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6)화 (31/197)

아예 언을 입구 쪽으로 밀어 쫓아내는 통에 언이 다급히 은자를 꺼내 보였다.

“이거면.”

문을 닫으려다 말발굽 모양의 커다란 원보를 본 세책방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언은 유서와 대조해 볼 증좌가 필요했다.

“여기 있는 책을 몇 권이나 살 수 있겠나?”

되도록 많이.

***

사체를 안치시켜 놓은 검시소는 평범한 사람은 별다른 걸 느낄 수 없다 하여도 께름칙했는지 주변을 지나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깊숙한 곳까지 진입한 도겸과 청은 오작인도 자리를 비운 틈에 사체가 그득한 검시소 안으로 슬며시 들어섰다. 낮에 왔을 때의 느낌과 확연히 다르긴 했다.

“…대체 세자라는 인간이 너한테 뭐길래.”

근처에 다다를 즈음부터 불쾌해하던 청이 기어이 속마음을 내비쳤다.

“제 발로 이런 데까지 들어오는 거야.”

“내가 가족을 잃고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 곁을 지켜 주신 분이다.”

언을 따라 왔을 때 사체를 본 자리에 사체가 없어 여기저기 덮인 멍석을 열어 보던 도겸이 간단하게 답해 주었다.

“이젠 내가 곁을 지킬 차례이기에 내 몫을 다하는 것이지.”

벌써 가족에게 인계가 됐을 리는 없는데. 가뜩이나 어둑한 와중이라 사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뭘 그렇게 찾아?”

“아까 봤던 시신 말이다. 본 자리에 없어서 좀 찾아봐야 할 것 같구나.”

“여기 있는데.”

멍석 하나 열어 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청이 대뜸 사체 한 구를 턱짓했다. 도겸이 청이 가리킨 사체의 멍석을 열어 보니 과연 낮에 본 시신과 같았다.

“…본 적도 없는데 어찌 알았느냐?”

어둠 속에서 푸른 눈을 빛낸 청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이것도 너의 육감과 관련된 것이냐?”

그러자 청이 의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죽은 것은 살며 느낀 모든 감정을 담았던 그릇이나 마찬가지야. 숨이 끊어져도 남은 몸은 모든 걸 품고 있지. 완전히 흩어져 난 곳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

“그 흔적이 가장 짙을수록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겠지.”

다른 사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녀가 덧붙였다.

“저기 피 냄새가 짙은 것이 더 늦게 죽었는데, 저건 남자라 아닌 거고.”

청이 없었으면 꽤 헤맸을 것이다. 둘은 문제의 사체를 다시금 확인했다. 검시소 안에 켜진 어스름한 노란 등불이 비추어도 사체는 전혀 핏기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도겸은 초검의 문안에서 보았던 것을 반추하며 하나씩 설명을 해 나갔다.

“오랫동안 끼니를 거른 탓에 몹시 퀭하고 마른 상태라 하였다. 그 상태에서 목을 맨 것이고, 매듭은 두 번을 거듭 감아 묶은 전요액(纏繞縊)이라 목에 남은 상흔도 둘로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은 청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놓친 것이 없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망자가 목을 맨 새끼줄의 총장, 목을 두른 부분의 길이, 올가미를 만든 방법, 나무의 높이와 망자의 발끝으로부터 지면까지의 길이가 스쳐 갔다.

“혹시 몰라 산파를 불러 남성에게 겁탈을 당하였나 확인하게 하였지만 아니라고 하였다. 이곳저곳에 흐릿한 멍 자국이 있긴 하지만 맞아서 생긴 것은 아니라 하였고. 혹시 몰라 은비녀까지 식계(식도)에 꽂아 두고 확인하였지만 독성 반응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책을 아무리 많이 보았어도 실제로 발로 뛴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아무리 보아도 검안은 각종 무원록을 따라 착실히 잘 쓰여 있었다. 타살이라 볼 만한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가 빠졌잖아.”

그때 청이 지끈거린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짚었다.

“넌 이 냄새가 안 나?”

“왜 안 나겠느냐. 아무리 날이 아직 서늘한들 사체들이 부패하는 냄새가 안 날 수는 없을진대.”

“그거 말고.”

다시금 손가락 하나를 든 청이 사체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단번에 휙 그어 내렸다.

“전신에서 아주 진동을 하는데… 이 냄새, 뭔지는 모르는데 맡아 본 적 있어.”

“무슨 냄새?”

기억을 되짚는 중인지 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먹어 본 적 있어.”

“먹어 보다니?”

도겸이 재차 묻던 순간 청이 번쩍 눈을 떴다.

“누가 이쪽으로 와.”

“…뭐?”

따로 난 출구는 없었다. 오작인이라면 과거의 뼈아픈 경험 탓에 청렴결백하다 믿지 않기에 매수할 생각도 있었으나 다른 이라면 곤란했다. 도겸이 급히 둘러보는 사이에 청이 가볍게 제안했다.

