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청이 어이없어하며 땋은 머리를 살폈다. 심심하면 내려갈 길을 잃고 삐죽빼죽 튀어나와 볼품없는 결과물을 두고 도겸은 뒷목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 말하지 않았더냐. 몸으로 익히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이 경우엔 물론 시간이 부족해 그런 것이다! 시간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연히 순이가 정성스레 땋아 준 것과는 천지 차이인지라 만족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내 머리를 아무렇게나 등 뒤로 넘긴 청이 다시 붓을 쥐었다.
머리 묶기는 진즉 끝났지만 어쩐지 손바닥엔 아직 머리칼을 쓸어내릴 때 느낀 보드라운 감촉이 선명했다. 괜스레 손을 쥐었다 펴던 도겸은 문득 저 스스로 흠칫 놀라 갑자기 목소리를 키웠다.
“참고로! 그, 다음 문장엔 용이 있다.”
“용?”
청의 눈빛이 반짝였다. 도겸은 부드럽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니 어서 써 보아라.”
“기다려 봐.”
심기일전한 청이 다시 붓끝을 조심스레 종이에 대어 글자를 써, 아니 그려 나갔다.
뜻밖에 청이 힘 조절할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도겸의 눈빛은 흐뭇하기만 했다.
***
어두운 밤은 소란한 것들이 잠들어 비교적 청의 예민한 심기가 무뎌졌다. 가만 지붕 위에서 주변의 인기척을 살피던 청은 사랑에 있을 도겸이 완전히 잠에 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용히 담을 넘었다.
인간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자는 걸까. 최도겸은 하루가 부족한 사람처럼 잠을 적게 잤다. 좀체 혼자 돌아다닐 시간을 주지 않아 곤란한 인간이었다.
저러다 또 해뜨기 한참 전에 일어나는지라 청이 자유롭게 즐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한 시진이면 충분하지.”
며칠간은 이 시간에 홀로 고요히 샘에 들어가 정기를 취했지만 오늘은 문득 외출할 필요를 느꼈다.
“그 신물 때문이구나! 신물 때문이야!”
그 노파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면 올 때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단숨에 시전까지 나온 청은 눈을 감고 코로 들어오는 온갖 냄새를 섬세하게 분리했다. 노파에게서 났던 특유의 냄새를 찾을 때까지였다.
“…어?”
눈을 뜬 청은 어느 쪽인가를 바라보며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감을 잃기 전에 다시 뛰어올랐다. 차분하게 길을 걸어가다간 시간만 낭비할 뿐인 데다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만나는지라 번거롭기만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초가집이 모인 골목에 서서 다시 한번 킁킁거렸다. 방향을 잡는 데는 어렵지 않았으나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긴가민가했다.
“뭐지.”
그리고 마침내 아직까지 유일하게 불이 켜진 초가 앞에 섰을 때, 청은 제 감이 헷갈렸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죽었구나.”
처음부터 노파가 아닌 노파를 데려간 젊은 여자의 냄새를 쫓았다. 처음엔 그저 나이가 들어 잘 움직이지 않는 건가 했는데, 오래 머물다 보니 흔적이 남은 집이라 옅게나마 냄새가 남은 것이었다. 아무리 살펴도 노파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살아서 귀신이랑만 친하게 지내서 그런가. 죽었다는데도 산 사람은 아무도 안 와.”
바로 며칠 전 도겸과 함께 검시소에 들어갔을 때 맡은 사체 냄새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청은 인기척을 숨기고 장터에서 노파를 데리고 갔던 손녀가 홀로 잔을 기울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면 무당이 천것이라서 그래?”
이미 많이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였다. 청은 당장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힌 상황에 기가 찼다. 며칠만 더 일찍 와 보았다면 좋았을걸.
여기선 결코 반지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린 게 문제였다.
“할머니는 귀신이 하는 말 듣고 나라 잘되는 길은 신통하게 점지했으면서 왜… 당신 목숨은 못 살렸어?”
반지를 원망하며 뚫어져라 노려보던 청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슬픔에 빠진 손녀의 혼잣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그 귀신이 할머니 목숨은 안 살려줘? 나랑 조금만 더 살다 가지. 정신 오락가락 해도 괜찮은데. 나는 할머니랑 더 살고 싶은데!”
소리치는 손녀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청은 조금 더 지켜보고 서 있었다.
죽음이 뭐라고 저렇게 울며불며 슬퍼하는 것일까. 수천 년간 죽음이란 그저 죽음일 뿐이라 여겨왔다. 누군가 죽음을 기린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지라 다소 충격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누군가 죽을 때까지 곁에 머문다는 건, 그리고 떠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진 것을 잃고 느낀 공허함과 비슷한 것일까. 아직은 확실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당연히 조문이라는 게 뭔지 알 리 없는 청은 다시 어둠 속으로 스미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
귀찮게 됐다. 내키는 대로 뛰며 가볍게 밤 산책을 즐겨 보아도 찌뿌드드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참에 조금 갖고 놀아도 문제없을 천덕이라는 인간이나 찾아볼까. 고약한 냄새가 나던 인간인지라 집중하면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없나?”
적어도 제가 찾을 수 있는 범위 내엔 없는 게 분명했다. 최도겸과 이언이 수배를 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기감을 세우고 있긴 했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별안간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에 가던 길도 멈추고 홱 돌아섰다. 천덕이라는 인간은 없어도 최근 최도겸과 이언이 찾는, 양귀비임은 확실했다.
