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8)화 (43/197)

“아씨!”

하필 그때 순이가 다람쥐처럼 중문을 넘어 뛰어 들어왔다.

“아씨, 괜찮으셔유? 아씨!”

숨을 고르던 파랑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아이를 밀어냈다.

“귀 아파. 떨어져.”

“귀도 아프신 거여유? 이를 우째유…. 아씨, 안색이 시방 관짝에 들어가 누우셔야 할 것 같단 말이어유!”

어이없게도 파랑은 자신의 발톱만 한 순이의 도움을 받아 대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지켜 주겠다고 한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을 두고 회복하면 괜찮아지기야 하겠다만 여기선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씨, 이제 좀 괜찮아지신 거여유? 뭐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셔유?”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만 가.”

“어떻게 그려유. 나리께서 지는 홍역 앓은 적 없다 하시면서 안채는 얼씬도 못 허게끔 하셔 가지구… 여기 좀 보셔유. 지 목이 빠지려다가 다시 들어간 것 같지 않어유? 조금 길어진 것 같은디?”

아이는 턱없는 소리나 해 대며 자꾸 파랑에게 치댔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귀찮아서 내쫓았겠지만 지금은 심장이 아프니 참기로 했다.

게다가 순이를 보고 있자니 왜 본성을 누르고 보통의 용이 아닌 특별한 용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어머니와의 기억이 더 선명해지는지 모르겠다.

파랑은 못이기는 척 순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게 곁을 내어 주는 일이라는 건 물론 알지 못했다.

“…홍역이 뭔데?”

병치레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파랑이 홍역을 알 리가 없었다.

“운이 아주아주 좋아야만 살아남는, 그런 병이지유.”

파랑이 아주 간단한 상식을 몰라도 순이는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열심히 설명했다.

“아씨가 앓으신 게 홍역이래유. 근데 그거 걸리면은 입 안에두 뭐가 나구, 또 몸에두 막 뭐가 난다구 혔는디, 아씨는 우째 잔뜩 앓으시구두 그리 백옥 같으신 거래유?”

“사람이 아니니까.”

“맞어유. 딱 사람이 아니라 꼬리 아흔아홉 개는 달린 구미호인 줄… 예?”

며칠간 하고 싶었던 말을 딱따구리처럼 딱딱 쏘아 대던 순이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방금 전에 뭐라고 허신… 참말로, 아니셔유?”

“그래. 사람 아니야. 근데 대체 구미호가 뭐길래 보는 인간들마다 나더러 그런 얘길 하는 거야?”

“아씨!”

벌떡 일어난 순이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진 채였다. 아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작은 두 손을 입가에 동그랗게 모은 다음 작게 소곤댔다.

“아씨… 혹시, 꼬리가 몇 개셔유?”

“하나.”

“히익!”

깜짝 놀란 아이가 어찌나 아연했는지 딸꾹질을 하기까지 했다.

“아, 아… 아씨, 히끅, 여기 계시지 마시구 방으로 들어가셔유!”

“왜?”

“어서유!”

가뜩이나 힘이 없어 다시 물에 들어가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순이의 재촉에 파랑은 얼결에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에 눕게 됐다.

“아씨, 잘 들으셔유.”

내린 비로 인해 주변을 기어 다니는 개미도 몇 마리 없는 와중에 순이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와중에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혹시 누가 꼬리가 몇 개냐고 물어보면은, 꼭 없다고 하셔야 돼유.”

“왜?”

“사람은 꼬리가 없으니께유!”

세자에게도 밝힌 마당에 순수한 아이에게 거짓을 묻히고 싶지 않아 밝힌 것인데, 아이가 거짓을 요구했다. 파랑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아이의 순수했던 마음이 더러워진 게 아닐까 싶어 슬그머니 화도 났다.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니 차라리 훨씬 불측한 최도겸이 가장 순수하게 놀랐던 것도 같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히끅, 안 돼유. 아씨가 사람이 아닌 게 들켜서 잡혀가시면 우째유!”

놀란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순이가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도리질 쳤다.

“혹시 그… 사람 간이 드시고 싶으시면은 지 간을 조금 떼어 드릴 테니께유… 다는 못 드리지만은… 그, 푸줏간에 가서 돼지 간 같은 걸로다가 구해 올 수도 있구유! 그러니께유….”

“…간? 내가 네 간을 왜 먹어?”

뜬금없이 간은 왜 먹는다는 걸까. 파랑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기를 흡수해. 물의 정기면 가장 좋고 간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무엇보다 그만 쉬고 싶었다. 파랑은 순이가 더 굉장한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구미호? 아니야. 꼬리가 아흔아홉 개도 아니고 간도 안 먹어. 사람이 아닌 걸 들킨다고 쉽게 잡혀갈 만큼 약하지도 않아.”

“그래두, 아프셨잖아유….”

며칠간 잠들어 있었던 게 아이가 느끼기엔 꽤 큰 충격이었던 듯싶었다. 눈물을 뚝 떨구기에 파랑이 기어이 손끝을 놀렸다.

“잘 봐.”

