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8)화 (33/197)

우물에서 꺼낸 비릿한 오물이 남긴 여파는 생각보다 강력하여, 한참 맑은 공기를 쐬지 않고서는 머릿속까지 오염시킬 듯했다.

도겸은 내친김에 두 번째 자결 사건이 벌어진 배오개까지 돌아보고 가기를 권했고, 귀찮아할 줄 알았던 청은 바깥 구경이 싫지 않은지 별말 없이 따랐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둘은 얼마 가지 않아 금세 배오개 근처에 다다랐다. 돌배나무가 제법 울창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언덕은 공기부터 차갑게 가라앉아 언제 도깨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으스스한 장소만 골라 다니는지라 가만 밤공기를 가르며 걷던 도겸은 몇 번이나 팔을 쓸어내렸다.

“근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체가 부정한 것을 담는 그릇이라 하였지 않느냐?”

“근데?”

청은 하얀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간단한 일에 더 집중하며 도겸에게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럼 좋은 것들은 어디로 가느냐?”

“마찬가지야. 인간처럼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동물이면 특히나 영향을 끼치겠지… 어떻게든.”

“예를 들면?”

“글쎄, 이 땅의 것에 비유해서 너를 이해시키기엔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겠구나.”

뭐든 납득하고 알고자 하는 것은 도겸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그러한 습관이 그만 청을 당혹스럽게 한 것 같아 도겸은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예컨대 청이 어리고 순수한 순이만 곁에 두며 데리고 다니려 하는 것처럼.

도겸이 묵묵히 걸음을 옮길 적에 청이 나름대로 설명하려 애썼다.

“좋은 건 안팎으로 이롭고, 나쁜 건 안팎으로 괴롭잖아. 그 둘은 서로 상쇄될 것 같지만 안 되거든. 별개라서 결국 낱낱이 드러나.”

앞만 보며 걷던 청이 문득 도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안 그래?”

“…….”

마치 속에 품은 검은 불꽃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빤히 바라보는 투명한 눈망울에, 도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기분이 나쁘다느니, 불결하다느니 하는 말도 겉모습에 대고 한 것이 아님을 알지 않았나.

불쾌한 것은 그저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분이 난 것이리라. 아무리 제가 가진 복수심이 정당한들 청의 눈엔 그저 우물을 정화하고 걸러 낸 오물처럼 보이지 않겠나.

어쩐지, 청의 앞에서는 늘 한심한 존재가 되는 듯했다. 그래서 처음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지만 신기하게도 갈수록 겸허해졌다.

“아, 네가 원하는 예시 하나 정도는 들 수 있겠다.”

홀로 주억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청이 잠시 찾아든 정적을 부수며 말했다.

“아까 내가 말한 죽음의 냄새. 특히 죽임당한 자의 몸엔 죽인 자의 악의가 고스란히 남아 있거든. 그건 어찌나 더럽고 독한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야.”

“…지금, 뭐라 하였느냐?”

그럼 청은 도겸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살해당한 시체를 보고 왔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인가?

“당한 자의 몸에 그렇게 남는데 죽인 자는 어떻겠어? 그러니까 웬만하면 너도 살생은 하지 마. 그 더러운 건 쉽사리 사라지지도 않고 더러운 걸 더 끌어들여 나중엔 걷잡을 수 없어지니까. 나도 정기 가득한 물에서 꼼짝없이 100년은 정양해야 사라질까 말까라고.”

“왜… 왜 처음부터 말해 주지 않은 것이냐?”

도겸이 따져 묻자 청이 답답한 이엄 속에 가려진 머리를 긁적이며 시큰둥하게 굴었다.

“그야 더러운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랐으니까. 죽은 자가 품고 있던 악의인지 당해서 스며든 악의인지까지는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딴청 피우듯 높다란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대꾸하던 청이 어느 지점인가를 유심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근데, 저 나무 위에 뭐가 있는데.”

“무, 뭐?”

도깨비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스산한 곳인지라 그만큼 고개를 넘는 이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숨어 있는 무뢰한도 많았다. 깜짝 놀란 도겸은 얼른 청을 제 뒤에 숨기며 경계했다.

하필 청이 가리킨 나무가 바로 처녀가 목을 맨, 바로 문제의 그 나무이기도 했다. 청의 말대로 굵은 가지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거기 누구냐.”

동시에 한 손은 도포의 전삼을 들추고, 그 안에 갈라진 무를 재차 가르고 들어가 그 속에 숨겨 둔 장도를 찾았다.

그리고 도겸의 손이 막 장도의 손잡이를 꽉 잡았을 때였다.

“…이야.”

종이가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누군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어떤 간 큰 남녀가 이리 야금이 한창인 시간에 밀회를 나누나 하였더니.”

도겸이 든 제등에 비친 이는 놀랍게도 동궁에 있어야 할 세자 이언이었다.

“…저하!”

차라리 무뢰배를 만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도겸은 주변을 살피며 익위사를 찾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챈 언이 씩 웃으며 여유만만하게 굴었다.

“자네가 찾는 이들은 없네.”

“어찌하여 홀로 나오신 겁니까? 그것도 이리 위험한 곳에.”

