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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6)화 (41/197)

“예?”

“그뿐인가? 나처럼 썩은 물과는 섞이기 싫다며 먼저 흘러가 버렸다네.”

“대체 누가 저하께 그리 불경한 소릴 한답니까.”

물을 마시려던 언이 도겸을 흘겨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어떤 녀석의 누이이기에 감히 국본에게 그런 되바라진 소리를 하는지, 원.”

“…….”

면목이 없어진 도겸은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그때 사대에서 내려온 언이 평소와 다른 도겸을 살폈다.

“근데 자네 오늘따라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며칠 잠을 좀 설쳐서 그런 듯합니다.”

“심 낭자가 심한 고뿔로 자리보전을 면치 못한다더니, 자네가 직접 간호라도 하는 겐가?”

“아… 예.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한데 그럴 만도 하지 않나. 얇은 소복 차림으로 밤에 그리 돌아다니는데 몸이 상하지 않고 배기겠냔 말이야.”

“다 제 탓이지요.”

“그래. 자네 탓이야.”

단호하게 도겸을 질책한 언이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집으로 좋은 약재를 보낼 테니 누이에게 탕약으로 지어 먹이게. 봄에 오는 고뿔이 더 독한 법인데 빨리 이겨 내야 하지 않겠나.”

뜨거운 것은 입에 대지도 않던 여인인지라 쓰고 독한 데다 펄펄 김까지 나는 약을 과연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도겸은 잠자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네도 어서 들어가 쉬고.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어.”

“예.”

묵은 숨을 내 버리기라도 하며 커다란 숨을 내쉰 언이 기지개를 켜며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우수인데 녹을 눈이 없어 그런가, 하늘도 맑기만 하네.”

겨우내 내린 눈조차 얼마 되질 않다 보니 하늘을 바라보는 언의 얼굴에 드리워진 걱정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도겸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려다, 문득 살을 에는 통증을 느끼고 언이 못 보는 사이에 가슴께를 짚었다.

함께 활터를 나오는데 언의 익위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아뢰었다.

“저하, 지금 바로 북촌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

“북촌? 북촌엔 왜.”

“그것이….”

곁에 있는 이가 도겸임을 확인한 익위사가 난처한 얼굴로 고하였다.

“좌상이 지금 북촌 집 앞마당에다 거하게 판을 깔고 비를 부르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합니다.”

“…뭐?”

다소 황당한 소식에 세자는 물론 도겸까지 어리둥절해졌다.

“비를 부르는 의식이라니?”

되묻는 순간 직전까지 맑기만 했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

고위 관료들이 주로 기거하는지라 거대한 기와집들이 늘어선 북촌은 평소와 달리 초입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언과 도겸은 운종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분위기에 조금은 넋이 나간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촌이 이리 시끄러운 곳이었던가?”

“오늘은 유난히 소란스럽군요.”

“좌상대감이 대문을 활짝 열고 잔치 음식과 곡식을 나누어 준다 하니 이리 몰리는 것입니다.”

익위사가 소란의 이유를 설명했다. 최고 품계의 정승이 나서서 어려운 시국에 백성을 돕는 것이라면 표면적으로는 상을 내려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우러러볼 만한 일이었다.

“솔선수범하는 것인가.”

“확실히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법이긴 합니다.”

익위사를 대동한 언과 그의 곁에 선 도겸은 인파를 헤치고 간신히 조익환의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음식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인지라 문이 활짝 열려있어도 사람으로 꽉 막힌 채였다. 담벼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은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는 듯 했다.

“이쪽입니다!”

익위사들이 간신히 길을 터 세자가 먼저, 그리고 도겸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너른 마당은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는 음식 냄새며 오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겸은 무심코 파랑이라면 질색하며 근처에도 안 왔으리라 생각했다.

“모든 백성들이 간곡히 청하나이다!”

당장 성대한 국혼이 벌어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화려한 꽃과 천막으로 장식된 제단 위엔 하얀 옷을 차려입고 관을 쓴 조익환이 서 있었다.

그가 하늘을 향해 간곡히 외치며 선창하면 바닥에 엎드린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를 올렸다. 다소 어수선한 대문 근처와 달리 한창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들만 두고 보면 제법 엄숙하기까지 했다.

“좌상이 언제 도교에 귀의했단 말인가….”

세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서조차 은밀히 지내는 기우제를 이렇게 함부로 벌여도 되는 것인가. 대체 조익환이 무슨 생각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되든 안 되든 한바탕 큰 사건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럼 나도 이렇게까지 놀랍진 않을 걸세. 지금쯤 소식을 접하셨을 전하께서도 까무러치고 계실 듯한데.”