파랑은 순이의 얼굴에 흐른 눈물을 허공에 띄웠다. 직전까지 흐르던 눈물을 닦아 내고 앞을 보려던 순이가 눈을 끔벅였다.

“이, 이게 뭐래유?”

아이의 말간 눈은 허공에 뜬 자잘한 물방울을 향해 있었다.

“울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듣질 않으니 벌을 주어야지.”

파랑은 심장이 욱신대는 것을 꾹 참고 손가락을 놀려 아이의 눈물을 한곳으로 모았다. 눈물의 양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아이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발톱만 한 주제에 거기서 더 물을 뽑아내서야. 더 작아지고 싶어?”

“지, 지가 발톱만 해유? 이렇게 큰 발톱 보셨어유?”

성체로 변할 수만 있다면야 그 발톱으로 콱 움켜쥐고 넋이 나가도록 하늘을 빙글빙글 날아 줄 것이다.

파랑은 말없이 허공에 모은 순이의 눈물을 다시 맥없이 벌어진 아이의 입에다 쏙 집어넣었다. 얼결에 제 눈물을 다시 마신 순이가 꼴깍 삼키고는 눈을 끔벅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짜유….”

“또 울면 다음엔 얼음으로 만들어 그 눈을 찔러 주마.”

“…히끅.”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순이는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만 가.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만 축객령을 내려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결연한 얼굴로 굳게 다짐했다.

“지, 지는 이 주둥이 꾹 다물고 비밀로 할 거구먼유!”

“거짓말해 가며 더럽힐 필요 없어. 내가 그런 걸 숨겨야 할 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심장이 깨질 것같이 아파도, 정말 깨지기 직전이라도 파랑은 스스로가 강하다는 데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비로소 순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잠깐 계셔유. 지는 가서 남산댁 아주매랑 같이 만든 강정 가져올게유!”

“안 와도 괜찮다고….”

“금방 올게유!”

파랑을 두꺼운 이불 속에 가둔 순이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집어 들고 힘차게 뛰어나갔다. 어찌나 씩씩하게 뛰는지 부엌으로 쉼 없이 뛰어가는 소리가 전부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귀찮아.”

그리고 파랑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조선 땅이고 손엔 여전히 족쇄가 채워져 있었지만, 여러 사람의 걱정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

“저하.”

대문 밖으로 세자의 배웅을 나간 도겸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좌익위가 가져온 말에 오르려던 언이 돌아보았다.

“무엇이?”

짓궂은 이답게, 서운함을 농으로 꺼내놓았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도겸은 더 미안해졌다.

“…여러 가지로 송구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막역지우라고 모든 걸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고개를 들어 바라본 언은 안심하라는 듯 웃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심 낭자가 몽유병을 앓아 다행이라 여기며 멋대로 속사정을 꺼내 놓은 내가 부끄러워지는군.”

“함부로 말을 옮기는 이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미 없는 소리라는 건 아마 언도 알 것이다. 말이 퍼질까 걱정되었다면 애초에 벽을 보고서도 해선 안 된다는 걸 둘 다 알았으니까.

“한데, 심 낭자도 그렇지만 자네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예? 아….”

도겸이 창백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었나. 곤란한 일이었다.

“비를 맞아 그런 것인가?”

“그런 듯합니다.”

말에 오른 언이 대놓고 혀를 끌끌 차며 도겸에게 면박을 주었다.

“하여간에 책만 읽다 보니 몸이 약해 그런 것 아닌가. 어서 들어가 쉬게. 그리고 그… 낭자에게 보낸 약재는 자네가 달여 먹어야겠는데?”

“감사합니다.”

그걸 먹어서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겸은 넙죽 받기로 했다.

“그럼 이 몸은 전장으로 출전해야겠군.”

오랜만에 느끼는 습한 공기를 깊게 들이쉰 언이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곤 말을 호령하며 젖은 땅을 박차고 나갔다.

말발굽이 튀긴 흙탕물이 도겸의 도포를 재차 더럽혔지만 내린 비에 어깨춤을 추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차마 옷을 털어 낼 수도 없었다.

좋아야 하는데 좋아할 수도 없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도겸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나리, 들어가시지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 도겸에게 행랑아범이 걱정스레 권했다.

“아까 나리께서 아씨 깨어나셨다고 말씀하셔서 순이 고것이 냉큼 뛰어 들어가던데, 괜찮을까요?”

“걱정 말게.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미 뱉은 말을 번복할 이도 아니니까.”

순수한 아이의 마음은 오히려 파랑의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돌아선 도겸이 대문을 넘으려다 휘청했다. 입에서 차가운 날숨이 쏟아져 나왔다.

“나리!”

행랑아범이 즉각 도겸을 부축했다. 도겸은 금세 바로 서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따뜻한 차를 좀 마셔야겠네. 준비해 주게.”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한데 괜찮으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닐세. 그저 비를 맞아서 한기가 든 것이니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시면 돼.”

“그럼 방으로 모실까요?”

“옷만 갈아입으러 갈 것이니 차는 안채로 가져다주게.”

도겸은 그길로 제 방에 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안채로 향했다. 마침 순이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