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거라. 무녀들이 한 번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면 백일은 족히 걸린다 하니 설령 시기가 안 맞아 한 번 엇갈린다 한들 두 번은 엇갈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미 이 각각의 장소들로 확인할 사람을 보냈고 그 외에도 무녀들이 있을 만한 곳들로 간추려 찾아보게끔 해 두었으니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아무리 청이라지만 이쯤 되니 조금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겸에게 불평하며 불만을 품은 게 무색해질 만큼 그는 차곡차곡 홀로 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네가 청룡의 신물을 갖게 된다면 반지를 빼내지 못 한다 하여도 그리 힘들게 피를 쏟지 않고 편하게 힘을 쓸 수 있을 듯한데….”
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도겸이 이미 수백, 수천 번은 살폈을 기록들을 다시금 살피며 고민했다.
“어쨌든 뭔가 확실해졌을 때 이야기해 주려던 것인데, 널 조급하게 한 모양이구나.”
“앞으로는.”
청은 도겸을 뚱하게 올려다보며 요구했다.
“뭐든 미루지 말고 미리 얘기해. 서로 모르고 따로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잖아.”
“나도 그리 생각하였다. 워낙 남은 기록이 적어 다른 건 없나 아무렇게나 긁어모으다 보니 헛된 정보라도 섞일까 싶어 또 거르고 걸러 제대로 된 것만 전하려 한 것인데, 아무리 대화를 하여도 부족하구나.”
그래도 오해를 풀어 후련한지 도겸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평소와 같이 온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청은 아직 남은 의문이 많았다.
“넌 왜 그 무녀를 혼자 만나러 간 거야?”
“일부러 네게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퇴궐하는 길에 확인차 들러 보고 맞으면 집으로 가 너를 데려오려 하였지.”
도겸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명료한 정신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짧다며 차라리 그사이에 궁금한 것을 모두 물어보라 하더구나. 게다가 그 무녀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알고 있었어.”
“그거보다 다른 이야기는 안 해?”
청은 덥석 도겸의 옷깃을 찢을 듯이 붙잡았다. 도겸은 흠칫 놀라면서도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잠자코 청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힘을 빼도록 했다.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불의 소원.”
청이 드물게 조바심을 드러내서인지 도겸이 당황했다.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불의… 소원?”
“그래. 그게 대체 뭐래?”
“그, 이야기해 줄 테니 과히 힘을 쓰지 말거라.”
“뭐냐고.”
옷깃을 파고드는 청의 낮은 체온을 느낀 도겸이 미간을 좁히면서도 어쩐지 말을 아꼈다.
“기실 그것은 소원보다 소원을 들어주는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 크다더구나.”
“내가 감당할 몫?”
비를 내려 주면 되는 것 아니었나. 그러나 비를 내려 주는 건 신물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부탁받은 일이었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게 조건이라 생각했는데.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너의 진심. 그 진심의 증명.”
“뭐?”
도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납득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머리에 넣은 청은 혹시 몰라 다시 확인했다.
“내가 원해서 낀 반지도 아닌데 이걸 빼내기 위해 나는 없는 마음을 만들고 그걸 증명까지 해야 한다고?”
“…그래.”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데?”
청의 음산한 물음에 도겸이 답하기를 꺼려 했다.
“이건… 그, 내가 좀 더 알아본 후에 이야기하면 안 되겠느냐?”
“말해.”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청이 도겸에게 바짝 다가가자 그가 조금씩 물러났다.
“나한테 먼저 말하고 더 알아보든가 말든가 하라고.”
병풍이 서 있는 벽까지 밀려간 도겸이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너의 희생.”
“나의 희생? 죽으라는 거야?”
“…….”
도겸의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청은 저도 모르게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잘라내 억지로 반지를 빼내려다 심장이 깨질 뻔한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억지로 빼내도 죽고 절로 빠지게 하려면 또한 죽어야 하니 청은 죽음 말고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말이 돼?”
삽시간에 촛불이 꺼지고 방 안에 희뿌연 안개가 꼈다. 피부에 닿는 마른 한기에 놀란 도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청을 붙잡았다.
“청아, 진정하여라. 응?”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
청의 주변으로 응집된 안개가 날카로운 얼음 창이 얼어붙기까지 했다. 하얀 얼굴에 코피가 흐르고 벌써부터 쥐어짠 심장에 무리가 왔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청아, 안 된다!”
도겸이 청의 손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청은 이미 처음 주합루 앞 부용지에서 만났을 때처럼 칼같이 차갑기만 했다.
“그냥 죽는 게 나아.”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도겸을 향했던 얼음 창이 이번엔 청의 등 뒤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심장을 향한 채였다.
“그런 소리 마라!”
평소보다 낮아진 청의 몸은 얼음 그 자체나 다름없어졌지만 도겸은 청을 말리기 위해 애썼다.
“길은 있다. 반드시 있어. 내가 길을 찾아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진정해. 진정해, 청아!”
