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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7)화 (42/197)

그때 파랑은 단순히 생각했다.

“네 아버지는 단순히 나를 소유물로 여기고 낙인처럼 씨앗을 내 몸에 심었어. 처음엔 패배감에 서글펐지만 이제는 좋아. 네가 생겼으니까.”

왜 그 자유를 실현하는 데에 나를 이용하는 걸까, 하고.

“그 알을 깨고 나온들 이 세상은 좁아. 결국 또 한 번 알을 깨야 할 순간이 올 거란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파랑은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엄마는 네가 그런 순간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 본성에 묶여 고리타분하게만 사는 건 재미없잖아? 처음엔 나를 잃어버린 것 같고 화도 나지만 괜찮을 거야. 아니, 곧 네가 만날 새로운 것들에 빠져들 거야.”

알을 깨고 나가 바라본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으니까.

“사실 나는, 아니 이 엄마는 이미 죽음을 각오할 만큼 빠져 버렸거든.”

“…….”

수천 년 전의 기억을 꿈으로 다시 만났다. 파랑이 긴 잠에서 깬 건 그즈음이었다.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는 물속에 잠긴 채였다.

파랑은 일렁이는 제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며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돌이켰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너의 진심. 그 진심의 증명.”

그리고 다시 한껏 우울해졌다. 왜 일찍부터 죽음을 각오했었다던 어머니의 꿈을 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도 손에 자리한 반지를 노려보던 파랑은 무심코 수면 쪽을 올려다보았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샘이라면 잔잔해야 할 수면이 이리저리 이지러지고 부서지고 있었으니까.

누가 물을 쏟아붓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건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파랑은 가볍게 헤엄쳐 위로 올라갔다. 샘 밖으로 스르륵 올라가자 쏟아지는 빗줄기가 먼저 파랑을 반겼다.

파랑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물방울들을 느끼다 문득 손을 내밀어 보았다. 정말 비였다.

그럼 그 죽은 노인이 원하던 소원은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그게 전부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물 밖으로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아 그저 머리와 손만 내놓고 비를 맞고 있던 차, 빗소리를 뚫고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합니다. 저하께서는 이 일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조익환이 이런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

안채 처마 아래에 서 있는 두 남자를 제외한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랑은 괘씸한 최도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물속으로 숨을까 고민했다.

“하면 지금 심 낭자는 방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저 샘물 속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세자가 샘을 가리켰고, 이내 머리만 내밀고 있던 파랑과 눈이 마주쳤다.

“으, 으아악!”

깜짝 놀란 세자가 뒤로 물러나다 대청 끄트머리에 걸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파랑아!”

도겸은 깨어난 파랑을 발견하곤 바로 샘으로 뛰어 내려왔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온 탓에 그의 도포 자락이 금세 흠뻑 젖어 들었다.

“괜찮은 것이냐? 네 심장이 뛰질 않아 죽은 줄 알고 나는…!”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걱정이 많았겠네.”

청은 도겸의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샘을 빠져나왔다.

“네가 아끼는 세자나 일으켜 줘.”

“…….”

핀잔을 들은 도겸이 그제야 대청 쪽을 살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언은 여전히 파랑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직전까지만 해도 샘 근처엔 아무도 없었는데…?”

“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 맞네. 샘에 있다 들어놓고도 순간 깜빡했지 뭔가.”

면역이 되어 더 이상 얼빠진 세자처럼 놀라지 않는 도겸이 파랑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보다시피 비가 내린 일로 더는 너를 숨길 수가 없게 되어 저하를 이곳으로 모셔와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네가 언제 깨어날지 몰라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하였구나.”

숨길 수 없게 되었다면 어쨌든 존대를 하며 높일 필요도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무엇보다 파랑은 심청이 되는 것에 장단 맞추기 싫어진 참이므로 예를 지켜야 하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판단했다.

“비가 내리는 거랑 나를 밝히는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

“본디 사람은 마음대로 비를 부를 수 없거늘, 오늘 누군가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비를 내렸으니 말이다. 더는 우리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

“비를… 내렸다고?”

당연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비를 내린다면 그건 당연히 제가 될 줄 알았으니까. 적잖이 위기감도 느꼈다.

저는 기껏해야 얼음 창을 여러 개 만들어 낸 걸로 죽을 뻔했는데 비를 내릴 만큼 강한 존재라니, 파랑은 태어나 처음으로 패배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비를 내렸어?”

“네가 장터에서 만났던 조설아의 아버지, 조익환.”

그즈음 대지를 두드리며 적시던 빗줄기가 점차 가늘어졌다.

