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럴 줄 알았다. 홧김에 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한번 확인해 본 것이지.”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청이라는 이름에도 파랑이 들어 있다고.”
파랑은 더 이상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눈에 띄게 안도하는 도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까 뭐, 더는 심청과 나를 분리하지 않으려고.”
그러자 비로소 도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잘 생각하였다, 청아.”
나직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음성은 예민한 귀에도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날이 서 있던 청의 눈빛도 녹진하고 말랑해졌다.
“그럼 쉬거라.”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일어나려던 차, 청이 덥석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그러느…!”
돌아보기가 바쁘게 억센 힘이 도겸을 이불 위에 널브러지게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겸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 위로 올라탄 청이 어떻게 막기도 전에 도겸의 옷을 우악스럽게 잡아 벌렸다. 옷고름이 간단히 찢겨 나가고 겹겹이 입은 옷에 감춰져 있던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 지금 이게, 이게 무슨 짓이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고아한 선비는 트인 입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찌나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사내의 옷을 찢어 속살을 드러나게 한 여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도겸의 상반신을 내려다본 청이 손끝으로 가슴팍을 찍어 눌렀다. 인두로 생살을 지진들 이런 고통일까. 생경한 통증에 도겸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큭…!”
“얼었잖아.”
“얼… 다니, 그게 무슨… 네게는 뭔가 보이는 것이냐?”
그러자 청이 손끝으로 도겸의 가슴팍 위에 너른 원을 그렸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얼어 있어.”
분노에 휩싸여 얼음 창을 만들어 낸 파랑을 억지로 끌어안고 난 뒤에 생긴 병환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생채기 하나 없이 이상하게 동상이라도 걸린 듯 가슴팍이 아리고 몸에 한기가 드는 것이 예사롭진 않다 생각했는데, 아마도 청에게만 보이는 병증이었나 보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툴툴댔다.
“말했지. 너는 물고기처럼 약한 인간이라고. 내 화를 입고 죽어 가면서 왜 나한테만 쉬라고 해?”
“난 그저…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나을 거라 생각해서…!”
“용의 분노는 독이야. 시간이 지나 봤자 퍼지기만 하지, 낫진 않는다고. 이대로 혼자 멍청하게 견뎠다간 꼼짝없이 얼어 죽을 텐데?”
용의 분노는 독이라니… 무슨 생각으로 화가 난 청을 덥석 끌어안은 것일까.
돌이켜 보아도 생각보다 몸이 앞섰던 자신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도겸은 앞으로 웬만하면 눈앞의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럼 어찌하면 되겠느냐?”
죽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그 독의 주인이 이 상황을 모른 척하지 않고 먼저 알아봐 주고, 심각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독해야지. 시원찮긴 해도 넌 내 소유고,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소유라니…!”
곧장 따지려 했지만 도겸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몸을 숙인 청이 느닷없이 입을 맞춰 온 탓이었다.
***
“어르신, 접니다.”
어둠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촛불의 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는 방 앞에 서서 아뢰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뾰족뾰족한 산봉우리의 모양을 겹겹이 3층으로 이어붙인 정자관을 쓴 누군가의 그림자가 답하였다.
“그래. 들어오너라.”
사내는 소리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느라 난 경첩 소리가 아니었다면 누군가 출입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복면을 쓴 사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서안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조익환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주에서는 무어 건진 것이 있더냐?”
“말씀하신 대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호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는지 조익환이 홀로 바둑을 두던 것도 멈추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무엇이더냐?”
“근방을 돌아다니며 탐문하였는데, 듣기로는 해주 목사 심오균의 집에서 얼마 전 초상이 났었다 합니다.”
“초상이 났다?”
조익환이 잘 정리된 수염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흠, 심오균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심오균이나 그의 처가 죽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의 딸이 죽어서 장사를 치렀다 하였습니다.”
“심 목사에게 딸이 여럿 있었던가?”
“아니요. 제가 알아본 바로 심오균의 자식은 무남독녀 외동딸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허?”
조익환이 서안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와중에도 심복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딸의 이름이?”
“심청이었습니다.”
“…무어라?”
“한데 더 이상한 것은, 그 장례에 쓰인 관 안에 죽은 이의 시신이 없었다는 겁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그 고을의 사람들 대부분이 공공연히 떠들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종놈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였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냥 기가 찼는지 조익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또 있을꼬. 그러면 지금 최 직각의 집에서 머물며 간택을 준비하는 심청이란 계집은 누구란 말이냐.”
