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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9)화 (44/197)

“청이는, 방에 있느냐?”

어쩐지 도겸이 말을 걸자마자 조그만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긴장했다.

“그, 아씨 주무셔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이가 눈을 피하는 걸까. 도겸은 가볍게 순이를 떠 보았다.

“자는 게 맞는 것이냐? 하늘로 솟은 게 아니라?”

“아, 아니어유! 그, 그 가, 강정 가지구 오는 그사이에 잠들어 계셨어유. 차, 참말이어유!”

말까지 더듬는 것을 보면 아마 파랑이 순이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혔거나, 그게 아니라도 아이만의 눈치로 뭔가 알게 된 듯싶었다.

그 내용이 뭐든 비밀이라 여기고 지켜 주려는 게 아닐까. 도겸은 더 캐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저에게까지 말을 아끼는 아이가 대견하게 느껴진 이유였다.

“…너는.”

대신 그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몸을 숙이며 다시 확인했다.

“아직도 청이가 무섭지 않으냐? 네게 손찌검을 해서 기절시킨 적도 있는 데다 눈앞에서 걸레를 찢어 버리고,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표낭도까지 잡았다 하였지. 어떻게 생각하면 무서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싫다면 더는 청이를 따르지 않아도 좋다.”

“아니어유. 지는 아씨가 좋아유!”

순이가 두 손을 휘저으며 고개까지 격렬히 내저었다. 두 발을 쓸 수 있다면 발도 휘두를 것 같았다.

“지는 그저 잠깐 기절혔던 것뿐이지만, 표낭도도 그렇고 지를 때린 대감댁 몸종은 팔이 부러질 뻔했어유. 말리지 않았다면은 아마 참말로 부러졌을지도 모르구유.”

“비단 그런 이유에서 무섭지 않다는 것이냐? 남에게는 스스럼없이 무력을 행사하는 청이가 네게는 유하게 대해 줬다는, 고작 그것 하나로 동경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라면 나는 더더욱 너를 청이의 곁에 두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동경이 아닐 테니까. 도겸은 어쩌면 순이가 파랑에게 겁을 먹은 나머지 그러한 공포심을 좋아하는 마음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당장 안팎이 소란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아무리 머릿속이 복잡한들, 가족이라 큰소리쳐 놓고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무시해서야 되겠는가.

도겸은 내친김에 며칠간 중문 근처를 전전긍긍하며 파랑을 궁금해하던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짚고 넘어가고자 했다.

“청이의 곁에 두지 않는다고 하여 해주로 보낸다거나 이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네가 청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을, 내게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느냐?”

“아니어유… 지는 참말로 아씨가 좋구먼유.”

그러자 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동그란 얼굴엔 어떻게든 도겸을 설득해야겠다는 의지만 그득했다.

“아씨는… 지같이 못 배운 천것이 감히 셈을 가르쳐 드릴까 여쭈었을 때도 화를 내시기는커녕 알려 달라구 허셨어유. 책에 쓰인 이야기보다 제 하찮은 사정에 더 귀 기울여 주시기도 혔구유. 지가 진장에서 있던 일 말씀드리고 며칠 지났을 땐 그러셨어유.”

순이는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들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파랑의 평소 눈빛을 따라 한 듯했다.

“죽여 줄까? 그 낭청 놈이라는 인간.”

“…….”

“이유를 여쭈었더니 그러셨어유. ‘너를 때렸다며’라고.”

이쯤 되면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거짓인 건 아닐까. 파랑은 틈만 나면 누군가를 죽일 기회를 노리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이대로 청이를 따라다니다 험한 성정을 닮을까 싶은 걱정도 되었다.

“아씨는 어여쁘신 대신에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지만유, 엄청 똑똑허구 힘도 세셔유. 그런 분이 제 말은 한 번도 무시하신 적이 없다니께유? 사람을 신분 같은 걸루 안 나누는, 참말로 좋은 분이어유. 그리구….”

아이는 작은 손을 모은 채 우물쭈물하며 도겸의 눈치를 살폈다.

“뭣보담 아씨를 모시니께 매일매일 사는 보람이 있어유. 이 집에 와서 할 일이 생긴 것두 얼마나 좋은지 몰라유.”

“뭐?”

“나리께서는 지를 그 지옥 같은 진장서 구해 주시구 따뜻한 밥에 옷에, 방까지 내어 주신 평생의 은인이시지만유, 아씨는 이 모지란 순이도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매일매일 알게 해 주시는 분이어유. 그래서 꼭, 지가 아씨 곁에서 모시고 싶구먼유.”

도겸은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채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어리다는 이유로 되도록 집안일에서 배제시켜 온 것이 오히려 아이를 불안하게 한 원인이었을까.

어쩌면 진장에서 학대를 당하며 강제로 돈을 벌어야 했던 아이라 청이 두려운 것보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게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게 해 줄 수 있다. 청이를 모시는 일이 아니라도 일은 많으니까.”

“안 돼유!”

그럼에도 순이는 굳게 도리질쳤다.

