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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3)화 (38/197)

“어려서 안 된다는 도겸이 녀석을 설득하고 설득해 대보름에 공부를 빼고 몰래 놀러 나간 적이 있었지. 논둑이나 밭에 불을 놓아 활활 타는 것을 구경하고, 또 수표교에서는 연날리기 대회가 한창이었는데….”

오래전을 떠올리는지 말을 잇던 언이 허공에 대고 손끝으로 크고 네모난 모양을 그렸다.

“나도 이렇게 커다란 오색연을 날렸지. 무어, 줄에 깨진 유리 가루를 먹인 연에 당해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금방 떨어져 버렸지만.”

고요한 와중에 언의 나직한 목소리만 둥둥 떠다녔다.

“근데 떨어진 연이 여염집 담장을 넘어가 버린 게지. 끈 떨어진 연을 반길 이가 누가 있겠나? 얼른 주워 나오려고 몰래 들어갔는데 연을 들고 서 있는 소녀와 마주친 게야. 대단히 화가 난 줄 알고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그 아이는 대차게도 말하더군. 연을 이따위로 만드니 끊어지는 것 아니겠냐고.”

연이 무엇이기에 날리고, 끈이 끊어지고 떨어진다는 걸까. 청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어차피 이곳 인간들의 말은 하나하나의 단어를 모두 알아서가 아니라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가만 듣기만 했다.

“나름대로 귀한 상백사(한국의 명주실)에 잘 말린 고황죽을 쓰고 오색 종이까지 붙여 정성들여 만든 것을 두고 그리 말하기에 그 자리에서 얼마나 입씨름을 하였는지 몰라. 화가 난 나머지 나는 여자애인 네가 기껏해야 풀 놀이나 공기놀이 따위나 하지, 연을 알면 얼마나 아냐고 무시했는데… 큰 실수였어. 그 아이는 내게 매년 대보름에 수표교에서 직접 연을 날려 겨루자 하였고,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나는 단 한 번도 이기질 못했으니까.”

멋쩍은 언이 혀를 차며 웃음을 터트렸다. 언뜻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아이는 무엇이든 내게 직접 보여 주며 내 과오를 스스로 반성하게 했고 또 배우게 했어. 처음 두어 번은 오기로 아득바득 연을 만들어 나갔지. 궐 안에 연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찾아가 연을 만들고 대보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그 아이를 보기 위해 대보름을 기다리게 됐어. 그러다 세자빈 간택에 올라온 그 아이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신했지. 저 여인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청이 조족등을 빤히 내려다보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언이 친절하게도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빛은 어여쁘지만 열은 싫어하는지라 고민하던 청은 도포 틈으로 하얀 손을 내밀어 받아 보았다.

제 움직임에 흔들리면서도 기름종이를 씌워 만든 동그란 조족등 속의 초는 용케도 수평을 유지했다. 청은 새삼스레 인간들은 참 잔꾀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히 한미한 가문의 여식인데다 과히 당돌하여 사내처럼 활발한 그녀를 어마마마와 할마 마마께오선 영 탐탁지 않아 하셨지. 하지만 아득바득 설득해 내 빈으로 맞이했어. 그 아이는 당의를 입고도 여전히 조신한 법을 몰랐지만 내게 궁에서의 생활은 그 아이가 입궐하기 전과 후로 나뉠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느냐?”

그런 세자의 곁엔 지금 아무도 없지 않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무리 모르는 청이라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도 없이 수척해지기 시작하더니 통 밥을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더군. 내 앞에서 처음으로 괴로워하였어. 궐에 들어온 걸 후회한다며 눈물을 보일 적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지.”

“…….”

“그러다 기어이 스스로 깨진 백자 조각으로 목을… 그었고.”

그 말과 함께 언이 걸음을 멈추었다. 서촌에 다다른 즈음이라 슬슬 청의 눈에도 주변의 정경이 익숙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몇 걸음인가를 앞서 나가다 돌아서니 세자가 어둠 속에 홀로 우두커니 고여 있었다. 청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 그의 발끝이 멈춰 선 바닥에 빛을 내어주었다.

“…그 아이와 함께 날리기로 한 연은 그 종류만 아직 수십 가지가 남았는데, 하질 못했지.”

“…….”

“이후에 맞이한 새로운 세자빈마저 목을 매고 나니 난 더는 새로운 이를 빈으로 맞이할 자신이 없어. 누구든 잃을 것 같고 어떻게든 내 곁을 떠날 것만 같아서.”

우뚝 멈춘 언은 도통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세자빈이 죽은 그때로부터 한 치도 나아오질 못했음이 분명했다.

“이런 내가, 새로운 세자빈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간 청은 조족등의 손잡이를 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결에 받아 든 언이 고개를 들었다.

“난 없어도 돼.”