“난 심청이 아니야!”
폭주하기 시작한 청, 아니 파랑의 분노는 쉽사리 수그러들 줄 몰랐다. 작은 손이 잘게 떨리고 하얀 피부며 파란 머리칼엔 하얀 서리가 얼어붙을 정도였다. 안개가 모여 생겨난 얼음 창은 더 많아졌다. 기어이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안 돼!”
도겸이 다급하게 작은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마치 얼음덩어리를 품에 안은 듯했다. 파랑이 도겸의 옷깃을 피로 적시며 중얼거렸다.
“넌…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말하지 않으려 한 거지.”
“감정적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다. 이대로 죽는 게 더 치욕스럽고 억울하지 않겠냔 말이다!”
“내게 있어 더 큰 치욕은.”
파랑의 얼어붙은 마음은 도겸의 체온마저 차갑게 식혔다.
“이곳에서 나로 살지 못한 모든 순간이야.”
“……!”
도겸이 파랑을 품에 안은 채 몸을 틀어 돌리자마자 허공에 떠 있던 많은 얼음 창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병풍이 찢기고 백자가 깨졌다. 창호가 찢어지고 창살이 부러진 창과 문은 넝마가 되어 방 안은 어느새 엄동설한의 전쟁터와도 같았다.
“아니… 된다.”
한바탕 난장판이 된 방 안이 잠잠해질 때까지 너른 등으로 파랑을 보호하던 도겸이 느릿하게 품 안의 여인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파랑이 물처럼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터라 그도 함께 무너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청, 파랑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파랑의 손엔 자결을 위해 본인의 심장을 노리느라 도겸의 등까지 함께 겨누었던 얼음 창이 쥐어져 있었다.
“이런 순간에마저 나를 해하지 않으려 하면서 어찌….”
그마저도 한차례 파삭하는 파열음과 함께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모래 같은 얼음 조각들은 온돌 바닥에 금세 녹아 물이 되었고 다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온전히 파랑의 힘으로 얼린 창들은 상흔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파랑아… 파랑아!”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파랑의 의식 또한 멀리 날아가 버린 뒤였다.
***
활터의 사대에 선 언이 80간(145미터)이 떨어져 잘 보이지도 않는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었다.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행해지는 대사례(大射禮)를 앞두고 미리 활쏘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임금이 직접 성균관에 행차하여 활을 쏘는 행사인 만큼 문무백관들이 모두 참석하는 큰 자리인지라 도성 안팎의 활터엔 연일 급박하게 활 연습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기도 했다.
“내의원에 빈궁에게 처방했던 화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양귀비는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더군.”
“지난번 신 상궁에게서 들으신 것은 없었습니까?”
“신 상궁도 전혀 본 것이 없다 하였지. 하기야, 탕약을 지어 올리는 것을 내가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의심할 구석도 없지 않겠나.”
이내 팽팽하게 당긴 화살이 매서운 소리와 함께 공기를 가르고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멀리 과녁 옆을 지키고 있던 군관이 누런 빛깔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위쪽으로 맞았다는 의미였다.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 내관이 화살을 건네며 조심스레 격려했다.
“바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번 활은 조금 낮추어 쏘심이 어떠하옵니까, 저하.”
“유념하겠네.”
다시금 먼 과녁을 향해 집중하던 언이 뒤에 서 있던 도겸에게 재차 권했다.
“자네는 어째 대사례 준비에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연습은 안 하나?”
다른 때보다 파리한 안색의 도겸은 그저 옅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겸예문(兼藝文, 문신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까지 노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러다 시사(侍射, 임금을 모시고 활을 쏘는 벼슬아치)로 뽑혔다간 백관들 앞에서 망신살만 뻗칠 텐데.”
“차라리 인간미가 있다 하겠지요.”
그깟 망신 한번 당하는 게 뭐 얼마나 대수겠는가. 작금의 도겸에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허?”
화살을 시위에 걸던 언이 기가 찬 듯 웃었다.
“자네, 언제 그리 거만해진 것인가?”
사실 도겸은 활을 들 힘도 없었다. 머릿속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파랑에 대한 걱정뿐이었으며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니까.
그의 신경은 방을 초토화시켜 놓고 벌써 닷새째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여인에게 가 있었다.
“그러는 저하께선 어찌 그리 겸손해지신 겁니까.”
도겸은 평소와 달리 활쏘기 성적이 좋지 못한 언을 지적했다.
“아니면 심중에 자리한 어지러움이 저하의 화살을 흔드는 것입니까?”
“평소엔 잘 참아지다가도….”
오기로 활을 잡고 있었는지 결국 언이 포기하며 돌아섰다. 유 내관이 활을 받아 들고 물그릇을 건넸다.
“그 아이의 기일이 다가오면 좀처럼 무력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때마다 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도겸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한데 누가 그러더군. 과거에 묶여 그 자리에 고여 있기만 해서는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