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몽유병이 생겼다 하여도 엄연히 일이 벌어진 날이 다르지 않나. 도겸은 이 부분을 정확히 짚어 설명하여야 하나 고민이 됐다.
“직전까지는 반쯤 장난이었지만 농으로 넘겨선 안 될 듯싶어. 행여 놈들에게 노출이 됐다면 언제 표적이 될지도 모르지 않나. 한데 이 집엔 겨우 백면서생과 어린 낭자 그리고 나이 든 청지기와 출궁한 상궁 하며 어린아이뿐이지.”
술을 들이켠 언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잔을 내려 두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당분간 집을 호위할 사람들을 보낼 테니 보초를 세우게.”
“저하.”
도겸이 먼저 잔을 채워 주며 염려했다.
“저하 스스로는 돌보고 계신 겁니까?”
“무어?”
“낮에 궐에 갔을 때 유 내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신다 들었고요.”
언이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유 내관의 입이 유일하게 열리는 곳이 자네였나.”
“저하께서는 지금 주변을 돌아보시기보다 스스로를 돌보셔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과 같으니까.”
“다릅니다. 그러다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백성들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잃습니다.”
도겸은 세자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제 잔을 채우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언은 물론 조용히 앉아 있던 청의 시선이 술병에 따라붙었다. 도겸이 술병을 좌우로 살살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기가 찬 듯 웃음을 터트린 도겸이 다시 앞으로 내놓았다.
“너는 조금 있다가 따로 마시거라.”
자칫하다간 또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게 될지 모른다. 도겸은 되도록 청의 음주를 막았다. 청은 조금 입술을 씰룩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 시험을 무사히 마치는 상으로 술을 받기로 한 게 아닐까.
“…예, 오라버니.”
입꼬리에 경련이 나는 것은 아닐까 싶게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청이 소리도 없이 일어났다.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언은 미소 지으며 허락했다.
“그래. 고맙구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청이 허리를 숙여 예를 차렸다. 어찌나 잘 가르쳤는지, 부족한 것 하나 없었다. 그런데 여전히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다.
“한데, 세자 저하.”
인기척하나 내지 않고 걸어 나가던 청이 문득 돌아섰다. 다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남자가 의외인 듯 청을 바라보았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집에 더 사람을 들이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사람을 들일 필요가 없다? 보초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어찌하여. 너와 오라비를 지키는 이들이 많은 편이 낫지 않겠느냐?”
언의 하문에 청은 세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약간 낮추었다.
“오히려 걸리적거릴 듯하옵니다.”
술을 들이켜던 도겸은 하마터면 그대로 뿜을 뻔했다. 역시,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던 위화감이 여기 있었다. 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듯싶었다.
“…거참, 묘한 답이로구나.”
언은 보다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걸리적거린다? 내가 하찮은 이들로 꾸려 줄 것 같아 그러느냐?”
“아닙니다. 어떤 이들을 붙여 주셔도 제겐 같사옵니다.”
한결같은 답은 언을 더 혼란하게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언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납득하지 못하던 차, 청이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저하께서 아시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물고… 인간이오니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더 말하게 두지 말 것을. 아차 싶다가도 조금은 웃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허어…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자네에게 있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저하. 그저….”
일단은 상황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도겸은 청이 괜한 말을 하는 바람에 난감해질 상황을 예상하며 언을 설득할 말을 골랐다.
“아니면, 자네의 숨겨진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위급한 상황에 뛰어들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던 순간 뭔가가 머리를 스쳐 갔다. 도겸이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언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음?”
“놈들의 꼬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찾고 있지 않나.”
“아니요.”
도겸이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
미끼가 되겠다는 도겸의 말에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뛴 언이 궁으로 돌아간 이후, 남은 것은 다시 청의 ‘인간 수업’이었다.
“해함하담 인잠우상(海鹹河淡 鱗潛羽翔). 바다는 짜고 강물은 맑으며 비늘이 달린 것들은 물에 잠기고 깃이 달린 것들은 높이 난다. 이 인잠우상이라는 말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아도 성군이 나라를 잘 다스릴 적에 세상 만물이 타고난 법칙대로 흘러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중용’이라는 책에서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도겸은 종이에 해서체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정갈하게 써 나갔다. 도겸이 쥔 붓끝을 따라 청의 시선이 도르륵 굴렀다.
“바다 해, 짤 함… 강 하, 맑을 담이다.”
천자문은 순서대로 보여 주면 청이 보고 듣고 따라 쓰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이게 반복돼.”
청이 손끝으로 삼수변 수(氵)를 가리켰다. 도겸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 앞에서 쓴 물 수 자와 같다. 이게 들어가는 글자는 모두 물과 관련이 있지.”
“그래? 그럼 이게 들어간 거 전부 알려 줘.”
“그건 천자문을 다 외우고 나면 알려 줄 터이니, 이것부터 써 보아라.”
미리 알려 주고 나면 흥미를 잃을까 도겸은 청을 살살 달래며 빈 종이에 직접 글씨를 쓰게 했다. 붓을 쥔 청이 거침없이 글자를 적어 나갔다.
“…….”
“…….”
