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지 않을 참이냐?”
“너야말로 궐에 가야 한다며, 느긋하게 집에 걸어가려고?”
“그다지 멀지 않으니 한 식경이면 되겠지.”
한 식경이라니. 시간이 여유로우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청은 적당한 수를 떠올렸다.
최도겸과 함께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
“네 선택지는 그것뿐이야?”
“아니면, 내게 업히겠느냐?”
도겸이 청의 앞에 등을 내보이며 앉았다.
“이곳저곳을 천천히 구경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 방법도 나쁘지 않지.”
“…너는.”
그러나 청은 순순히 업히지 않았다.
“나를 아직 잘 모르는구나.”
그러자 도겸이 여전히 등을 내보이는 자세에서 홱 올려다보며 의아해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느냐?”
“너랑 나랑 같이, 단숨에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잖아.”
“그게 무슨….”
청은 도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덥석 그를 들어 안았다. 얼결에 청에게 안긴 도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 이, 이게 무엇 하는 것이냐?”
“우리 모두 목적은 같은데 다른 선택지를 떠올린 것 같아서. 그냥 내 선택지에 따르려고.”
청은 도겸을 편히 들고 곧장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경악한 도겸이 소리를 지르다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나중에 뭐 없어졌다고 내 탓하지 말고 잘 챙겨. 난 너만 들고 갈 거니까.”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청이 검게 타들어 간 눈동자를 번득이며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아니, 청… 청아…!”
기어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버린 도겸의 비명만 긴 궤적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깨끗한 햇볕이 둘의 발자취를 따랐다.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고, 또한 조금 더 푸르게 물든 봄의 아침이었다.
***
“며칠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갓끈을 풀어 내던진 언이 보료 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따라 들어온 도겸은 한숨을 내쉬며 세자가 내던진 귀한 흑립을 잘 정리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도 이리저리 떠들기 바쁜데, 하물며 저하께서는 당연히 눈코 뜰 새 없으셨을 줄로 압니다.”
사건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연이어 터지고 벌어지는 새로운 일들로 인하여 도성 안팎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모이면 간택령으로 인해 처녀들이 죽어 나간 사건과 동시에 좌의정 조익환이 비를 내린 일로 떠들어 대기 바빴다.
“그동안 식사는 제대로 챙기신 겁니까? 잠도 못 주무신 듯한데, 예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은밀히 도겸의 집을 찾은 세자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도겸의 걱정에 언이 팔등으로 눈가를 덮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나. 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려면 회강에서 서연관들이 극찬을 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와중에 연쇄 살인 사건과 더불어 양귀비를 다루던 놈들의 문초며 혜빈과 유빈의 사인을 제대로 알아보아야 하기도 했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비가 내린 일까지….”
거기다 불과 며칠 전이 혜빈의 기일이지 않았나. 먼저 떠난 세자빈들의 기일을 전후로 한동안 세자가 울적해 하는 것을 알기에 도겸은 차라리 언이 바쁜 것을 기뻐해야 하나, 잠시 삿된 생각에 빠졌다.
“따뜻한 차를 올리겠습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이럴 때 말하지 않아도 신 상궁의 술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체 보전하셔야지요.”
“여기도 예체가 아닌가. 난 여기부터 달래 주어야겠네.”
언이 눈가를 덮지 않은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 술로 마음을 달래고 싶은 듯했다.
“…딱 한 병만 내어 드리겠습니다.”
남산댁에게 주안상을 내어 오라 이르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간 도겸은 바로 앞에 주안상을 들고 있는 청을 보고는 하마터면 뒤로 주저앉을 뻔했다.
“너….”
무어라 말하려던 차, 청이 뒤쪽을 눈짓했다. 과연 대청 아래에 남산댁이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아씨께서 오늘은 반드시 보상을 얻고자 하십니다.”
아마 술을 좋아하는 청도 청이겠지만, 지난번에 실패한 주안상 심부름을 반드시 완수시키고자 하는 남산댁의 굳은 의지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도겸은 문을 더 활짝 열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저하, 제 누이를 잠시 들여도 되겠습니까.”
“어? 누구?”
길게 누워 있던 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래서야,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도겸이 청을 따라 들어가 앉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가는 청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은 서로 다른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한 남자는 눈을 비비며 흥미로워했고, 한 남자는 번쩍 들려 날아온 기억 탓인지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세자 저하를 뵈옵니다. 마땅히 찾으실 줄로 알고 주안상을 준비하였나이다.”
“…그래. 네가 오라비보다 낫구나. 이리 앉거라.”
“예.”
뒤에서 남산댁이 허리를 숙인 뒤 문을 닫아 주었다. 아마 문밖에서 청이 잘하는지 확인하고, 세자와 도겸이 언제 부를지 모르니 대기하려는 것일 터.
“그대는 억지로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거라.”
“소녀,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옵니다.”
