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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52)화 (37/197)

성큼성큼 다가온 언이 버럭 화를 냈다.

“최도겸 이 녀석은 누이가 아프다면 밤에 보초를 서든 문을 잠그든 해야 할 거 아닌가!”

청의 입장에서는 세자의 말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최도겸이 잠들어야지만 자유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만약 문이 잠겼다면 부숴야 하기에 골치가 아프지 않겠나.

도리어 청은 직전까지 다 죽어 가는 꼴을 하다 갑자기 멀쩡해진 세자가 여러모로 더 아파 보였다. 청이 언을 살피고 언 역시 청을 꼼꼼하게 살폈다.

“아니, 한데 그대는 이 가는 팔로 어찌 저 무쇠 같은 놈들을 단박에 쓰러트렸지? 내 눈으로 보았다지만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구나. 난 내가 참으로 취해서 헛것을 보는 줄 알았어.”

주변의 인간들이 세자부터 챙기려 드는데도 언은 개의치 않고 청을 걱정하기만 했다. 청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차라리 솔직히 말하라던 남산댁의 말을 상기했다.

“송구하옵니다만 소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잘….”

“그대는 혹시.”

언이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물었다. 다가오려는 이들에게 거리를 두라 손짓한 그가 제 몸으로 청을 가리고 섰다. 청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며 뭔가를 확인하려 했다.

“직전에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인가?”

“당연히….”

청은 세자가 정신이 없어 보이는 탓에 대충 구해다가 양귀비 냄새를 풍기는 녀석들과 함께 궐이라는 곳에 던져둘 생각이었다. 저렇게 온전한 줄 알았다면 그냥 지나갈걸.

청이 별수 없이 남산댁의 조언대로 솔직히 말하려던 찰나였다. 도겸의 말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 몽유병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마 그날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몽유병이라는 건 기억을 잘 못 하는 병인가. 살아온 긴 시간을 모두 기억하는 청에게 있을 리 없는 병을 만든 것은 괘씸했지만 지금 상황을 적당히 모면하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게다가 생각이 길어진 것을 두고 긍정의 침묵이라 받아들였는지 구태여 뭔가를 수습하지 않아도 언이 알아서 납득했다. 세자는 부쩍 지레짐작하는 경향이 있었고, 청은 그로 인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래서 믿을 만하다고 했던 건가.”

한숨을 들이쉬던 언이 뭔가 답답한 듯 고개를 틀어 마른 코를 팽 풀었다. 그러자 콧구멍을 막아 놓았던 솜 두 개가 쏙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청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느낀 언이 멋쩍어하며 설명했다.

“아, 한두 번 양귀비 태운 연기를 마시는 걸론 중독이 되지 않는다 하였지만 혹시 모르니 이리 코를 막고 취한 척만 한 것이다.”

“취한 척?”

“그대도 들었지 않나. 최도겸 그 녀석이 직접 미끼가 되겠다고 했던 이야기를.”

언은 익위사들이 건네는 도포를 입지 않고 청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더 이상 머리카락에 힘을 불어넣을 필요가 없어지면 청으로서는 고마운 일인지라 거절하지 않았다.

“듣자마자 화를 냈다만 나쁜 방법은 아닌 듯하여 내가 직접 나선 것이지. 약을 거래하는 척 놈들을 잡으려고… 아, 익위사들을 시키려니 보통 우직한 자들이 아닌지라 아닌 척 꾸며 내는 일이꾸며 내는 일이 서툴기에 내가 직접 미끼가 됐던 것이다.”

언이 씌워 준 도포에 포박당하듯 갇힌 청은 눈만 굴려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 그리고 되도록 말을 아낄 것.

청은 남산댁의 또다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는 중이었다.

“…….”

“그런데 그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를 구한 것이지. 제대로 된 증좌를 얻어 내기도 전에.”

언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보며 난처해했다.

“무어, 어쨌든 잡았으니 됐다. 한데 형신(刑訊, 죄인을 고문하면서 신문하여 자백을 받아 내는 일)하기도 전에 벌써 팔다리가 부러졌으니 더 부러트릴 곳도 없겠구나.”

떨떠름하게나마 웃어넘긴 언이 청에게 집으로 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가자. 데려다주마.”

지붕을 뛰어넘으면 금방인 거리를 괜히 밤새 걷게 생겼다. 어차피 인간의 눈은 제 움직임을 따라올 수 없으니 전처럼 몰래 내뺄까,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아니 된다. 전에는 어찌 집으로 돌아갔는지 몰라도 이런 때는 특히나 흉흉하니 네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것까지 보고 나와야겠구나.”

멀뚱히 생각만 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튀어나왔나. 어쩐지 도포로 덮고 소매 부분을 묶기까지 하더니 청이 전처럼 사라질까 봐 한 수 앞을 대비한 모양이었다.

청은 어쩔 수 없이 세자를 따랐다. 머릿속으론 역시 귀찮은 일에 괜히 나섰다는 후회뿐이었다.

