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틈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수년간 천천히 익히는 것을 번갯불에 콩 볶듯이 배우셔야 하니 충분히 혼란스러우실 듯합니다. 집 안에 어른들이 계시다면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을 터인데, 그럴 만한 경황도 없으니 특히나요.”
이전 같았다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청이 투덜대는 것을 본 남산댁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제는 불만을 표할 줄도 아시고, 아씨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런가? 청이 눈을 굴리며 제 행동을 돌이켜 보는 사이 남산댁이 재차 작게 덧붙였다.
“아니, 제법 인간다워졌다 말함이 더 맞겠지요.”
“칭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대꾸하자 그 또한 잘했다는 듯이 남산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칭찬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어떨 땐 그저 저 나무에 앉아 쉬어 가는 작은 새로 태어났더라면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아마도 앞으로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독하고 악한 동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만 해도 누군가는 죽이려 들고, 누군가는 살리려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또한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이 참으로 복잡다단한 것이겠지요.”
오늘따라 너그러운 남산댁은 어딘가 모르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샘을 바라보기 위해 열어 둔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청이 연유를 묻기도 전에 알아서 털어놓았다.
“…송구합니다, 아씨. 딱히 변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이 제가 모시던 분의 기일인지라, 아무리 평소처럼 하려 해도 자꾸 상념이 들어 수업의 진도가 더딘 듯합니다.”
“모시던 분?”
“세자 저하의 첫 번째 빈이신 혜빈 마마시지요. 장차 훌륭한 국모가 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남산댁을 보며 청은 가만 생각했다.
인간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것 같다고. 이렇게 다른 인간들을 무력하게 만들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어떻게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걷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 자리에 고여 갈피를 잃을 만큼 힘이 없던 세자의 눈빛 또한, 지금 남산댁의 것과 유사했지 않나.
“나리, 이제 오십니까!”
그때 멀리서 행랑아범이 대문을 열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남산댁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인지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에게 설명했다.
“본디 집안의 어른이 돌아오실 때엔 아랫사람들 모두가 대문으로 마중을 나갑니다. 부득이한 경우엔 따로 문안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지요.”
귀찮지만 따르지 않으면 다신 술을 빚지 않겠다 하는 통에 어쩔 수가 없었다. 청은 남산댁을 따라 규방을 나섰다.
“나리! 이게 뭐래유, 고기 사 오신 거여유?”
“그래. 넉넉하게 사 왔으니 많이 먹어야 한다.”
대문 근처로 나가니 도겸을 반기는 순이와 행랑아범이 보였다. 아이와 인사를 나누던 도겸이 남산댁과도 눈인사를 나누었다.
“수업을 하고 있었는가?”
“예. 곧 경과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청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크흠! 그럼 그,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그러나 난데없이 헛기침만 해 댄 그가 별말도 없이 성큼성큼 사랑으로 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귀가 붉게 달아오른 그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음….”
그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는 남산댁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청을 슬쩍 떠보았다.
“나리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
“그러니까 나리와 아씨 사이에….”
말을 잇던 남산댁이 이내 정색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여쭈었습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뭘 들었어야 못 들은 셈이라도 쳐 주지 않을까. 청은 눈썹을 한번 치켜떴다가 내릴 뿐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아직 오늘치 교육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돌아서는 남산댁을 따라 안채로 돌아가면서 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기는 분명 다 빼냈는데….”
덜 빠진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도겸의 심장 소리가 저렇게 평소답지 않게 내달리듯 뛰진 않을 텐데 말이다. 청은 돌아갈 길을 찾아주어야 할 도겸이 저러다 죽어 버리면 어쩌나, 잠시 사랑 쪽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안채로 돌아갔다.
길도 못 찾고 죽어 버리면, 정말이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였다.
***
문득 잠에서 깨어 샘 밖으로 올라온 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에서 나왔건만, 하늘은 아직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물 속처럼 짙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만물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각자의 방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는지라, 청은 다시 물에 들어가려 했다.
“…뭐지?”
그런데 집 안에서 저를 제외하고 느껴지는 인기척이 단 셋이었다. 넷이어야 정상이지 않나. 가만 주의를 기울여 하나씩 헤아려 본 청은 곧 어렵지 않게 도겸의 방이 비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평소엔 그가 어딜 가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는 유독 새벽녘에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다. 슬그머니 커지는 궁금증을 이겨 내지 못하고 샘에서 나와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나한테는 혼자 나다니지 말라고 뭐라고 했으면서 자긴 혼자 돌아다닌다고?”
혼자 무녀를 만나고 온 것도 겨우 이해해 줬더니, 또 어떤 오해를 키우려고 혼자 나간 걸까. 무엇보다 제 예민한 기감을 속이고 사라진 건가 싶어 그의 자취를 찾으려 들수록 괘씸한 마음만 커져 갔다.
