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제대로 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어. 아무도 없는 듯하여 발길을 돌리려던 차에 잔뜩 취해서 들어온 아비를 부축해 얼결에 집 안까지 들어가 뉘었을 뿐이야.”
그 아비는 알까. 한밤에 집 밖에서 자다 입이 돌아갈 뻔한 와중에 무려 국본이 직접 도와줬을 줄이야.
“그런데 취한 이에게서 도통 술 냄새는 나질 않으니, 뭔가 깊은 병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서둘러 구리개까지 가서 의원을 데려왔다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언의 무용담처럼 들리긴 했지만 정작 세자의 낯빛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기껏 의원을 불러 왔건만 한다는 말이, 술이 아닌 약에 취한 것이라더군.”
“지금… 약이라 하셨습니까?”
종이를 살피던 청과 도겸의 시선이 언뜻 마주쳤다. 도겸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저희는 직전까지 좌포청 검시소와 이전의 망자가 죽은 우물가를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허어.”
언은 기가 찬 듯 웃고 싶은 표정으로 도겸을 가볍게 질책했다.
“간 큰 남녀가 밀회를 나눈 게 아니라 월담을 하였군?”
규장각 각신에겐 한밤중에 검시소를 출입할 권한이 없음을 감안한 반응이었다. 도겸은 면목이 없었지만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이가 비범하리만치 관찰력이 좋은 아이라 제가 놓친 뭔가를 찾아낼까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갔었습니다. 비록 들키진 않았지만 나오는 길에 잠긴 자물쇠를 부수고 나온지라 파루 전에 다시 돌아가 수습을 해 두어야 하긴 합니다.”
“무어?”
언은 도무지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듯이 놀라워했다.
“자네, 지금껏 내가 알던 규장각의 고아한 최 직각이 맞는 겐가? 내 귀가 다 의심되는데.”
“어떤 부분에서 의심이 되신다는 겁니까?”
“자물쇠를 부수고 나온 것 말이네. 자네가 그런 짓을 할 위인인가?”
언의 물음에 청이 무심히 대꾸했다.
“자물쇠를 부수지 않았다면 벽을 부수고 나왔어야….”
“그것은!”
물론 청이 간단하게 부순 것이었지만 도겸은 제가 한 일인 것처럼 꾸며 냈다. 어차피 청의 작은 손으로 그런 일을 했을 것이라곤 언은 물론 누구도 생각지 못하겠지만, 어쩐지 제 발이 저린 탓이었다.
“전에 저하께 이 아이의 사주단자를 넣겠노라 고집을 부릴 때 이미 알아차리신 것 아닙니까?”
“그런 고집이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쨌든 거기서 저희도 얻은 단서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체에서 약 냄새가 난다는 것이요.”
“그 망자도 약에 중독이 되어 있던 것인가?”
“한데 아직 그 약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 날이 밝는 대로 수소문을 해 보려던 참입니다.”
“그 약은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닐세. 아마 자네도 알 테지. 다시 한번 약방에 가서 직접 확인을 해 보아야 하겠지만 오늘 환자를 본 의원이 대번에 말한 것은….”
언이 씁쓸한 얼굴로 나무를 쓸어내리며 답을 주었다.
“양귀비였네.”
***
두 건의 자결 사건 이후 두 처녀가 또다시 자진하며 유서를 남겨 세간이 떠들썩해졌다. 우려한 대로 지난 겨우내 굶주린 백성들이 켜켜이 쌓인 원망을 지존과 국본을 몰아세우는 데 쏟아 낸 것은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전국의 지방 서원에서 중앙의 관리들까지 줄이어 간택령을 멈춰 달라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마저 왕실의 무리한 국혼 추진을 지탄하며 유소 행렬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형국이 보인 바는 분명했다. 바로 왕실의 위엄이 바닥까지 내려앉았음이다.
“은밀히 익위사들을 백악산 서쪽 기슭에 보내어 놈들의 근거지를 찾았지만 이미 도주하고 없었네. 근방에 왈자 패들이 모일 만한 곳들을 뒤지고 있는데 아직은 성과가 없고.”
그러나 진실로 죽은 이들이 왕과 세자를 원망함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망자들이 양귀비에 중독됐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수사도 일사천리였다.
오작인들이 망자의 몸에서 양귀비 냄새를 단박에 찾지 못한 것은 그들이 양귀비에 취해 죽은 게 아니라 이미 중독되어 금단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독자들에게 약을 주겠다고 유인해 살해한 모양이라 판단되었다. 새로운 자살 사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대문과 사소문마다 기찰(譏察,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검문하는 일)도 하고 있다만 양귀비가 도성에 드나드는 일은 아직까지 못 잡아냈다 하고.”
“얼마든지 부피를 조절할 수 있는 물건이라 잡아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궐이 아닌 도겸의 사랑방이었다. 당장은 궐보다 이곳이 의논을 하기에 훨씬 안전해 보였다. 도겸은 적당히 식은 찻물을 따르며 제가 조사한 바를 고하였다.
“약을 갖고 있던 놈이 시장에서 자릿세를 뜯는 무뢰배의 일당이라 하여 알아보았지만, 연쇄적인 살인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놈도 연루가 되어 있겠군.”