“무더기비인 줄 알았는데 그저 소나기인 건가.”

처마 밖으로 손을 내민 세자가 짧게 내리고 멎는 비를 아쉬워했다.

“비가 내린 지는 얼마나 된 거야?”

“한 식경 정도 된 듯하구나. 비가 내리는 걸 보자마자 이곳으로 돌아와 저하께 사실을 고하였으니.”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파랑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비가 내리는 범위를 확인했을 것이다. 파랑은 당장 젖은 지붕 위로 올랐다.

그 가벼운 몸놀림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면서도 세자가 기어코 다시 한번 기함했다.

“…지붕 위를 날아 표낭도를 잡았다던 소문이 낭설은 아니었나 보군.”

세자가 대경하여 기절을 하든 말든, 파랑은 사방을 둘러보며 재차 물었다.

“비가 내린 범위는?”

“그야 땅이 어디까지 젖었는지 확인해 보면 될 듯한데.”

아무래도 인력이 필요한 문제라 도겸이 고민하고 있을 때 세자가 선뜻 나섰다.

“그, 중요한 문제라면 익위사들을 보내어 범위를 확인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당장 조익환이 비가 부른 장소를 중심으로 그 범위를 확인하게 해야 돼. 땅이 말라 버리면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저 되바라진 행동은 몽유병이 도져서가 아니라 그저 본래의 모습이라는 게지?”

“시간 없어, 빨리!”

“그래. 바로 명하면 되지 않느냐.”

황당해할 틈도 주지 않고 재촉하는 되바라진 용 때문에 세자가 곧바로 중문 밖에서 대기하던 좌익위를 불러 명령했다. 와중에 도겸이 파랑에게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냐?”

“비를 부른 게 사실이라면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해 봐야 하니까.”

구름의 방향을 확인한 파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자연스러운 모양이나 움직임은 아니었다.

당장 머리 위의 하늘에만 동그랗게 먹구름이 있는 데다 조금 떨어진 곳은 멀쩡히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근데, 비가 내리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작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으니까.”

“비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더 일찍 내렸어야지, 왜 굳이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렸다가 내리는 건데?”

파랑의 물음에 세자와 도겸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야 주상전하와 저하를 향한 백성들의 원망이 가장 극심할 때, 조익환 자신을 우러러볼 수 있는 일을 벌여야 효과가 가장 좋지 않겠느냐?”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고자 하는 게, 겨우 세자빈을 올리는 거야?”

“…….”

도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건 도겸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보통은 그것을 포함해 왕실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워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려 들겠지만….”

손바닥에 모은 빗물을 바닥에 흘려보낸 언이 씁쓸하게 답했다.

“이리 노골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직접 옥새를 쥐려는 움직임일 수도 있겠군.”

도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단단해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파랑은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옥새를 쥐다니?”

“…역모. 직접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다.”

파랑은 물끄러미 도겸과 세자를 번갈아 보다 눈을 번뜩이며 제안했다.

“그냥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위험한 소리 말거라. 몸도 성치 않으면서 어찌.”

“노골적으로 나온다며. 그럼 본색을 드러낸 거 아니야?”

“그만.”

도겸과 파랑의 입씨름을 막은 언이 중재에 나섰다.

“둘 다 무엇을 생각하든 실천에 옮기지 말거라.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처마 아래로 내려온 언이 구름이 개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흐릿했던 눈빛의 초점을 바로 했다.

“오늘 일에 대해 전하께도 직접 본 바를 전하여야 하니 지금 바로 궐로 돌아가야겠군.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어떤가?”

“알겠습니다.”

“모쪼록… 오늘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군.”

언은 돌아나가려다 말고 얼빠진 표정으로 파랑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물론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이었다. 그 시선을 느낀 파랑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뭘 봐?”

“너…!”

비뚤어진 듯 행동하는 파랑을 제지하려 도겸이 나서던 차, 언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몸이 성치 않다 들었는데, 내가 도울 방법이 없겠는가?”

파랑은 가만 제 심장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아마 한두 번 더 같은 짓을 했다간 굳이 제 심장에 창을 꽂을 필요도 없이 완전히 부서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실 숨을 쉬기도 벅찼다.

“…없어.”

심장이 산산조각이 난다고 한들 인간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언이 뭔가 더 말하려던 차에 이번에야말로 도겸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저하께선 어서 돌아가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연통하겠네.”

도겸이 세자를 배웅하기 위해 안채를 나갔다. 그리고 파랑은 젖은 머리와 옷에서 물기를 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움켜쥐며 주저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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