가볍게 확인하고 다시 자러 갈 마음이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 혼몽했던 눈이 점점 선명해졌다.
“뭐야.”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겸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집을 빠져나가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야 했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면 될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워지자 오기가 생겼다. 아예 없으면 모를까, 희미한 흔적이 점차 산으로 이어져 또한 당혹스러웠다.
나무가 많은 산에 갔다가 경험한 바가 좋지 않기도 해서 조금은 꺼려지는 마음도 있었다.
“아니지.”
꺼리다니. 거리낄 것 없고 겁 없이 살아온 청이 하기엔 너무 소심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죽음에 가까워졌다 생각하니 의기소침해진 걸까.
그게 아니라 해도 나약한 최도겸이 예전에 제가 그랬듯 누군가에게 잡혀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청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나무 위로 올라 슬슬 새잎이 돋는 가지 사이로 뛰다 보니 시원하고 새벽녘 특유의 습윤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 왔다. 아직 햇볕이 들진 않았지만 밝은 기운이 스멀스멀 하늘을 잠식하는지라 사위가 밝아졌다.
드디어 최도겸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려와 달리 그는 혼자였다. 청은 기척만 죽이며 다가갔다. 웬만하면 혼자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다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마침 불어 가는 바람에 섞여 빠르게 날아가 도겸과의 거리를 좁혔다.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기척을 지우고 그를 지켜보았다. 얼마나 소리 없이 다가갔는지 이미 가지에 앉아 있던 산새들조차도 청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새들과 나란히 앉아 도겸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하!”
그는 흔들림 없는 기합을 내뱉으며 청이 질색하는 기다란 장검을 손에 쥐고 허공을 갈랐다. 상의를 탈의한 채라 움직일 때마다 굴곡진 근육이 단단하게 뭉치며 힘을 더하는 게 보였다.
“…내가 옷 찢었다고 화낼 땐 언제고.”
윗옷을 벗고 있는 도겸을 본 청이 툴툴거렸다. 가만, 그럼 어제는 역시 옷을 찢어서 화가 났던 건가?
인간이 의복을 걸치고 몸을 가리는 것부터 아직 이해하지 못한지라 청은 어제 본 도겸의 행동 역시 납득하지 못한 채였다.
기껏 독기를 빼주었더니 귀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버럭 화를 내고 도망치듯 안채를 나가 사랑에 틀어박힌 그였으니까. 그리곤 그 뒤로 시선도 안 마주치는 게 참 이상하기도 했다.
나무 위에서 청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 리 없는 도겸이 다시 한번 집중하며 칼을 휘둘렀다. 가만 지켜보던 청은 별안간 마음이 바뀌어 불쑥 도겸의 앞에 내려섰다.
“……!”
힘차게 허공을 검으로 가르던 도겸이 갑자기 나타난 청을 반으로 자르기 전에 가까스로 날을 눕혀 비껴갔다. 물론 그전에 청이 가볍게 허리를 뒤로 젖혀 피했다.
“느리잖아.”
“…….”
“그래도 뭐, 다른 녀석들보다 둔하진 않네.”
눈이 커진 도겸은 청이 무어라 하든 빤히 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의아해진 청은 그의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선 채로 얼기라도 했어? 독기는 그때 다 빼내지 않았….”
멍하니 청을 바라보던 도겸이 휘젓는 손을 덥석 붙잡았다. 차가운 체온을 느끼고 나서야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다 하다 환각이라도 보는 줄 알았지 않느냐.”
“환각?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다.”
잡은 손을 놓아준 도겸이 서둘러 한쪽 바위 위에 걸쳐 둔 저고리부터 찾아 걸쳤다.
“여기까진 어찌 온 것이냐?”
옷을 걸치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은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청의 체온만큼이나 차갑고 태도는 전과 달리 상당히 쌀쌀맞았다.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건 의식하지 않아도 뛰어난 기억력이 알려 주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최도겸이 달라질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뛰어왔는데.”
“그러니까 어찌 날 찾았냐고.”
“냄새로.”
“겨우 냄새로 거기서 여기까지 어찌…!”
“…….”
“…아니다.”
의아해하던 도겸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스스로 답을 찾은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청은 인간 최도겸이 얼마나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지 더 확인해 보고 싶었던지라 금세 옷을 입어 버리는 게 아쉬웠다.
가만 보면 며칠 전 제 분노에 중독된 것을 구해 주고 난 후로 자꾸 저를 피하고 거리를 두고 있지 않나. 배울 게 산더미라더니, 수업조차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 손상되었다고 해서 글공부까지 못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청은 고민 끝에 솔직히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죽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