“홀로 나와야 전처럼 한이 서린 처녀 귀신이라도 만날까 하여.”

“예?”

쉽게 와닿지 않는 답에 도겸이 의아해했지만 언은 의문을 풀어주기보다 제 의문을 먼저 풀기 바빴다.

“글쎄, 지금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뒤에 숨긴 처자를 먼저 이 막역지우에게 소개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설령 차림새를 앞세워 사내라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게. 내 저 나무 위에서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어도 처자의 목소리가 꾀꼬리와 같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차렸으니.”

도겸은 별수 없이 이미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던 청을 곁에 세웠다.

“이 아이입니다, 저하.”

“어떤?”

“제… 사촌 누이 말입니다.”

“그럼,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인 게지?”

“예?”

도겸의 반문에 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난 나보다 자네가 먼저 귀신을 만난 줄 알았지 뭔가.”

소개를 하긴 했지만 청이 이제 막 예절 교육을 받기 시작한 참이라 어찌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완벽하게 준비시킨 뒤에 보여 주려던 계획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는 참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녀, 심가 청이라 하옵니다.”

그러나 청은 또 한 번 도겸을 놀라게 했다. 어느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여인이 언에게 정확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는.”

언제 도겸에게 편하게 굴었냐는 듯 세자를 대하는 태도가 완벽히 반가의 규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장은 한시름 놓는 한편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서둘러 다물어야 했다.

제가 놀란 기색을 들키지 않은 것은 인사를 받는 세자 또한 눈이 커져 목석같이 굳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도겸은 단순히 청의 미색을 보고 놀란 것인가 짐작할 따름이었다.

“일전에… 며칠 전 혹 지금과 같은 야심한 시각에.”

언이 청을 자세히 보고자 등을 든 도겸의 팔을 잡아 약간 더 들게 하며 물었다.

“천변에서 나를 본 적이 없느냐?”

“천변….”

“청이에게는!”

청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도겸이 먼저 가까스로 끼어들었다.

“그… 몽유병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마 그날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몽유병?”

역시 몽유병이 뭔지 모를 청이 먼저 반문했다. 당사자가 의아해하니 거짓말을 하자마자 탄로 나게 생겼다. 도겸은 청의 팔목을 잡으며 작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부디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눈빛을 알아본 것일까. 청이 약간 벌어져 있던 입술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몽유병이라니. 그 아이에게 병이 있었단 말이냐?”

세자마저도 언제 웃었냐는 듯 심각하게 되물었다. 얼결에 거짓말을 내던진 도겸은 거짓을 위해 또 거짓을 보태야 했다.

“예.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간혹 자다 말고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지라, 오늘은 제가 외출하는 틈에 혹시 몰라 함께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허어….”

언의 눈빛에 걱정이 그득히 차올랐다. 도겸은 그만큼 양심의 가책을 여실히 느껴야만 했다.

“어쩐지. 그때 본 그대의 소복 차림 하며 뜻을 알 수 없는 말들도 그래서였군!”

뜻밖에 세자가 도겸의 생각보다 훨씬 깊이 납득해 버린지라, 돌이킬 수도 없었다.

“혹 이 녀석의 강도 높은 수업 때문은 아닌가? 응? 그렇다 하면 내 이 친우를 크게 꾸짖어 주겠네.”

언이 부쩍 다가서려 하기에 도겸이 슬며시 가로막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하야말로 야금을 틈타 이곳에서 무엇 하시던 것입니까?”

“응? 나야 무어.”

겸연쩍은지 언이 괜스레 코끝을 쓸어 내며 웃었다.

“당연히 자네가 하려는 것을 하러 나온 게 아니겠나?”

그러면서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도겸에게 건넸다.

“이렇게 정신없이 발품 팔고 다닌 게 얼마 만인지 몰라.”

도겸은 제등을 든 채로 조심스레 종이를 펼쳐 보았다. 언문으로 쓰인 글의 내용은 대충 보아도 세간에 떠도는 패관 소설의 한 구절임이 분명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도겸은 하루 종일 소설만 붙들고 있었던 터라 능히 읽을 수 있을 청에게도 보여 주며 물었다.

“자네 말이 맞았네. 아까 궐에서 나오자마자 세책점에 찾아갔었거든.”

서로 돌고 돌아 이곳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언이 조심조심 종이를 펼쳐 읽어 내리는 청을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이 필체의 주인이 그 세책점을 이용하는 손님들에게 꽤 인기가 많은 필사자라 다른 필사자들이 그네의 필체를 따라 할 정도였다더군. 한데 근래 들어 제대로 먹지 못해 수전증이 생기는 바람에 필사 일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세책점이라면 청과 함께 주요한 곳들을 둘러본 이후 저 혼자서 가 볼 계획을 하고 있었다. 도겸은 단숨에 집중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유서가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생겼군요. 게다가, 수전증 있는 사람이 유서는 그리 반듯하게 썼답니까?”

“그리하여 망자의 집으로 가 보았지. 그런데 투전에 가산을 탕진이라도 한 것인지 남아나는 살림이 하나도 없질 않나? 불 꺼진 방은 냉골이 따로 없었네.”

“망자의 부모를 만나 보신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