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야무지게 도포까지 걸쳐 입은 그가 칼집을 정리하며 되물었다. 여전히 청은 본체만체했다. 묘하게 심술이 난 청이 도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일부러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가 독기를 빼 주어서 불만이냐고. 그게 아니라기엔 그 뒤로 계속 나를 피하잖아. 넌 내 눈을 피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인간이라 제법 강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럴 리가…!”
흠칫 놀란 도겸이 무어라 쏘아붙이기도 전에 다시금 거리를 두었다. 그러곤 아예 등진 채로 부산하게 옷고름을 매고 갓을 찾아 썼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신경 쓰지 않는 청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박대를 당하자 울컥 짜증이 솟았다. 처음부터 박대하는 것과 잘 해 주다 갑자기 막 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
그냥 혼자 돌아갈까. 홱 눈을 돌리던 청은 무심히 시선이 닿은 검집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좀 다르네.”
어쩌면 그래서 무심히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바위 위에 놓인 검집에 손도 대지 않고 기웃대며 물건이 지닌 기운을 살피던 청은 조심스레 손끝을 대어 보았다. 놀랍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더럽지 않아.”
“그건 철저히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검이니까.”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고 하여 듣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도겸이 간단히 답해 주었다.
“대대손손 절대 누군가를 먼저 해하기 위해서는 쓰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남겨진 보검이다.”
최도겸은 참으로 이상한 인간이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무시는 하지 않는다니.
청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도겸을 흘겨볼 때에 그 또한 힐끔 청을 보는가 싶더니 헛기침을 하며 넌지시 물어왔다.
“그, 독기를 빼는 방법 말이다.”
“왜?”
“꼭… 그것뿐이었느냐?”
“뭐, 직접 입을 맞추어 빨아낸 거?”
“그, 그렇게 적나라하게 묘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버럭 소리치는 도겸 때문에 청도 더는 참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럼 어떻게 설명해? 입을 맞춘 것을 입을 맞췄다고도 못하고 빨아낸 걸 빨아냈다고도 못하면…!”
“그만!”
무엇이 그리 불편한지 도겸이 기어코 커다란 손으로 청의 입을 틀어막았다. 따스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확실히 며칠 전에 느낀 차가운 체온은 최도겸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청은 생각했다.
“내가 말할 테니, 되도록 너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말거라. 다른 사람에게도 절대. 알겠느냐?”
조심스레 손을 뗀 도겸이 뚱하게 올려다보는 청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재차 헛기침을 해 댔다.
독을 빼내 주었으니 기침이 나올 리는 없을 텐데… 하긴, 생각해보면 도겸은 간혹 이유 없이 거짓으로 기침을 했다.
나름대로 많이 부딪치며 경험했다 생각했건만, 조금 알겠다 싶으면 최도겸은 또 알 수 없는 이면을 보여 주었다. 며칠간 저러다 죽는 건 아닐까 걱정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에도 그런 방법으로 누군가의 독기를 빼 주었느냐 물은 것이다.”
“아니?”
순간, 어딘가 모르게 꽉 막혀 불편해 보이던 도겸의 표정이 탁 트였다.
“어… 째서?”
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도겸이 무방비해 보인 탓이었다.
“말 그대로 내 화를 산 녀석들이니 죽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 뒀지.”
솔직히 말해 살던 곳에서 간혹 제 분노를 산 이들은 죽을 만큼 위험하지도, 그만큼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는 정도였다.
그만큼 인간이 약하다는 것을 또다시 증명하는 꼴이라 청은 그냥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인간이 약하다고 할 때마다 도겸은 길길이 날뛰지 않았나. 구태여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그럼, 무어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냐?”
“정기 가득한 내 바닷물을 먹거나 몸을 담가도 괜찮아지겠지. 물론 나는 내 물에 아무도 들인 적 없지만. 그래서 함부로 용을 분노케 하면 안 돼. 너도 앞으론 내가 화났다 싶으면 거리를 둬.”
그건 도겸에게 말한다기보다 솔직히 스스로에게 더 경계하라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수한 사람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경계를 허물고, 그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으니 말이다.
최도겸이야 순수하진 않아도 믿음이 있었기에 가까이 하다 일어난 일이지만 자칫하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해할지도 모르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긴 내 바다가 없으니까.”
“그래. 앞으로는 너를 화나게 하거나 화가 나 있을 때 함부로 손대지 않을 것이다. 한데 너도 그런 식으로 해독해 주어선 안 된다. 알겠느냐?”
“어째서? 그러다 죽어 버리면 어쩌려고.”
“그야!”
아무래도 이상했다. 최도겸은 스스로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로 번져 나갈지 모르는 불꽃 같기도 했다. 어딘가 맹목적이게 순수한 눈빛은 문득 조그만 순이와도 같아 보였다.
신기했다. 늘 불결하게만 느꼈던 사람에게서 이토록 강한 순수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탓이었다.
“그야….”
물론 최도겸은 영리한 사람답게 이성으로 감성을 조절했다.
