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비를 내린 힘을 가늠해 봤을 때 상대가 용에 비견할 만큼 강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무리 약한 용이라도 그렇게 하찮은 비를 내리진 않기 때문이옵니다.”
“하면?”
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보며 가만 생각에 잠겨 있던 청이 비로소 눈을 들어 말했다.
“아마도 이무기가 아닐까 하옵니다.”
“이무기?”
인간미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린 듯 아름다운 여인이 깜짝 놀란 도겸과 언을 번갈아 보았다.
“짐승이 500년을 살며 도력을 모아 여의주를 만들어 내면 이무기가 되고, 다시 500년을 살며 여의주를 지켜 내면 마침내 여의주가 심장이 되고 이무기는 용이 되는데, 모르셨사옵니까?”
“아니, 아예 몰랐던 게 아니라 이무기며 용이 실재한다니 그저 놀라워 그런 것이다.”
슬슬 적응이 된 도겸과 달리 이제야 막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세자는 시종일관 청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세자 저하께서는, 용의 후계자가 아니십니까?”
그런 언에게 청이 다소곳하지만 퉁명스러운 기색이 여실한 얼굴로 물었다. 순간 눈이 커진 언이 다음 순간 화통하게 웃었다.
“이 나라 조선에서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 실로 너처럼 무소불위한 능력을 가진 신령한 존재와 같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일전의 도겸이 그랬듯 비슷하게 설명하던 언이 다시 잔을 채우면서는 다만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임금을 저 높은 하늘 손에 닿지 않는 태양에 비유하고 상상 속에나 존재하던 용에 비유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저하.”
도겸이 무어라 말하려던 차, 청의 답이 빨랐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은 한 번 떠오르면 이 땅 구석구석, 그 볕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전과 달리 부쩍 위화감 없이 대화를 나누는 여인이 특유의 냉정하고도 단호한 눈으로 언을 바라보았다.
물을 끌어 모은다거나, 얼음 창을 만들어 내는 등의 대단한 능력을 내보이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여인이었다.
“저는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도겸은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마음에 푸른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명치에 손을 얹어 볼 정도였다.
“이무기는 용에 비해 격이 낮고, 겨우 그런 졸루한 힘으로 위세를 부리려 하니 같잖기 그지없사옵니다. 무엇보다 이종족의 힘을 끌고 들어와 다른 종족의 일에 관여하는 것부터 졸렬합니다.”
신랄하게 이무기를 욕한 청이 가볍게 대응 방안을 내놓았다.
“이무기는 그저 지키고 있는 여의주를 깨부수기만 하면 그만. 여의주를 빼앗으면 조익환이든 조설아든 어쩔 수 없이 다시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구태여 간택까지 갈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아니 된다. 지금은 너도 멀쩡한 몸이 아니지 않느냐.”
도겸이 즉각 반대했지만 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저도 저들처럼 졸루하게 대처해야 할까요? 제가 물을 다루는 능력이라도 내보여서 저급하게 인간들을 선동하면 되겠습니까?”
“청아.”
어딘가에 기대어 얻은 힘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그걸 알기에 도겸도 파랑에게 기대지 않고 심청이라는 이름을 주어 인간처럼 꾸민 것이었지 않나.
그는 그저 조익환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마땅히 벌을 받게 하든, 세자빈들이 죽어 나간 정황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어 더는 세자의 안위가 위협받지 않게 하고 싶었다.
어떤 것을 바로잡든 아버지가 충성하셨던 나라를 위한 길이라 여겼으니까.
결국 나라를 위한 일인 만큼, 멀리 돌아가더라도 바른길로 가고 싶었다.
“네가 가진 힘은 철저히 너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만 쓰라 하지 않았느냐. 먼저 드러낸들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상대가 이무기라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더 인간의 방식으로 대응해… 요, 오라버니?”
“이무기가 단독으로 그런 짓을 벌이는 게 아니지 않느냐. 이곳은 인간 세상이고, 분명 사람과 엮여 있다. 엮인 사람들을 골라내면 돼.”
“정확히는 엮인 지점을 잡아내고 증명하여야겠지.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으니 말이다.”
청과 도겸이 열을 내며 입씨름을 벌인다 여겼는지 언이 적당히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조익환이 이무기를 끌어들여 비를 내렸든, 그 자체가 이무기라 비를 내렸든 간에 결과만 놓고 보면 단비라도 내려 준 덕에 침울해 있던 백성들이 기운을 내고 어디서든 활기가 생겨났지 않던가? 비록 주상 전하며 나는 면이 서질 않는다지만 백성들이 사는 데에 무어 체면이 대수겠나. 전하께서도 당장은 비가 내렸다는 것 자체에 크게 기꺼워하셨는데 말이야.”
언은 맑은 술이 든 잔을 손 안에서 작게 굴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선 그 일은 접어 두고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집중을 해 보자면, 지난번 심 낭자 덕에 별탈 없이 잡아들였던 약쟁이들은 강도 높은 문초를 가했지만 배후를 특정할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 몇 달 전쯤 복면을 쓴 자들에게서 헐값에 양귀비를 사들여 팔았다는 진술, 그리고 그자들이 되도록 남자보다는 과년한 처녀들을 끌어들이라 하였다는 이야기 외엔.”
