자네는 어찌 알았나?”

“저하께서 직접 조사하실 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나 저하를 따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포도청에 동행하여 종사관의 보고를 들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자네는 뭔가 더 알 줄 알았지!”

직제학들이 도겸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뭔가 더 들은 건 없었나?”

그리고 도겸 역시 직제학들을 존경하며 따르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들은 대로만 곧이곧대로 믿거나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고 다방면에서 다시 살필 줄 아는 이들이었으니까.

“하루 이틀 차이로 연쇄적으로 처녀들이 죽은 일인데, 우발적인 범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한미하다 하여도 엄연히 양반가의 여식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보란 듯이 간택령을 원망하는 유서를 남긴 게 여간 수상쩍은 게 아닙니다.”

다른 걸 다 떠나 죽은 이들 가운데 세도가의 여식은 없다는 점이 어떤 방증이기도 하지 않나. 도겸이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한 직제학들이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면 자네 말은 지금, 살인을 숨기려 간택령을 이용한 게 아니라는 겐가?”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간택령, 그러니까 간택령을 내린 주상전하와 관련된 국혼의 주체인 세자 저하의 권위를 욕보이기 위해 살인을 이용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마디로….”

모여 앉은 세 사람 모두 알고 있는 말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함부로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예.”

와중에 가장 겁이 없는 도겸이 운을 뗐다.

“저는 이 일을 반역이라 보고 있습니다.”

“최 직각.”

소리 없이 기함한 송 씨가 도겸을 즉각 단속했다.

“우리야 충심 깊은 자네 성정을 잘 알지만, 밖에선 무척 조심해야겠네. 알겠나?”

“그래. 자칫 자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얼마나 걱정인지 몰라.”

“…예.”

임씨까지 가세하여 도겸을 말리는 통에 별수 없이 그러겠노라 답하던 때, 송 씨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며칠 전에 좌상 대감이 비를 내린 일이 더 기이하단 말이지. 적어도 살인 사건은 사람이 벌인 짓이라지만, 비를 내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그 일로 인해 조익환은 송 씨의 말마따나 며칠 사이에 도성 안팎에서 암암리에 거의 신격화되고 있기까지 했다.

왕조차 부르지 못하는 비를 신하가 내린 꼴이니, 보통 상황은 아님이 분명했다. 백성들은 그저 비가 내렸다며 좋아할 일이라지만 궐 안쪽에서는 당연히 정치적인 부분을 우선하여 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는 줄줄 이어 나가던 도겸이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무기가 아닐까 하옵니다.”

직제학 영감들은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도겸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청의 말을 통해 정말로 비를 내린 게 사람의 힘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익환이 이를 이용해 연이은 자살 사건 관련하여 자신에게 모인 의심을 흩트렸다는 것도.

“요즘 도성 안에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군.”

“곧 대사례가 있지 않나. 그건 무사히 열릴 수나 있는 것인가?”

“그러게나 말일세. 이곳이야 중립이라지만 지금 규장각 밖은 살얼음판이나 다름없다더군.”

권세보다는 학식에 더 욕심이 많은 두 직제학은 질린 표정을 하면서도 우려를 멈추지 않았다.

“어찌 행해진다 하여도 거기서마저 뭔가 사고가 생긴다면….”

“거기까지 하게. 말이 씨가 되면 어쩌려고?”

“하나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만 치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불안해하는 두 학자들에게 도겸은 늘 그렇듯 부러지지 않는 성정을 내보였다.

“문신과 무신, 신하라면 누구든 참석하여 주상 전하와 함께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고 그를 통해 다시 한번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해 사기를 돋우고 신의를 다집니다. 이렇게 분열되는 때일수록, 함께한 과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걸 모르나? 다만 이렇게 분열된 상황엔 다 같이 모여서도 누가 더 강한지 편 가르기밖에 되지 않을 거란 말일세. 중심이 위태로운데 어찌 하나로 뭉칠 수가 있겠나?”

“그렇다 하여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해서도 안 될 일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아직 규장각이 존재하며 꾸준히 왕의 신하들이 이곳에서 수학하며 성장하고 있지 않나. 도겸은 다소 부정적인 직제학들과 달리 생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였으니 설령 사고가 난들 반드시 돌파구가 있을 것입니다.”

제게 청이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도겸이 다시금 머리를 채우는 그 여인을 떠올렸을 때, 멋쩍은 듯 수염을 쓸어내린 송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뜻밖의 상황도 늘 있으니 말이야.”

“그래. 왜, 얼마 전에 사람이 빠져 죽었던 우물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정화가 된 일도 있지 않았나? 날을 잡아 다 같이 퍼내기도 전에 말이지.”

“아, 나도 들었네. 여전히 그 우물의 물을 쓰기를 꺼리는 이들이 있다는 소식에 전하께서 친히 납시어 물을 드신 뒤로는 용정(龍井)이란 이름까지 붙고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더군.”

이 이야기를 전해 주면 그날 밤 고생한 청이 좋아할 것 같았다. 용정이라니, <용비어천가>라는 제목 하나에 기를 쓰고 정음을 익힌 용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자네는 가 보지 않은 겐가? 나는 궁금해서 직접 가보았는데 말이지.”

“그래? 그 물맛은 보았는가?”

“내가 수십 년간 마신 물은 물이 아닌 듯하였네… 자네도 어서 가 보게. 그 우물이 마르기 전에 말이지.”

언제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냐는 듯 우물물 하나로 정신없이 떠들기 바쁜 직제학들을 두고 도겸은 서둘러 책상을 정리했다.

“그럼, 소인은 먼저 퇴청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겸을 본 직제학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허어, 자네 오늘도 그리 칼같이 퇴궐할 참인가?”

“예. 혹, 무어 더 맡기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네만….”

“그럼, 명일에 뵙겠습니다.”

보통은 일이 남아 있는 직제학들이 업무를 모두 마치고 퇴청할 때까지 함께 머무르며 돕던 도겸이었다. 한데 요즘은 어쩐지 서둘러 퇴궐하기 위해 더 기를 쓰는 모양새지 않나. 그 모습이 아직 영 낯설게만 느껴지는지라 직제학들은 떨떠름해 할 겨를도 없었다.

“그, 그래. 들어가게.”

그렇다고 해서 일을 게을리 하거나 꾀를 부리는 것은 더더욱 아닌지라 불평할 명분조차 없었다.

도겸은 멀뚱히 선 상사들을 두고 주변의 동료들에게 먼저 들어가 보겠노라 일일이 인사를 남긴 뒤, 누가 잡을세라 바람처럼 규장각을 빠져나갔다.

***

“나리, 세자 저하께서 와 계십니다.”

“세자 저하께서?”

도겸이 사랑으로 향하자 문을 열어준 행랑아범이 서둘러 고하였다.

“아니, 그쪽이 아닙니다!”

“…그럼?”

“안채에 계십니다.”

“안채?”

“아씨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 하셔서요.”

그 말을 들은 도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곧장 방향을 틀어 안채로 향했다. 어찌나 바쁜 걸음인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행랑아범이 놓칠 정도였다.

“나, 나리!”

“별채로 모시지 그랬나.”

별안간 중문을 넘어서던 도겸의 입에서 질책이 튀어나왔다. 행랑아범은 눈을 끔벅이며 억울한지 즉각 해명했다.

“이전에 나리께서 저하를 안채로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시기에… 다음부터는 유념하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나리.”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없다면 남산댁에게 먼저 묻고 결정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안채 마루로 올라선 도겸이 문 앞에 섰다. 문득 안쪽에서 언의 웃음소리가 나기에 저도 모르게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