다만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위험한 상황을 겪었던지라 아무리 청이라도 겁 없이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
최도겸에게 냄새가 느껴졌다고 알려 주기만 해도 충분히 도움은 되겠지. 무리할 필요 없다는 판단하에 청은 몸을 돌렸다.
“아이고, 나리! 많이 취하신 겝니까아?”
멀리서 껄렁대는 이들이 웬 남자를 둘러싼 게 보였다. 휘청하며 인사불성이 된 게, 아무래도 청이 그랬던 것처럼 당한 모양새였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괜찮았지만 인간이라면 내일 또 새로운 자살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세자가 슬퍼할 텐데.”
세자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니면 세자를 끔찍이도 모시는 최도겸은 더 부지런해진다. 하루의 길이는 정해져 있기에 그만큼 최도겸이 ‘파랑’을 위해 돌아갈 길을 찾는 데 쓸 시간은 줄어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최도겸은 내 건데.”
그를 마음껏 쓸 수 없다니 부쩍 심기가 불편해졌다.
“…독점하게 해 준다면서 귀찮게 하네, 최도겸.”
몸을 던진 청이 사람들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건물 그늘에 내려선 터라 가까이 선 인간들은 지척에 청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리, 정신 좀 차려 보쇼. 어?”
낄낄대며 웬 장신의 남자를 둘러싼 녀석들이 몸을 더듬어 금품을 빼앗는 게 보였다. 보석으로 치장한 갓끈 하며, 화려하게 치장된 부채와 주머니가 줄줄이 무뢰배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자니까 죽어도 상관없나. 마지막까지 끼어들기 싫던 청을 움직인 이유는 하나였다.
“약….”
“정신 못 차릴 것 같으면 그냥 털리든가!”
“약, 어디….”
잔뜩 취해 몸도 못 가누는 한심한 인간이 바로 세자였으니까.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흉흉한 날붙이를 휘두르는 자들에게 덕지덕지 묻은 험상궂은 기운들을 느낀 청은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깨끗한 물을 쏟아 저들을 전부 쓸어 내 버리고 싶었다.
“정신 차리면 어디 아무 곳에다 가둬 놓고 돈이나 뜯자고.”
“기와집이나 하나 뜯어낼까?”
“이 옷도 좋아 보이는데. 벗겨 봐, 내가 입게.”
“네가 입으면 땅에 질질 끌릴 것 같은데?”
“뭐, 이 새끼야?”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는 제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다. 청은 인기척을 숨기지 않고 다가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의 다리부터 꺾었다.
“끄, 끄아악!”
손도 대기 싫어 발끝으로 가볍게 찼을 뿐인데도 픽픽 쓰러졌다.
“뭐야?”
“저년 잡아!”
“흐억, 내, 내 팔이…!”
제법 재빠른 이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전처럼 눈앞의 시야가 흔들리는 일도, 몸이 제 말을 듣지 않는 일도 없기에 청은 물속을 유영하듯 여유롭게 무기들을 피해 오염된 자들의 팔이나 다리를 하나씩 부러트렸다.
단순히 급소만 쳐서 기절시키기엔 오늘 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청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기에 아닌 척 화풀이할 필요가 있었다.
“느려.”
머리 위로 칼날이 스쳐 가고 의지와 상관없이 흩날리는 옷고름이 누군가 휘두른 칼에 찢겼지만 청에겐 단 하나의 생채기도 생기지 않았다.
왈짜들의 칼은 청이 있던 자리에 남은 궤적만을 쫓을 뿐이었다.
“어서 잡으라고!”
“으악! 저걸 어떻게 잡냐고!”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 댔다. 어둑한 골목 안쪽엔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다 못해 정신을 잃은 인간이 다섯이 넘어갔다.
두엇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고 뒷걸음질 치다 냅다 줄행랑쳤다.
“커억…!”
물론 청은 단 하나도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둘을 단숨에 잡는 순간 이번엔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지붕에서 쏟아지듯 내려왔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복색은 다르지만 날붙이로 무장하여 더러운 냄새를 풍긴 건 마찬가지였지 않나. 청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간부터 처리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몸부터 틀었다.
“죽이면 안 된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최도겸이나 할 법한 말을 했다. 최도겸의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하지 않았나.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자 직전까지 초주검처럼 늘어져 있던 세자가 남은 인간 하나를 간단히 제압한 채 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죽일 생각은 없는지라 청은 방금 넘어트린 녀석이 혹시 죽었나 확인했다.
“…안 죽였는데.”
아차, 세자 앞에서는 높임말을 쓰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남산댁에게 배운 말 몇 마디로는 모든 상황에 통용할 수 없는지라 청은 조금 고민이 됐다.
얼마 전에도 중간시험에 불통이라며 술을 받지 못한지라 술도 잃고 자존심도 상한 바가 있었다.
“안 죽였사옵니다? 아니, 아직은 안 죽었사옵니다라고 해야 하나.”
“모두 검을 거두어라. 그 아이는 나를 구한 것이니!”
헐벗은 꼴의 세자가 제 차림새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며 적당한 말을 찾고 있는 청에게 다가왔다. 지붕에서 뛰어내려 온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넣고 고개를 숙였다.
“다친 곳은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