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살펴 가십시오.”
“늦은 밤에 갑자기 들이닥쳐 놀라게 했네. 그럼 대문 앞까지만 가세, 신 상궁.”
“예, 가시지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으나 남산댁은 전혀 부족함 없는 태도로 세자를 모셨다. 마치 궁인 시절의 모습을 덧씌운 듯 철두철미했다.
세자를 따라 우르르 찾아왔던 이들이 다시 우르르 문 밖으로 사라진 뒤, 홀로 남은 도겸의 시선이 안채를 향했다.
다소 화가 난 걸음은 성큼성큼 급하기만 했다.
***
멍하니 누워 있던 청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멀리서부터 도겸이 평소와 달리 거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으니까.
더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안채 마당에 들어선 그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 막 문고리를 잡기 직전, 청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너…!”
그러나 도겸은 예상이라도 했는지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겨우 네 걱정을 덜까 하던 차에 어찌 혼자, 그것도 이 밤에 함부로 밖엘 나다닌단 말이야!”
“걱정이 아니라 의심은 아니고?”
기껏 몰래 나갔건만 얻은 수확도 없는 마당에 지나치게 자상한 세자로 인해 도겸에게 들키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상한 기분이 더 상해 버린 청은 사춘기 아이처럼 토를 달았다.
“내가 네 믿음을 깼다고 바로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어렵고,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아니까. 아무리 너라도 약에 당해 다친 것을 봤으니까!”
“…….”
그럴 시간에 차라리 살아남은 인간을 더 걱정하라 대꾸하려던 청은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약한 취급을 당해 자존심이 상해야 했다. 그래서 화가 나야 하는데 어쩐지 화가 나질 않는 것이다.
“어디 상한 곳은 없느냐?”
“…없어.”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믿는다. 제대로 서 보거라.”
청의 어깨를 덥석 잡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는 기어이 칼자국이 난 옷고름을 발견하기까지 했다.
옷고름을 당겨 풀어낼 듯 손가락에 감아올린 도겸이 청의 낮은 체온보다 더 냉정하게 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들을 필요가 있겠구나.”
“말 못 해.”
“어째서.”
“나더러 몽유병 환자라며.”
그 말을 하고 나서야 화마처럼 넘실대던 도겸의 분노에 제동이 걸렸다.
“…뭐?”
“들어 보니 기억을 못 하는 병인 것 같던데, 그럼 밖에서 세자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너는 몰라야 하는 거 아니야?”
허를 찔리기라도 했는지 말문이 막힌 도겸이 이내 끓어오른 숨을 길게 내뱉었다.
“네 정체는 최대한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한 것이다. 저하께서 네 정체를 알고 계시다 행여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그분은 기꺼이 내 편에 서서 전부 다 알고 있었노라, 모든 걸 짊어질 분이라는 사실을 내가 잘 아니까. 저하께서는 상황을 꾸며 거짓을 고하는 걸 어려워하는 분이니 더더욱 그런 선택을 하시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일은 철저히 내 단독 행동이라는 뜻이다. 저하는 장차 전하의 뒤를 이어 이 땅, 조선을 다스릴 세자이시니 그 어떤 불똥도 튀어선 안 돼. 고로 저하께는 송구한 일이지만 일이 그르친다면 이 일에 있어서는 저하께서도 완전한 피해자여야만 해.”
청은 언뜻 도겸이 무얼 각오하고 이런 일을 벌이는지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제가 돌아갈 길을 찾아 사라져 버리면 저 남자는 홀로 그 후폭풍을 감당하겠노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하와는 다르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도 내색하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 말하여라.”
도겸이 재차 청의 옷고름을 들어 보였다.
“어떤 놈이 감히 네 옷고름에 칼자국을 내었느냐?”
이 부분은 세자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청은 별수 없이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기로 했다.
“세자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양귀비를 쓰는 녀석들 소굴로 들어갔던 것 같아. 미리 따르는 인간들을 배치해 두고 당하는 척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상황을 전부 읽어 내지 못하고 성급하게 구했고.”
세자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해 가며 수사에 매진하고 있음을 안 도겸이 화가 난 듯, 혹은 기가 찬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놈들 중 하나가 이리했다는 거고?”
부정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게 덤벼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한들 멀쩡하진 못하였을 텐데.”
“여기저기 한두 군데씩 부러트려 놨고, 세자를 따르는 인간들이 데려갔어. 뭐… 형신이라는 걸 한다던데.”
“너는 저하께서 위험에 처하신 줄 알고 나섰다는 것이냐?”
“세자가 죽으면 난 세자한테 목숨 걸고 있던 널 잃을 테니까.”
순간 청을 내려다보고 있던 도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 꼭 그렇지는….”
“서로를 독점하자면서 내가 널 제대로 써먹을 틈도 안 주잖아. 그래서 네가 목숨 거는 세자가 그냥 죽어 버리게 둘까 싶었는데.”
“…….”
“그럼 너는 네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내가 돌아갈 길도 요원해지는 거니까.”
설명하고 보니 투덜대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와 상호 간에 협력하고, 또 무리지어 사는 게 처음인 청은 참는 게 뭔지도 모르기에 담아 두는 법이 없었다.
