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술 냄새라기보다는 뭔가를 태우기라도 한 듯 들큰하고 묘한 냄새가 났다.
“…약….”
“뭐라 했소?”
“약… 주어….”
이대로 있다간 초봄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손이 얼음장이었다. 살아도 산 사람 같지 않아 섬찟하여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책임감 강한 세자는 소중한 백성을 부축해 집 안까지 데려갔다.
“어찌 변변찮은 살림 하나 없이….”
환자를 데려오긴 했는데, 방에 이불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혹시 이사를 간 집에 잘못 온 건가 싶을 정도로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바닥이 차서야, 차라리 밤하늘을 이불 삼아 바깥에 눕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몰락한 양반이라 하여도 비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선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이를 위해 의원이라도 불러다 줄 요량으로 밖으로 나간 언은 환자를 누일 이불을 찾아 초가의 다른 방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도둑이라도 맞은 것인가.”
남자를 누인 방의 건넌방을 확인한 언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불을 켜서 확인할 촛대 하나 없는지라 바깥으로 들고 나와 달빛에 겨우 비춰 볼 수 있었다.
종이에 쓰인 글은 아마도 망자가 생전에 필사하던 내용인 듯했다.
“…이게 대체.”
몇 줄은 멀쩡히 쓴 듯한데 갈수록 필체가 무너져 종국엔 알아볼 수도 없이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손이 떨렸다고 하기엔 한양에서 가장 큰 세책점, 그곳에서도 다른 필사자들이 필체를 따라 할 정도로 잘나가던 필사자가 아니었던가.
삯도 부족하지 않게 챙겨 주었다는 세책점 주인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검안 내용에 따르면 채무 관계도 깨끗했다.
혹시 몰라 주워 온 종이도 잘 접어 소매 안쪽에 챙긴 언은 냉골에 누워 있는 환자를 위해 불이라도 지펴 주어야겠다 싶어 아궁이를 살폈다.
“투전이라도 한 건가.”
집 안에 남아나는 살림이 없는데 땔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기껏 현방(성균관 노비들이 경영하던 쇠고기 판매점)까지 가서 떼어 온 고기는 날로 먹게 생겼다. 투전에 빠졌다면 어떤 것을 해주든 또 남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말 터라 언은 우선 환자를 치료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 시간에 문을 연 의원이 있으려나.”
의원이며 약방이 많이 모여 있는 구리개(현 을지로)로 향하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머릿속으로는 순라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각 패의 순찰 지역과 시간을 계산했다.
밤공기에 갈라져 하늘거리는 살굿빛 도포 자락이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뭔가 느껴지느냐?”
한밤중에 나란히 허리를 숙이고 우물에 머리를 넣다시피 한 두 남녀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도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동행한 용은 달랐다.
“…오염됐어.”
“그야 이곳은 사람이 빠져 죽은 곳이니까.”
둘은 결국 검시소의 문을 약간 훼손시킨 뒤에야 포도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사체 조사가 빨리 끝난 덕에 더 앞서 투신 사건이 벌어진 우물까지 찾아왔다.
“정기도 없고. 물이라고 해서 좀 씻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물은 낮에 왔어야 했나. 두레박 대신 제등에 긴 끈을 달아 수면 위까지 내려 보았지만 도겸의 눈에 물속은 그저 시커먼 심연이었다.
그러나 청이 느낄 수 있는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라지기 전에 와 보아야 하지 않겠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도겸은 슬쩍 멀뚱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청을 살폈다.
…꼭 냄새를 잘 맡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라는 말을 꺼냈다간 이번에야말로 심장에 얼음 창이 박힐 테지.
가벼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으나 덕분에 꽉 막힌 사고에 환기는 됐다.
“초봄이라 아직 물이 차 죽은 지 며칠은 되어서야 떠올랐다더구나. 사체의 콧속에선 모래흙이 나왔고 물을 많이 마셔 배가 불러 있었다고 하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망자의 복색으로 여인이라는 것만 알아차릴 정도였지만 검시하던 중 우물의 입구에 쌓은 돌 틈에서 유서가 나와 비로소 망자의 신분이 확인되었지.”
사체가 물에 잠겨 있는 동안 근방의 사람들은 아마 의심 없이 이곳의 물을 길어다 마셨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옅은 구토감이 일었다. 결국 먼저 몸을 일으킨 도겸이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무원록에서는 시신의 머리가 아래에 있었는지, 위에 있었는지에 따라서도 자진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던데… 이 경우엔 우물이 비교적 넓고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내린 두레박에 걸려 사체의 자세가 바뀌어 확인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평소엔 물을 긷는 사람들로 늘 복작였을 우물가가 유난히 황량하고 싸늘해 보였다. 도겸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리며 팔짱을 꼈다.
정말 청이 말한 대로 부정한 기운이라도 들러붙은 걸까. 시답잖은 생각이 스쳐 갔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물을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근방의 사람들이 우물을 쓰지 못해 큰일이구나.”
짐짓 헛기침을 한 도겸이 다른 걱정을 꺼내었다. 가뜩이나 날이 가물어 역병의 위험이 높은 지금, 사체가 발견된 우물이라 관아에서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 사용치 못하게 막고 있다 하였다.
아마 근방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우물물을 전부 퍼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다시 물을 쓸 수야 있겠지만 위험이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닌지라 걱정이 됐다.
“이 물을 못 쓴다고?”