배후에 있는 자는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는 데 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도겸에겐 심증을 굳힐 또 다른 증거가 되었다. 과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자는 바로 이런 식으로 유유히 수사망을 벗어났기에.
“망자들의 필체를 흉내 내어 유서를 날조했을 만한 이들을 찾고 있사온데,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필사를 하는 소일보다는 범죄에 동조하는 일로 얻는 삯이 훨씬 많을 테니, 찾는다 하여도 원하는 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일세. 말한들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더욱 면피하려 할 테고.”
세자빈이 죽어 나갔던 사건처럼 또다시 유야무야될 수는 없었다. 도겸과 언이 고민에 빠져 있을 즈음 청이 나섰다.
“그럼 전처럼 결과를 먼저 찾고, 과정을 메우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목을 맨 여자들이 약에 중독되어 있던 것을 알아차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증거를 모은 것처럼, 이번에도 ‘냄새’를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청이 뚱한 눈으로 도겸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그럼 딱히 힘을 쓸 필요도 없다는 뜻이리라. 저를 생각해서 말리는 것임에도 청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냄새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냐? 지금은 사체도 모두 장례를 치러서 하나하나 살펴볼 수도 없을 터인데… 게다가, 냄새가 그리 오래 남는 것이냐?”
마찬가지로 의구심이 든 언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청이라 하여도 그다지 자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 유서들이 아직 있다면 한번 보고 싶습니다.”
어쩐지 이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청이 부쩍 적극적으로 상황에 임하는 듯했다. 또한 감히 용보다 못한 이무기 따위에게 질 수는 없다는 각오인 것일까.
“그럼 저하의 백성들을 선동하거나 혼란케 하지 않는 선에서, 제 능력을 빌려 드리겠사옵니다.”
아니, 일단은 남산댁에게 보상을 받는 게 가장 우선인 듯했다.
“유서라면… 포청에서 올린 검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만 이미 여러 손을 탄 것인지라.”
“그럼 큰 기대는 마시옵고, 그저 모두 모아 소녀에게 한 번 보여만 주셔도 충분하옵니다.”
“그대가 거기까지 신경을 써 준다면야 나야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지. 빠른 시일 내로 보내겠네.”
도겸은 청이 괄목할 정도로 이 땅에 적응한 것을 보고도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마음에 불순물처럼 끼어들었다.
언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더욱 그랬다. 왠지 제 방에 앉아 있음에도 초대 받지 못한 객이 된 것 같은 그런 생경한 감각이 신경을 긁어 댔다.
“그럼 청아, 그만 돌아가 남은 수업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기어이 도겸은 점잖은 수면 아래 일렁이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청을 내쫓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야 한데….”
청은 아직 남은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했지만, 도겸이 등을 떠밀어 대는 통에 결국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잘했다. 남산댁에게는 충분히 상을 내리게끔 할 테니 그만 안채로 건너가 쉬어라.”
와중에 대충 달래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청이 가볍게 일어나 언에게 인사했다.
“그럼, 소녀 이만 물러가옵니다.”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인사를 올리던 청이 고개를 들었다.
“하문하시옵소서.”
“어찌하여 이 녀석과 손을 잡은 것인지 궁금하구나.”
“그야….”
청이 맑은 눈을 굴려 도겸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이내 다시 언을 보며 답했다.
“가장 알 수 없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뭐?”
“곱씹어 생각하게 만든 유일한 인간이기에,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 답은 언이 의아해하듯 도겸에게도 뜻밖이었다. 그러나 청은 그 말만 남기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돌아서 방을 나갔다. 잠시간 적막해진 방 안의 공기는 언이 먼저 흩트렸다.
“신묘한 존재라 대답마저도 아리송하구만. 자네처럼 청렴하여 투명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세자는 별생각 없이 술잔을 채웠지만 도겸은 청이 닫고 나간 문가에 가 닿는 시선을 쉽사리 되가져오지 못했다.
가장 알 수 없다는 말에 혼란한 제 심경을 들켜 버린 듯했으니까.
***
“최 직각.”
“…….”
“최 직각!”
붓을 든 채 혼백이 나가 있던 도겸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부르셨습니까?”
책상 앞엔 입이 근질근질한 낯빛의 직제학들이 서 있었다.
“그래.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응?”
두 사람은 뭔가 도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듯 각자 체면도 잊고 옆에 있던 의자들을 끌고 와 앉았다.
“이런 와중에 또 맡은 일은 다 해 놓으니 신기할 따름이지.”
“그럼, 그럼. 우리 규장각이 최 직각 없이 어찌 돌아가겠는가?”
“아… 아닙니다.”
아직 그의 정신은 새벽 나절 파랑의 품에 안겨 날아온 때로부터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독기를 빼내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한들 입을 맞춘 충격에서조차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입을 맞춘 건.
“무슨 일이십니까?”
야직을 대신 서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조금 곤란하던 차에 직제학들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