붙잡아 나아가도록 이끌어 내거나 걸음을 떼어 보라 말해도 되지만 그건 결국 자의가 아니지 않나. 청은 그를 내버려 두고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도, 중심을 잡아 땅을 딛고 서는 것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아니…!”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청이 걱정되었는지 결국 언이 한달음에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대가 오늘 밤의 기억이 없는 것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꼭 알아야 할 터인데.”

“기억이 있다 해도 후회하진 않을걸.”

“…뭐?”

“그 자리에 고여 있는 물과 섞이면 아무리 흐르던 물이라 해도 똑같이 썩을 뿐이라.”

“…….”

“난 계속 흘러갈 깨끗한 물이고 싶거든.”

냉정하게 선을 그은 청은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세자를 두고 거침없이 어둠을 헤치며 나아갔다.

최도겸과 세자가 왜 친한가 했더니, 둘 다 과거에 묶인 이들이라 그리도 친했던 걸까. 질척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곳을 맴도는 태도 역시 비슷해 보였다.

청은 혀를 차며 결국 언을 따돌리고 담을 넘어 자취를 감추었다.

***

“…하여, 지금 바로 가서 심 낭자가 있는지 확인 좀 해 주면 좋겠네.”

며칠 만에 겨우 잠을 좀 자나 싶었는데, 도겸은 한 시진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야 했다. 야밤에 들이닥친 세자 때문이다.

그는 세자가 왔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시립하고 있던 남산댁에게 안채를 확인해 보라 지시했다. 어린 순이는 잠이 많아 한 번 잠에 빠져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기에 남산댁이라도 나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좀 드시지요.”

“아닐세. 자네 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 확인하면 돼. 나는 금방 궐로 돌아가 봐야 해서.”

이전엔 용건이 없어도 괜히 와서 술을 마시고 가더니, 예사롭지 않았다. 도겸은 뒤에 서 있는 행랑아범도 자리를 비우게 했다.

“아범은 광에 가 저하와 익위사들의 조족등에 넣을 초부터 넉넉히 챙겨 오게. 불이 약해 금방 꺼질 것 같으니. 그리고 내 방에서 새 도포 한 벌도 가져오고.”

“예, 나리.”

어디서 도포를 잃어버렸는지 세자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차림인지라 행랑아범도 곧장 납득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솔들이 전부 자리를 비운 틈에 도겸은 슬쩍 언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어두워서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니 언의 얼굴엔 정말로 수심이 가득했다.

“심 낭자에게 이야기하고 보니 앞서 간 세자빈들, 특히 선아가 죽기 전의 모습이 어쩐지 양귀비에 중독된 자들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

이번엔 도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다분히 의심스럽긴 했지만 설마 그렇게 연결이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도 아니길 바라. 그래서 내의원에 당시 썼던 화제(和劑, 약을 짓기 위해 작성한 종이)가 있나 가서 그것부터 알아보려 하네.”

“나리.”

그때 먼저 안채에 다녀온 남산댁이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이며 고하였다.

“아씨께서는 안채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한데 미처 단장을 할 시간이 부족하여 바로 모시고 나오진 못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세자 저하.”

“그건 괜찮네. 낭자만 무사히 귀가하였으면 됐어.”

안도한 세자가 돌아서려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도겸을 보았다.

“한데, 심 낭자는 정말… 몽유병 환자가 맞는 것인가?”

“예?”

“잠을 자고 있는 이라 하기엔 눈빛이 깨어 있는 듯 초롱초롱한 게, 도통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야.”

“저, 그것이….”

적어도 언에게는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도겸이 막 운을 떼려던 차였다.

“농일세. 낮과 밤을 떼어 놓고 보면 아예 다른 사람이라 하여도 믿겠던데 깨어 있다고 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도겸은 저도 모르게 남산댁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남산댁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이실직고하기를 만류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네가 왜 제 한 몸 지킬 만큼 충분히 강한 여인이라 하였는지는 알겠다만 그래도 밤엔 특히 단속을 잘하여야 하지 않겠나? 어서 치료도 하여야 할 테고.”

“그 말씀은, 혹 무뢰배라도 만나셨던 겁니까?”

“어? 어… 아닐세! 별일은 없었고! 그저 낭자가 워낙 민첩하고 기민하여 놀라워 말이지.”

세자는 자신이 거짓말에 재주가 없음을 알지 못한다. 분명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도겸은 어색하게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러니 그, 앞으로는 낭자가 밤에 홀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문단속 좀 꼭! 반드시! 유념해 주게.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겠나. 간택 단자까지 넣은 처녀가.”

“…예. 알겠습니다.”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 언이 비로소 마음이 놓였는지 후련하게 돌아섰다. 그러곤 도겸이 내어 준 도포를 입혀 주는 남산댁에게 말했다.

“배웅은 신 상궁이 해 주겠나? 자네는 어서 가서 누이가 잘 있나 직접 확인하고 자는 것까지 봐주어야지.”

“하나 어찌….”

“명에 따라주게.”

남산댁을 굳이 데려가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세자빈 궁에 있던 사람이 바로 남산댁인지라 따로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싶었다. 도겸은 별수 없이 대문 안에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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