“너처럼 무감한 이를 화나게 할 정도면 그만큼 네가 위험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내가? 상대가 아니라?”
“약한 상대라고 방심하지 마라. 힘이 약할수록 꾀를 부리게 되어 있으니.”
드디어 평소대로 침착해진 도겸이 제법 묵직한 검집을 들고 돌아섰다.
“곧 해가 뜨겠구나. 돌아가자.”
“그거.”
그러나 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겸이 들고 있는 검집의 끄트머리를 붙들어 그마저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왜 그러느냐?”
“나도 해 보면 안 돼?”
“뭐?”
도겸이 뭔가 더 묻기도 전에 청이 검집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자기 검은 왜…!”
말리는 도겸이 무색하게 청이 날렵하게 검을 휘둘렀다. 가는 팔로 가볍게 휘둘렀을 뿐이지만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피한 도겸은 제대로 말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만큼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으나 청에겐 그저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너는 무기가 없어도 일당백이거늘, 굳이 그걸 쥐어 봐야겠느냐?”
“그럼 너는 책만 읽는다면서 왜 이걸 휘두르고 있었어?”
“누군가를 해할 생각은 없다만 다른 이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청이 멍하니 검을 구경하는 틈을 타 큰 손이 다가와 검부터 빼앗아 갔다.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된다. 검을 휘둘렀을 때 그 끝이 닿는 반경까지 모두 계산해서 써야 하지. 직전에… 내 목이 날아갈 뻔하지 않았느냐.”
“그럼 알려 줘.”
검집에 검을 갈무리하던 도겸이 의외라는 듯 청을 보았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적어도 한자를 외우는 것보다는 흥미로워 보여서.”
“…그래 봤자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전부 외우지 않느냐.”
“그래서 직전에 네가 하던 것도 외웠어. 근데 그건 보는 거랑 하는 거랑 달랐어.”
청은 다시금 도겸의 검집을 잡으며 고집을 부렸다.
“나도 누군가를 해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검술로 알려 주면 되잖아.”
<용비어천가>를 읽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정음을 익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무리 인간들보다 강하다 한들 청에겐 무의미한 비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늘 함께였던 물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지는 공허감의 해소가 더 중요했다.
또한 도겸은 언젠가 힘을 되찾아 주겠다 장담했지만, 청은 기실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미약한 희망에 매달리기보다는 두 번 다시 힘을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슬슬 결손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살기가 없는 순수한 검을 본 순간 느꼈다.
바로 잃은 자리를 메울 새로운 힘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나도 검 줘. 계산이야 팔이 길어졌다 셈 치면 그만이잖아.”
“너는 검을 골라서 써야 할 터인데, 필요할 때 네 손에 이런 검이 없으면 어찌하려고?”
사실 ‘무기를 드는 것’ 자체를 이제 막 받아들인 터라, 청은 검뿐만 아니라 손에 쥐는 무엇이든 무기로 활용할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럼 돌이라도 집어 던지면 돼.”
“물론 네가 돌을 쥔다면 또한 화포의 탄환이나 다름없겠다만….”
청이 고집을 부리고 도겸이 고민하는 동안 기어이 멀리서 해가 떠올랐다. 청의 머리칼이 검게 물들 시간이었다.
청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변했는지 굳이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는 도겸의 넋이 나간 얼굴만 보아도 답이 되었으니까.
청을 홀린 듯 바라보던 도겸이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뒤늦게나마 답했다.
“…그래. 알려 주마. 나도 검술은 아직 미숙하다만 너라면 기초만 알아도 충분하겠지. 그래도 오늘은 해가 떠 버렸으니 서둘러 돌아가 입궐 준비를 해야겠구나. 곧 파루가 칠 것이다.”
이번엔 돌아서는 도겸을 붙잡지 않고 고분고분 따랐다. 앞장서 걷던 도겸이 문득 청에게 말했다.
“나는 네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먼저 집에 가 있어도 좋다. 소복 차림이지 않느냐.”
“뭐 어때. 이렇게 다니는 사람 많던데.”
“그렇다 하여도 맨발은 아니었을 터인데.”
신발을 벗은 도겸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직접 청의 발에 신겨 주려 했다.
“무엇보다 너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미 도성 안팎에 소문이 파다하니.”
“무슨 소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시전에서 지붕 위를 날아 표낭도를 잡은 일을 잊었느냐? 그때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더구나. 나조차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럼 어떡해. 그 돈주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산다고 애가 시끄럽게 우는데.”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얼결에 네가 가진 힘과 재능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비치는 효과를 누렸으니 되었어.”
그러나 버선조차 신지 않은 작은 발에 도겸의 신발이 맞을 리 없었다. 억지로 큰 신발을 신겨도 질질 끌고 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옷을 입는 것부터 거추장스러워하는 청이 고분고분 신을 리 없었다.
“발바닥이 조금 찢어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너나 신어.”
청이 아무렇게나 신을 내 버리자 도겸이 신을 신겨 주기 위해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청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