“이젠 더 안 돼유. 꼭! 지가 모실 거여유. 지가… 해야만 혀유.”

역시 파랑의 정체를 알았구나. 도겸은 큰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사실 네가 할 일은 다른 게 아니다. 청이를 그리 극진히 모시지 않아도 돼.”

“허지만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으며 맑게 자라는 것, 그거면 된다.”

그래야 어여삐 여기는 파랑의 마음도 변하지 않을 테니. 도겸은 의아한 눈을 하는 순이에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그러다 마른기침이 쏟아졌다.

“나리, 괜찮으셔유?”

단순한 고뿔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차를 마시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도, 아무리 약을 들이켜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하지만 도겸은 굳이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놀란 아이를 다독였다.

“고뿔이 든 모양이니 너는 가서 내 방에 이부자리를 펴다오. 청이가 잘 자는지만 확인하고 돌아가 쉴 테니.”

“예! 그럴게유.”

짚신을 대충 구겨 신은 아이가 가볍게 뛰어 나갔다. 조금 전 도겸을 경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방금 전의 대화로 도겸 역시 믿을 수 있는 한편이라는 걸 알게 된 듯했다.

도겸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안 자고 있었느냐?”

그리고 엎드린 채로 강정을 깨물던 파랑과 눈이 마주쳤다.

“밖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데 어떻게 자?”

시큰둥하게 대꾸한 파랑이 과자를 오독오독 씹었다. 여전히 먹는 것에 큰 흥미가 있는 건 아닌지 손에 든 것만 먹고는 금방 소복하게 쌓인 다과 쟁반을 밀어냈다.

도겸은 파랑의 가까이에 다가가 앉았다.

“아직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은데, 다 나은 것이 아닌 게지?”

“심장에 금이 간 것 같으니 아마도.”

“…뭐?”

파랑은 너무도 굉장한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툭 내뱉는 경향이 있었다.

“숨은 쉴 수 있는 것이냐? 물에서도 회복이 안 돼?”

도겸은 당장 파랑에게 다가가 어깨를 밀어 눕히려 했다.

“일단 눕거라, 응?”

“정기가 부족해 회복도 더딘 것뿐이야. 완전히 깨지지 않는 이상은 안 죽어.”

파랑이 손끝으로 제 심장 부근을 짚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 어차피 이 반지를 빼려면 죽어야겠지만.”

“절대 네가 죽게 그냥 내버려 두려던 것이 아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도겸이 파랑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격과 관련된 이야기나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해석의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이었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없이 올려다보는 파랑을, 도겸은 차분히 안심시켰다.

“일찍부터 말해서야 너를 흥분시키기밖에 더 하겠느냐. 때로는, 모든 걸 말하기 보다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신뢰를 지키는 길이 되기에 그리한 것이었다. 한데 그러다 오해를 사서 이런 불상사가 터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와중에도 파랑은 도겸에게 날아드는 얼음 창을 직접 잡아 찔리지 않게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해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킨 건 파랑이 먼저였던지라 더 마음이 쓰였다.

“…지루해서 죽고 싶긴 했지만.”

그때 별안간 파랑이 답지 않게 화를 냈던 까닭을 나직이 밝혔다.

“호적수를 만나 끝까지 싸우다 죽는 거라면 몰라도, 이깟 반지 때문에 허무하게 죽고 싶진 않았어.”

“네 심정을 어찌 모르겠느냐. 누구라도 갑자기 그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면 억울함에 화부터 날 것이다.”

도겸은 혹시라도 파랑의 심장에 더 무리가 갈까 싶어 각별히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긋나긋하게 대했다.

“일단은 몸이 낫는 것이 우선이니 쉬거라. 당분간 가족들에게 샘을 쓰지 못하게 해 두었으니 언제든 들어가도 좋고.”

“…….”

“한데 그… 네가 심청이 아니라 파랑이라 했던 말, 기억하느냐?”

충분히 쉬게 한 뒤에 차근차근 물어도 되겠지만, 도겸은 되도록 빨리 확인해 두고 싶었다. 그의 물음에 파랑이 모른 척하지 않고 즉시 답했다.

“기억해.”

“그 말인즉슨, 앞으로는 심청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인지 확인을 하고 싶구나.”

물어놓고 답을 기다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 도겸에겐 영겁처럼 느껴졌다. 늘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하는 파랑의 성정을 알면서도, 눈앞의 여인을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여인은 역시나 도겸에게 즉각 답을 주었다.

“심청으로 살지 않으면 너를 독점할 수 없잖아.”

“…….”

다음 순간, 도겸은 까맣게 태우던 마음에 다시금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왜 갑자기 새파란 불이 타오르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네가 나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그때는 조금 흥분했을 뿐이야.”

“…그렇구나. 다행이다. 행여 그만두겠다 할까 싶어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그 전엔 네가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한 게 더 컸고.”

“걱정 마. 아무리 싫어도 나는 이미 한 약속을 깨진 않으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도겸의 얼굴에 끼어 있던 먹구름이 환하게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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