청이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써낸 글자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글자를 배울 때와 같이 삐뚤빼뚤한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과하게 힘이 들어간 나머지 종이가 찢어져 넝마가 됐다는 점이었다. 제가 보기에도 도겸이 쓴 것과 상당히 다름을 느낀 청이 붓을 내던지며 성을 냈다.
“왜 안 되는 거야?”
남산댁의 말마따나 물 먹은 솜처럼 사람이 사는 방식들을 익혀 내던 청이 유일하게 고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말했지 않느냐. 몸으로 익히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게 더 재미있었어.”
“그래도 내가 처음 글을 적을 때보다야 훨씬 나은데.”
“당연하지. 너랑 나는 격이 다른데.”
“…그 다른 격의 인간이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 보아라.”
벌써 찢은 종이가 수십 장이오, 부러트리거나 털이 망가진 붓이 몇 자루인지 모른다.
도겸은 어릴 적 아버지께서 저를 무릎에 앉혀 놓고 글을 가르쳐 주시던 방법을 떠올리며 붓을 청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 손등을 제 손으로 감싸 잡았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손아귀를 채웠다.
“네 손은 붓을 가볍게 쥐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내 손에 언제, 얼마나 힘이 들어 가는지를 보아라.”
숨소리는 물론 가슴이 뛰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청과 가까워진 채로 도겸은 심혈을 기울여 종이 위에 글자를 적었다. 노란 불빛 아래 검은 먹물이 종이에 스며들고 글자가 하나둘 선명히 새겨졌다.
천천히 글자를 적다 문득 바로 곁의 청을 바라보니, 어쩐지 그녀의 시선은 글자가 아닌 글씨를 쓰는 손에 머물러 있었다.
“집중해야지. 처음부터 잘 쓸 필요는 없지만 종이를 찢어서야 되겠느냐.”
“…뜨거워서 신경 쓰여.”
뜨겁다는 말에 도겸이 멈칫하며 손을 떼어 냈다.
“많이 뜨거우냐? 아릴 만큼?”
청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뜨거움을 느낀 만큼 도겸은 찬기를 느끼고 있던지라 손을 쥐었다 펴다 문득 글씨를 쓴답시고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알아차린 즉시 거리를 두자 청이 의아해했다.
“뭐 하는 거야?”
“아니… 불쾌하다 하지 않았느냐. 내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게 복수심인 건 이제 아니까. 날 죽이려는 게 아니잖아.”
“…….”
“역시 모여 사는 건 별로야. 너처럼 순수를 잃고 탁해지기나 하고.”
투덜댄 청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다시 붓을 잡고 직전에 도겸과 쓴 글자를 따라 썼다. 한 번 가르쳐 줬다고 종이를 찢는 불상사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도겸은 흘러내려 글자를 쓰는 데 거슬리는 긴 머리칼을 살며시 걷어 주었다. 무방비 상태로 글공부를 하는 청의 머리칼은 마치 햇살 아래 빛나는 파란 바닷물의 수면처럼 일렁였다.
“역시 혼자 사는 게 최곤데.”
또 인간을 물고기에 비유할까 싶어 도겸이 얼른 반박했다.
“또한 모여 살기에 얻는 것도 대단히 많을 터인데.”
“뭐가 있는데?”
“우선은 이렇게 머리카락을 잡아 주는 이가 있으면 글을 쓰기 부쩍 편하지 않겠느냐?”
“그냥 제대로 묶어 줘.”
전처럼 혼자 살면 글 따윈 필요치 않다고나 할 줄 알았지만 청이 갑자기 도겸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뭐?”
“순이가 하는 것처럼 말이야.”
도겸은 몹시 난감해졌다. 쏟아져 내리는 긴 머리칼이 아득해 보이긴 또 처음이었다.
“크흠, 그게 말이다.”
“못 해?”
“뭐?”
“순이처럼 못하냐고.”
실망하기라도 한 걸까. 청이 다시 돌아앉으려는 차 도겸이 어깨를 잡아 앉혔다.
“그, 편히 글씨를 쓸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빨리 해 봐.”
글을 가르치러 온 도겸은 얼결에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천천히 땋아 내렸다.
“허어, 어찌….”
그런데 손이 아무리 큰들 자꾸만 머리칼이 손을 벗어나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복잡한 글씨는 손쉽게도 쓰던 도겸이 오랜만에 어려운 숙제를 만나 고심했다.
긴 손가락이 이렇게 쓸데없이 느껴진 건 또 처음이었다.
“왜?”
다만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쓸어내리는 순간엔 생각만 했던 것과 달리 물결을 손가락으로 가르는 느낌이라 상당히 중독성이 있었다.
말없이 한참이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자 청이 살짝 돌아보는 통에 도겸은 얼른 머리를 땋는 시늉을 했다.
“…허어.”
긴 머리를 어찌 땋아 내렸지만 댕기를 올릴 줄 몰라 또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별수 없이 도겸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글씨를 쓸 정도’면 되었다 판단하며 머리 묶기를 마무리 지었다.
“다 되었다.”
도겸이 손을 떼자마자 머리칼의 주인이 땋은 머리를 앞으로 가져가 확인했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