“그럼 네가 간밤에 홀로 나간 것도, 길을 찾기 위함이었나?”
“그래. 근데 그 무당도 죽어버려서….”
“내게 잔뜩 서운해하는 것치고는.”
살짝 풀어진 옷고름을 단단히 매어 준 도겸이 청의 말허리를 잘랐다.
“기대가 너무 없던 것 아니냐?”
“그거야 인간에겐 시간이 한정적인데 너는 며칠간 세자를 위해서만 움직였으니까.”
“그 무당은 죽기 전에 내가 만났으니 걱정 말거라.”
“뭐?”
도겸이 피곤한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돌아섰다.
“따라오너라.”
“어디 가는데?”
“이번엔 내가 서운할 차례인 듯하니 말이다.”
도겸이 향한 곳은 그의 방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정돈된 방 안의 어질러진 곳이라곤 이불을 급하게 걷어 낸 이부자리뿐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도겸은 이불을 아무렇게나 접어 밀어내고 그 뒤에 있던 병풍을 길게 펼쳤다. 누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랄까 봐 병풍엔 쌓인 책들이며 문방사우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청이 방에 들어가 물 주전자부터 동내는 동안 도겸은 병풍의 측면에 달린 걸쇠를 푼 뒤 하나의 병풍을 둘로 나누어 넓게 펼쳤다.
그리고 초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그 광경을 지켜본 청의 눈이 약간 커졌다.
숨겨져 있던 병풍의 이면엔 도겸이 직접 적어 붙여 놓은 글로 어지럽게 채워져 있었다.
“약속하지 않았더냐.”
초를 밝힌 도겸이 긴 붓을 하나 꺼내어 한쪽을 가리켰다.
“여긴 내가 궐에 있는 기록들을 뒤져 찾아낸 성수청과 소격서의 흔적이다. 짧긴 하지만 신물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필사해 왔지.”
“신물?”
벌떡 일어난 청이 병풍으로 다가가 글을 읽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는 글자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더듬거리며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도겸이 나직이 말했다.
“천자문만 익혀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네가 어느 정도 글을 익히면 보여 주려 한 것이고. 그편이 훨씬 배움의 보람이 될 듯하여.”
“겨우 그런 걸로 보람을 느낄 것 같았으면 세상의 모든 문자를 익혔겠지. 빨리 설명이나 해.”
마음 급한 청이 설명을 종용했다.
도겸은 어차피 그녀가 알아보지 못할 글을 붓 끝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본래 이 땅엔 태곳적부터 전해 온 네 개의 신물이 있었다. 주작의 반지, 청룡의 목걸이, 백호의 거울, 현무의 팔찌. 이중 주작의 반지와 청룡의 목걸이로는 물과 불을 다스려 이승의 만물을 살리고, 백호의 거울과 현무의 팔찌로는 저승의 것들을 다스린다 하였지. 이 네 개의 신물이 한자리에 모여야 모든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 비로소 세상이 평화로이 안정되는 것이고.”
“…왜 ‘있었다’야? 지금은 없다고?”
“그래. 본래는 궁 안 깊은 곳에 보관했었는데 양난을 거칠 때 보관 장소를 옮기다 그만 불상사가 생긴 것이지. 산을 넘다 화적 떼를 만났으니까.”
도겸이 청의 반지 낀 손을 가볍게 잡아 들었다. 촛불에 비친 반지가 번쩍였다.
“그때 성수청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이 주작의 반지와 반쪽짜리 청룡의 목걸이를 지켜 냈다고 한다. 반지의 화기가 워낙 강하다는 걸 알기에 다스려 줄 청룡의 신물이 꼭 필요했지만 반으로 깨지는 바람에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하였고.”
“그다음은 들었어. 그 노인의 신엄마가 승천하는 용의 입에 이걸 넣었다고.”
“맞다. 그래서 수소문해 그 노인을 찾아갔었지.”
도겸의 붓 끝이 다른 기록을 가리켰다. 물론 청은 제대로 읽을 수 없어 이제 기록보다는 도겸의 입술을 보며 어서 이야기가 흘러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주작의 신물이 사라진 이후엔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이 배척되면서 성수청도 다시 도성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라지다시피 하였지. 하나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이념이든 매한가지이기에 은밀한 곳에서 왕의 지원 하에 국행제를 지내 왔다더군. 그때 쓰이는 것이 남은 반쪽짜리 청룡의 신물이라 하고.”
“은밀한 곳?”
걱정 말라는 듯 도겸이 다시 정갈한 글씨로 써 둔 기록을 가리켰다.
“이게 바로 그 성수청의 무녀들이 국행제를 치르는 위치들을 적어 둔 것이다. 궁중 발기를 전부 뒤져 찾아냈고 전대 국무가 덧붙여 치성을 드리러 가던 장소들까지 짚어 주었지.”
“뭐야. 한 곳이 아니야?”
“그야 팔도를 돌아다니며 치성을 드릴 테니까. 해마다 국행제를 치르는 곳도 다르고, 전대 국무가 아는 위치 외에도 몇 곳이 더 있을 수도 있다 하니 조금 시간은 걸리겠다만.”
“…뭐야.”
그곳이 어디든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눈을 부라린 청은 곧 크게 실망했다.
“그럼 어떻게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