그때까지 말없이 우물 안을 내려다보던 청이 일어나 도겸에게 물었다. 당연한 소리에 도겸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빠져 부패된 물이라 자칫 마셨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다. 너도 오염되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
“하필 유서에 간택령을 이유로 자진한다는 내용이 있는지라 물을 쓰지 못하는 백성들의 원망이 전부 동궁으로 향할 테지.”
가만 생각하던 도겸은 오래 지나지 않아 적당한 대안을 모색해 냈다.
“아무래도 당장 내일부터 우리 집 대문을 열어 사람들이 마음껏 물을 길어 가도록 하여야겠다.”
“뭐? 그 물을 다 퍼 가게 한다고?”
청이 펄쩍 뛰며 정색하기에 도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마르지 않는 샘이지 않느냐. 설령 많이 퍼 간다 하여도 네가 쓰기에 부족할 일은… 무엇 하는 것이냐?”
대뜸 우물에 손을 뻗는 청 때문에 움찔 놀란 도겸은 반사적으로 그 작은 몸을 붙들 뻔했다. 물론 다음 순간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를 상기하고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이 우물을 정화하면 내 물을 함부로 퍼 갈 일은 없을 것 아니야.”
퉁명스럽게 대꾸한 청이 눈을 감았다. 도겸은 힘을 쓰려는 청을 말려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됐다.
“큰 힘을 쓰려는 것이라면 두어라. 무리해서 또 쓰러지면 어찌하려고.”
“걸러 내는 정도야 일도 아니니까 저거나 꺼내.”
청의 명령에 도겸이 줄을 당겨 등을 꺼냈다.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한 군소리가 따라붙었다.
“너는 그 자신감이 항상 과해 보이니 걱정이 되어 말이다.”
“나중에 그 말 후회하지나 마.”
마당의 샘물을 어찌나 아끼는지 청은 기어이 우물의 정화를 시도했다.
“어찌하려는 것이냐?”
“나는 물만 다룰 수 있어. 일단은 기분이 나빠도 이 우물 안의 벽부터 씻어 내야겠지.”
처음엔 손을 뻗기만 하고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내 우물 깊은 곳에서 물살이 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음 순간, 우물의 물이 입구까지 소용돌이치며 솟아올랐다. 다만 딱 청이 손을 뻗은 바로 아래까지였다. 우물 벽에 부딪힌 물이 튀어 뺨을 적시는데도 도겸은 멍하니 신기한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물을 한 곳으로 모아 꺼내고.”
약간 미간을 찌푸린 청이 눈을 감았다. 입구까지 솟구쳤던 물이 폭포수처럼 수직 하강하여 또한 잠시 소란한 소리가 났다. 얼마 가지 않아 청이 쫙 편 손을 천천히 위로 올리자 커다란 물 덩어리 하나가 우물 밖으로 떠올랐다.
덩어리는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일렁대면서도 쏟아지지 않고 허공을 떠다녔다. 다만 깨끗하지 않고 온갖 잡스러운 것이 섞여 지저분했다.
“여기서 다시 물만 분리해 내면 돼.”
청의 심호흡과 함께 쥐어짜듯 주먹을 꽉 쥐자 물 덩어리 아래로 조잡한 오물이 쏟아져 내렸다. 더러운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코끝에 역한 냄새가 풍겼다.
도겸은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면서도 눈 깜빡이는 것을 게을리해 가며 청이 정화를 마무리하는 것까지 살폈다.
“마셔 볼래?”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게 창백해진 청이 물 덩어리를 손바닥 위에 띄워 놓고 마실 것을 권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도겸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역하다 생각하였던 것을 잊고 그 물에 손을 대어 퍼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 마셨다.
“…시원하구나.”
몽롱한 정신이 번쩍 깰 정도로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다만 바닥에 쏟아진 오물의 냄새가 진동하는 터라 제대로 음미하기는 어려웠다.
도겸이 손을 쓰는 것과 달리 청은 그대로 입술을 대어 쭉 빨아들였다. 체구보다 훨씬 큰 물 덩어리가 금세 청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하아.”
청은 마치 십 리는 내달린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얼굴은 퍼렇게 질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괜찮은 것이냐?”
“뭐….”
묻는 순간 청이 또 코피를 주륵 쏟았다. 도겸이 놀라 붙들었지만 대충 옷소매로 닦아낸 그녀가 도움을 원치 않았다.
“됐어. 자고 나면 괜찮아져.”
“업히겠느냐? 집으로 가자꾸나.”
“됐다니까. 병자 취급하지 마. 겨우 이런 걸론 안 죽으니까. 밤새 돌아다닐 수도 있다고.”
그러더니 바닥에 쏟아진 오물을 보며 와락 미간을 구겼다.
“근데 저기서도 냄새가 나.”
물은 깨끗해졌지만 걸러 낸 오물이 입구에 널려 있으니 이를 어쩌나. 이러다간 깨끗한 우물로 만들어 놓은 보람이 없게 생겼다. 두겸은 우물 입구를 막아 놓았던 널빤지로라도 덮어 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파루가 칠 즈음 퍼낼 것을 가져와 치워 두면 되지 않을까. 몰래 부수고 나온 좌포청 검시소의 자물쇠 하며, 새벽녘에 할 일이 많았다.
“당연히 냄새가 나겠지. 나는 후각이 마비되다 못해 구역질이 날 듯한데.”
도겸이 막 커다란 널빤지를 가져다 바닥을 덮을 즈음이었다.
“그 약 냄새 말이야.”
청이 또다시 놀라운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