“해주에서는 거기까지 정보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현재 한양에 있는 심청이라는 여인과 심오균의 딸이 상당히 다른 외양을 갖고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을 사람들이 묘사하는 심청은 한양에서 소문난 절색이라 불리는 심청과 달리 도리어 박색에 가까웠다 하니 말입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해주로 심복을 보낸 조익환은 예상 밖의 성과에 크게 기꺼워하며 치하했다.
“고생했으니 가서 쉬어라.”
서안에서 묵직한 염낭 하나를 꺼내어 던져 주자 심복이 공손히 받아 챙겼다.
“감사합니다.”
들어올 때처럼 심복은 나갈 때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덕분에 조익환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데에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흠… 뭔가 아귀가 맞질 않는군.”
서안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졌다. 조익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오균 그자가 중앙에 진출하고자 할 정도로 야망이 크다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지. 해주로 갈 때도 자처해서 가지 않았나. 그런 자가 야반도주한 딸을 보란 듯이 죽은 셈 쳐 놓고도 갑자기 수양딸을 구해 간택 단자를 넣는다?”
인과가 맞지 않았다. 하물며 바둑도 앞뒤가 맞아야 하지 않나. 조익환이 하얀 바둑알을 몇 개 짚어 서안 위에 흩뿌린 뒤 바둑을 두듯 하나씩 일렬로 줄지어 세웠다.
“심오균, 심청 그리고 최도겸….”
남은 하나는 최도겸과 절친한 세자 이언의 몫이었다.
“이 넷이 발칙하게 꾸미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그게 무엇인지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의 오랜 시간 계획한 간택을 방해하려는 게 분명하다.
이번엔 검은 바둑알을 있는 대로 쥔 조익환이 나란히 둔 하얀 바둑알 위에 그대로 쏟아부었다.
“그래 봤자 부질없을 터인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검은 바둑알들의 공격에 겨우 네 개뿐인 하얀 바둑알들이 버틸 리 없었다. 이리저리 튕겨 나가고 달려드는 흑돌에 파묻힐 뿐이었다.
와중에 용케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흰 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조익환은 작은 돌을 들어 안경 너머로 바라보았다.
“심청이라 하였지.”
얼마 전 저자에서 한바탕 항설을 나돌게 한 의문의 여인이기도 했다.
“지붕을 날아 표낭도를 잡은 절색이라….”
덕분에 조익환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아끼던 패를 꺼내어 비를 내려야 했고, 설아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앙갚음을 해 주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쪽의 위신이 깎인다면 복수를 한들 얻는 게 없을 것이라 때를 두고 보는 중이었다.
“흥미롭군.”
조익환은 흰 돌 하나를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리 애를 쓰며 덤빈다면 응당 이쪽은 더 철두철미하게 움직여줘야겠지.”
생각과 함께 밤도 깊어졌다.
***
“웃어른을 대할 때는 같은 말이라도 더 높여 쓴다는 것을 아시지요? 오늘은 조금 더 어려운 대화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씨보다 웃어른 여러 분을 모시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여 대하여야 할 분이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며칠 도겸은 부쩍 청에게 데면데면하게 굴며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남산댁은 예절 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청은 부쩍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대화라는 건 뜻만 통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선의 예절이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모두 머리에 넣긴 하면서도 청은 배울수록 이 땅의 인간들이 정말이지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만 들었다.
“왜 같은 뜻이 있는 말을 여러 가지로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 교육을 받을 때는 어떤 말을 하든 교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라 번거로워 그냥 말을 아꼈는데 남산댁이 청의 정체를 파악한 뒤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떤 질문을 해도 남산댁이 감안하여 답변을 주니 청으로서는 더없이 편했다.
“그야 사람 사이엔 수많은 상황이 있고, 수많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관적으로 통일된다면 배우기야 편하겠지만 사람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밥이면 밥이지 진지라고 높여 말하고 왕에겐 수라라고 한다질 않나, 죽으면 죽는 거지 왜 돌아가신다고 할까.
단순히 젊고 늙고의 차이도 아니고 신분의 차이까지 존재하는 곳이라 여간 번잡스러운 게 아니었다. 걷거나 뛰거나 앉거나 눕는 것까지 예절이 있다니 기가 찼다.
관계라고는 적과 만나 싸우는 것밖에 하지 않았던 청은 이제 이해를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인간은 참, 약하디약하고 예민하디예민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