잊을만하면 통증이 올라오고 오한이 들었다. 욱신대는 몸을 붙잡은 도겸은 그럼에도 부지런히 조익환이 벌인 일을 두고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설령 비를 내리지 못한들 조익환은 근방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그들의 간곡함을 함께 하늘에 전하려 했기에 적지 않은 명망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자칫 몰려든 백성들 때문에 크고 작게 벌어질 사고에 대해서라든지, 갑작스레 일을 벌일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기에 적잖은 책임도 따를 터.

왜일까. 왕에게 간언하거나 주변 대신들과 함께하여 더 크고 효율적으로 백성들을 구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많았다.

그럼에도 굳이 독단적이고 갑작스럽게, 또한 번거롭게 벌인 데엔 아마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도겸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결이 같지 않습니까.”

“어떤?”

“연이어 벌어졌던 자살 사건과 말입니다.”

순간 미소가 그친 언과 도겸의 심오한 시선이 부딪쳤다.

“설령 비를 내리지 못하더라도 조익환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클 겁니다.”

“…거기엔 주상 전하를 향해야 마땅한 백성들의 충심도 있겠군.”

“한데, 하늘이 이리 갑작스레 어두워지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는데.”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면 조익환도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도겸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직접 겪어 본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디 조익환이 인망을 얻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비가 내려 백성들이 무사히 농사를 지을 수 있기를 그토록 바라왔으면서 이 순간엔 조익환의 뜻대로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과연 맞는 것인가. 심신이 괴로워졌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사람 일이야 어떻게든 꾸며 낸다지만, 이건 대체 무슨 조화냔 말이야.”

물론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언에게는 그저 황당무계한 사건이겠지만.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제단 위에 선 조익환은 간절히 하늘을 우러러 비를 부르기 바빴다.

“하늘이시여!”

하얀 옷깃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를 추앙하기라도 하듯 모인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인 양 조익환을 따라 외쳤다. 자세히 살피면 따라 할 수밖에 없도록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듯한 자들도 여럿 보였다.

“하늘이시여!”

이런저런 각고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 남녀노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내지르며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광경이 그려졌다.

인간들이 함께 만들어 낸 외침은 마치 땅에서 일어난 우레와도 같았다.

“…비다!”

그리고 결국 하늘이 응답했다.

“비야! 비가 내린다!”

정성 들여 기도를 올리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손바닥에 담으며 환호했다. 분명 함께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세자와 도겸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저하.”

“듣고 있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이 눈에 훤히 그려진 탓이었다.

***

꿈을 꾸었다. 그래 봤자 알 속에 있을 때라 본 것이라곤 암흑뿐이었지만, 그때 파랑은 참 많은 것을 들었다. 알 속에서만 500년이었으니 만물이 피고 지는 소리는 거의 다 들으며 천천히 성장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시야가 차단되어 있었기에 더 선명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부수고 나올 알이 얼마나 예쁜지 아니?”

그리고 어머니는 긴 시간을 기다리며 알 속의 파랑에게 자주 말을 걸어왔다.

“얼마나 예쁜 아이가 나오려고 알마저도 이렇게 어여쁠까.”

그래 봤자 부수고 나가면 그만인 알인데.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말은 할 수 없던 파랑은 그때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너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 줄까. 그걸 고민하는 게 요즘 이 엄마의 가장 큰 즐거움이란다.”

용은 평생 홀로 지낸다. 가족의 개념이 없기에 당연히 부모의 존재도 알지 못하며 이름도 필요해질 때가 되어서야 스스로 짓는다.

그런 본성은 타고나는 것인지라 파랑은 늘 제 알을 두고 조잘대는 어머니의 존재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혹시 듣고 있다면 아마 이런 엄마가 이상하겠지. 아니, 엄마가 있다는 것부터 이상할 거야. 당연해. 알은 용의 본성 그 자체니까.”

잠자기도 바쁜 파랑에게 어머니는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엄마는 바람을 다루는 용이란다. 어디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어서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몰라.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난 정말, 자유로운 게 맞을까? 이런 힘을 갖고도 왜 갇힌 기분이 드는 걸까?”

이 알도 답답한데 나가도 답답하다는 소리일까. 파랑은 알을 깨고 나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바람이나 다름없는데, 본성에 묶여 이대로 머무른다면 더 이상 바람이 아닌 거잖아. 그래서 정말 자유로워져 보기로 했어. 내가 갖고 있던 당연한 본성들로부터. 그 시작은 너와 가족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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