익위사들이 조족등으로 낮게 비춰 주는 빛을 따라 두 남녀는 천천히 서촌으로 향했다. 청은 익위사들의 걸음마다 흔들리는 조족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걸었다.

어둠은 늘 내리쬐는 빛 아래에 고이는 건 줄 알았는데, 조족등 덕분에 빛이 낮게 깔려 바닥에 드리워졌다. 청의 눈엔 퍽 신기한 광경이었다.

“천변에서 그대를 그리 보내고 배오개에서 다시 만났을 때….”

한창 여러 사람이 자박거리며 걷는 소리만 들리는데 문득 언이 청에게 말을 걸어 왔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몰라.”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아 청은 가만 듣기만 했다. 언도 힐끔 청을 한번 보고는 다시 앞만 보며 걸었다.

“그대가 살아 있어서. 산 사람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주어서 말이야.”

“…….”

“지금껏 이 나라의 세자로 살며 나는 전하를 도와 이 땅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는커녕 늘 소중한 백성들을 잃기만 했거든.”

그 목소리가 어쩐지 기어들어 가는 게, 세자는 굉장히 부끄러우면서도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청은 물론 납득하지도 못했다.

“많은 걸 가졌다면 잃는 건 당연하지.”

가만 듣기만 한다는 게 그만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가고 말았다. 세자보다 주변의 익위사들이 먼저 청에게 눈치를 주었다. 물론 살면서 주변의 눈치란 걸 본 적이 없는 청은 그저 실수했다는 사실만 인지했을 뿐이었다. 그 또한 세자가 먼저 나서서 웃으며 제지했다.

“괜찮다. 내일이면 까맣게 잊을 아이에게 주의를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물론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니 한결 수월해진 터라 청은 모른 척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그대는 어째서 잃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한데.”

긴 골목 끝에 다다르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초행길이 아닌지 언이 능숙하게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점잖게 물어왔다. 청은 언이 제 속도에 맞추고, 익위사는 세자의 속도에 따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때때로 잃는 건 잃어서야 가치가 생기는 게 있으니까.”

“…뭐?”

“그리고 잃은 것에 얽매여 있기만 해서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으니까.”

“어찌 그리 매정해. 그럼… 그냥 잊으라는 것이냐? 앞으로를 위해?”

나긋나긋하던 언의 음성엔 미미하게나마 분노가 섞여 있었다. 청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용인 저도 어머니를 잃었는데 고작 인간이 뭘 얼마나 갖고 지킬 수 있어서 잃는 것들에 미련을 둘까.

부질없는 짓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용이라는 것부터 밝힐 수 없기에 그냥 묻어 두기로 했다.

“네 말대로 그냥 잊으면 앞으로는 더 이상 얻는 것도 없이 그나마 가진 것마저 계속 잃기만 하겠지.”

“…….”

“잃은 것을 무의미하게 잊고 새것만 탐하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을 유의미하게 기억해야 새 것 또한 가질 자격이 생긴다는 걸 알아야지. 내가 그것을 잃은 데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까.”

비단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물론 어머니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어머니가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죽여달라 청했다면, 청은 아마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모든 물을 뿜어내어 그 세상을 수몰시켰을 테니까.

다만 어머니는 딸이 당신을 잃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갖길 바라셨지 않나.

“뭐, 때론 잃은 게 앞으로 가질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 또한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미련이 아닐까.”

청은 복수심이 만든 불꽃 가운데 서서 타들어 가며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최도겸을 떠올렸다. 그 불꽃을 끄는 건 오로지 최도겸 본인 몫일 것이다.

그러다 타죽어 버려서 저 하늘 너머로 다시 돌아갈 길을 찾아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잃음으로써 가치를 다할 수 있게 나는 앞으로 흘러가야 해. 미련처럼 고여 있기만 해서는 썩을 뿐이고, 난 잃은 것의 가치를 썩게 두고 싶지 않으니까.”

궁금하다며 물어 놓고 세자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다만 주변의 익위사들에게 명령했다.

“익위사들은 내게서 20보 밖으로 물러나라.”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일제히 고개를 숙인 이들이 두 남녀에게서 멀어졌다. 발걸음 소리의 소음도 한결 줄어들었다만 바닥을 비추는 조족등도 세자의 손에 들린 단 하나로 줄어들었다. 청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전히 이쪽을 주시하는 자들의 기척을 느꼈다.

“잃음으로써의 가치를 다한다라….”

세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섞여 허공에 스며드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인들 그 어떤 것도 곁에 있을 때만큼 큰 가치를 지니진 못 하지.”

조금 늦다 싶게 답한 세자는 최도겸보다 신중한 성격인 듯싶었다.

혹은 그만큼 미련에 절어 허우적대고 있거나.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연이 있겠지만 나 또한 그러하니 서로 존중하는 게 어떤가?”

말 몇 마디에 쉽사리 제 생각을 허무는 이라면 자잘한 바람에도 휩쓸리지 않을까.

어떨 때 고집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언은 다시금 웃으며 앞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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