“당장 수배령을 내려야 합니다. 용모파기를 그릴 화공이 필요하고요.”
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자릿세를 뜯기던 시장의 상인들에게서 증언을 구해야겠지?”
“아니요. 더 정확히 증언해 줄 이가 제집에 있습니다.”
차를 마시려던 세자가 멈칫하며 찻잔 너머로 도겸을 직시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놈과 접촉한 이가 있다고? 그런 놈이라면 필시 좋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좋지 않기야… 하였지요.”
물론 그놈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필 꼬드긴 여인이….
“청이를 건드렸으니까요.”
“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찌 내가 일언반구 없던 것이냐? 그때 바로 말을 하였다면 당장 병사를 풀어 잡아들였을 텐데.”
그야 당연히 그때는 그 여자가 심청이 되기 전이었으니까.
“다행히 일을 모면한 뒤에 관아에 고발을 하였사오나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상부에도 이야기를 올렸는데 어쩐지 흐지부지되어 있었고요. 그 일을 깊게 파고들었어야 했는데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던 차에… 송구합니다.”
“아니, 내 말은.”
정성스레 우린 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않고 급히 내려놓은 언이 다른 우려를 표했다.
“당장 상황은 모면하였다지만 뒤를 쫓아 보복이라도 하였으면 어쩌려고. 이 집엔 가뜩이나 가솔들도 몇 없지 않나.”
언은 늘 생원도 아닌 도겸을 샌님 취급했다. 도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자네처럼 책상머리에서 나고 자란 이가 어찌 그런 무뢰배들을 상대하겠는가?”
“한번 대련해 보시겠습니까?”
장난삼아 도겸을 자극했을 언이 문갑 위에 놓인 검들을 흘깃 살폈다.
“호오, 저것들은 이 나간 장식품이 아니었던 겐가?”
“아버지의 유품인데 어찌 소홀히 관리하였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검집을 손끝으로 쓸어 본 언이 웃으며 돌아섰다.
“그만두세. 괜히 무리하였다가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었네, 어쩌네 하며 나를 원망하면 나는 미안한 마음에 밤잠을 설칠 테니.”
“제게 지신 뒤에 분한 마음을 못 이기고 잠을 설치실 게 아니라요?”
“어허, 자네….”
진지하게 하던 이야기도 잊은 두 남자가 심란한 것도 잊고 갑자기 치기 어린 혈기를 드러냈다.
“어떻게, 나한테 한 수 배워 볼 텐가?”
정말 칼부림이라도 부릴 듯이 혈기 왕성한 사내들이 때 아닌 신경전을 벌일 때였다.
“오라버니, 저 청입니다.”
안채에서 남산댁의 교육을 받고 있을 청이 느닷없이 나타나 두 남자가 동시에 홱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너라.”
도겸의 허락에 조용히 열린 문틈으로 복숭아색 치맛자락이 먼저 들어섰다. 경계하던 두 남자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랐다. 피부를 닮은 하얀 저고리에 백록색 옷고름을 맨 청은 작은 주안상을 하나 들고 있었다.
“…저하께서 오시면 꼭 한 잔씩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도겸은 바로 청이 사랑에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마 문밖에선 남산댁이 지켜보고 있으리라.
“역시 남산댁밖에 없군 그래?”
애주가인 언이 반겼고, 도겸은 바로 옆 바닥을 가리키며 청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어떤 수업을 했는지는 몰라도 며칠간 가르친 남산댁이 시험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장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들어와 앉거라.”
“그대는 어찌 볼 때마다….”
다시 상석에 앉아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청에게서 언은 눈도 떼지 못했다.
“이리 모습이 달라지는 것인가. 처음엔 처녀 귀신 같거니, 며칠 전엔 선머슴처럼 하고 나타나질 않나.”
청은 다소곳이 앉으며 도겸과 언의 사이에 상을 내려놓았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옵소서.”
무뚝뚝하긴 해도 윗사람을 존대하는 법은 확실히 배운 듯했다. 도겸이 흐뭇하게 바라보는 틈에 언이 청에게 생긴 흥미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주안상은 이 정도면 훌륭하지. 남산댁이 사온서(궁중에 술을 마련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하던 관서)에서 한두 번 술 담가 본 실력이 아닌 걸 알기에 안주는 그저… 마음 나눌 이들이면 충분하네.”
도겸을 한 번 본 언이 청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데 그대는 왈자 놈들에게 큰일을 당할 뻔하였다면서. 괜찮았느냐?”
자로 잰 듯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청이 눈을 돌려 도겸을 보았다.
아마도 배운 대로 주안상을 올리고 나가려던 것 같은데 의외의 질문을 받아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의무적으로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고개만 돌린 것을 보면.
어색한 것을 보인다면 차라리 언에게 보이는 게 낫기에, 도겸은 스스로 답해 보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 해치는 일은 없었사옵니다.”
물론 직후에 후회했다. 술병을 들고 향부터 음미하던 언도 멈칫했다.
“음? 뭐… 그래. 놈들이 그대를 해치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
“…예?”
“그런 험한 일을 겪어 불안증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아이라 설명한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언이 따라 주는 술을 받은 도겸은 세자가 어떤 연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를 눈치챘다.
“혹, 이 아이가 겪고 있다는 몽유병이 걱정되신 것이라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