조심스레 상을 내려 둔 청이 눈을 빛내며 답하였다.
“밖에 있는 제 훈육 스승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가 어려워지는 연유로 이리하는 것이니 저하께서는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런… 것이냐? 크흠, 뭐 그렇다면야.”
더없이 예를 차린 말투에 행동이었으나 그 내용은 또한 거슬리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도겸은 아마 이번에도 청이 남산댁에게 불통을 받아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럼 편히 말씀 나누시옵소서.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아니, 괜찮다면 좀 더 있어 주겠느냐? 마침 그대에게 이야기해 주고 또 답을 듣고자 하는 문제가 있으니 말이야.”
오래 있을수록 실수하기 쉬워지고 그렇게 되면 보상을 얻기 어려워짐을 알게 됐을 청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자리에 눌러앉았다.
그러고는 언이 도겸에게 따라 준 술잔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실 말씀이 무엇이옵니까?”
“그게….”
막 운을 떼려던 언이 멈칫했다. 유난히 술잔에 시선을 꽂아 두고 있는 청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한잔하겠느냐?”
눈치를 살핀 언이 슬쩍 권하자 청이 눈을 부릅뜬 채 거절했다.
“어떤 음식이든 임금의 수라를 제외하고 웃어른이 먼저 드셔야 한다고 배웠사옵니다.”
“그, 샘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라든지 밤에 나돌아 다닐 때처럼 행동을 편하게 하여도 나는 괜찮다.”
“아닙니다. 잔을 드시지요.”
갑자기 깍듯하게 구는 청이 워낙 낯선지라 언이 의아해하면서도 먼저 잔을 기울여 마셨다.
편하게 하여도 좋다는 상전의 말을 거절하는 게 또 다른 불복이라는 것을, 청은 아직 모르는 듯 했다.
“그러니까….”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운을 떼기도 전에 청이 도겸의 앞에 놓인 잔을 냅다 가져가 마셔 버리는 게 아닌가.
와중에 자세만큼은 배운 대로 철저히 완벽하게 하는지라 이를 목도한 세자도, 표면적으로 오라비인 도겸도 말을 잇지 못했다. 게 눈 감추듯 술을 마신 청만 다소곳이 잔을 내려 둘 뿐이었다.
“…크흠, 내가 그, 익위사들을 시켜 비가 내린 범위를 알아보았는데 말이야.”
언이 모른 척 다시 술병을 들어 두 개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번엔 청의 잔에 가볍게 부딪쳐보였다. 사기로 만든 잔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청의 눈이 약간 커졌다.
미처 학습되지 않은 상황을 만나 약간 당황하는 듯 보였다. 여인을 본 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정확히 사방으로 오십 보 내외였다더군. 익위사마다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 어느 정도 감안하면 조익환의 집으로부터 사방의 거리는 같다고 볼 수 있어.”
마땅히 내용은 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어쩐지 느긋해졌다. 심각한 사안 앞에 오직 술만 노리는 청이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다 보니 그 태평함에 전염이라도 된 듯했다.
도겸을 제외한 둘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마치 규(規, 원형의 물건)를 대고 작도한 원과 같겠군요.”
세자와 누이 사이에 앉아 있던 도겸이 어쩐지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언은 술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켜고서도 재차 잔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관상감에서조차 예측하지 못한 소낙비가 내리려던 차에 마침! 조익환이 우연히 기우제를 지냈고, 그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기엔 차라리 누군가 하늘을 날며 물을 뿌렸다고 봄이 더 납득이 되는 상황인 게지.”
“역시 범위가 좁은 것을 보니 비를 내린 자가 그리 강하지는 않은 게 확실합니다.”
역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잔을 비운 청이 드디어 답을 내놓았다.
“그리 강하지 않다고? 사방으로 백 보나 되는 너른 범위에 비를 뿌렸는데?”
언이 눈을 키우며 물었지만 청의 시선은 여전히 술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입으로는 다행히 또박또박 답을 내어 주었다.
“제가 비를 내릴 땐 하늘이 지평선 너머까지 먹구름으로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질릴 때까지 대지를 적셨지요.”
도겸은 황급히 언을 보며 슬쩍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많이 권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였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되는지라 걱정이 됐다.
그러나 신묘한 여인의 이야기에 빠져든 세자는 친우의 간절한 만류를 보지 못했다.
“너도 비를 내릴 수 있는 것이냐?”
오히려 도겸이 그랬듯 헛된 희망에 함부로 부풀어 술을 더 따라 주었다. 청은 냉정하게 답했다.
“그랬다면 이 땅은 진즉 수몰됐을 것입니다. 힘을 쓸 수 없는 제약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청이 인간이 아닌 용이고, 신물의 제약으로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처음 설명할 때 말해 둔지라 언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다만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그렇구나.”
어차피 남산댁이 보지 못한다 생각하였는지 이번엔 청이 잔을 받자마자 바로 시원하게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 두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