“기절시키면 되잖아. 내가 할게.”

도겸이 다급히 팔을 뻗어 막으며 속닥거렸다.

“힘 조절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네가 하든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의 대응은 이후에 대처하기가….”

도겸이 고민할 즈음 그에게도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그가 결정을 내렸다.

“숨는 게 좋겠다.”

“뭐?”

도겸은 청을 바짝 당겨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멍석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나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경첩에 기름칠도 해 두지 않은 것인지 끼익하고 열리는 소음이 유난스럽게 귀를 자극했다. 인간보다 소음에 민감한 청이 도겸의 옷깃을 꽉 쥐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이건 왜 걷혀 있대? 아까 분명히 잘 덮어 두었는데… 괜히 께름하게.”

괜히 숨었다. 오작인이었다. 그렇다고 이제야 일어나 나가기엔 이미 사체인 척 멍석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있는지라 퍽 난감했다. 자박자박하는 발소리가 검시소 안을 둘러보는 듯했다. 자취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거, 곧 인정이야. 어서 나오라고!”

“아, 예예. 나갑니다요!”

마무리 정리를 하러 들어왔던 건지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몰래 숨는 일은 처음인지라 짧은 사이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제가 있다면 문이 닫히는 걸로도 모자라 밖에서 걸어 잠그는 소리까지 들린 게 아닐까.

“내 이럴 줄… 넌 왜 쉬운 길을 돌아가려 해?”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품을 벗어난 청이 날 선 목소리로 도겸을 비난하며 먼저 일어났다.

“가끔은 돌아갈 필요도 있는 것이다. 아까 그 사람을 기절시켰다면 그다음에 나타난 이는?”

사체들이 즐비한 곳에서, 사체처럼 차가운 이를 안고 있던 도겸은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청의 뒷모습은 마치 죽었다 깨어난 것처럼 냉정하기만 했다.

“…연달아 기절시키려 소란을 일으켰다면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여길 들어왔어?”

“그거야 네가…!”

인정이 친 뒤에 몰래 들어왔다면 조용히 볼일을 보고 나갔을 것 아닌가. 도겸은 청을 이용하는 대신 치러야 할 마땅한 대가라 생각하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무슨 냄새가 났다는 것이냐?”

“나를 산으로 데리고 간 녀석들이 먹인 술 냄새.”

“술?”

“모르겠어? 아주 절어 있는데…. 아, 그래서 네가 달고 온 죽음의 냄새가 더 독했나?”

아무리 용보다 감각이 무딘들 술 냄새를 모를까. 도겸은 청이 인간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술 냄새는 전혀….”

무어라 반박하려던 차에 떠올랐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놈들, 반반한 처녀들 납치해다 약까지 먹여 가면서 아주 괴랄하게 노는, 잔혹한 놈들입니다요, 나리!”

“…약.”

창백해지는 도겸을 본 청이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물었다.

“약?”

“…그건 술이 아니었다.”

직전까지 사람을 무시한다 생각하여 화가 났던 것 같은데, 이번엔 이유도 모를 천불이 끓었다.

“술맛이었는데?”

“앞으로는!”

천진하게 구는 청에게 도겸은 저도 모르게 눌러 참지 못한 화를 터트렸다.

“절대 낯선 이가 주는 것을 먹지도, 받지도 말거라. 알았느냐?”

난데없이 화를 내는 도겸이 이해되지 않을 게 분명한 청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작인이 불을 전부 꺼 놓고 나간지라 어두컴컴한 검시소 안은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청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짐승처럼 푸른 눈빛의 안광이 선명했으니까.

“…알았어.”

당연히 문제없다, 그 정도는 인간보다 뛰어난 육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둥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때 야금을 알리는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 중 첫 종이 울렸다.

인정이었다.

***

“계시오?”

멀리서 인정이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언은 이가 빠지듯 듬성듬성한 싸리문 밖에 서서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불이 꺼진 초가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한 손엔 서책 꾸러미를, 다른 손엔 고깃덩이를 들고 있던 언은 싸리문 안쪽에 고기를 걸어 놓고 돌아섰다. 주인이 늦어 들개가 뜯어 먹어 버린들 별수 없었다.

그래도 꼭 장례를 치르는 데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어떤 부모가 자식 잃고 두 다리 뻗고 자겠냐만….”

착잡한 속을 게워 내듯 쪽빛 하늘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차, 저만치서 누군가가 휘청휘청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야금(夜禁, 야간 통행 금지령)을 피해 돌아온 듯한 이는 다름 아닌 언이 서 있는 집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시오?”

그러나 미처 닿기도 전에 정말로 털썩 쓰러지는 게 아닌가. 언은 들고 있던 책도 내던지고 쓰러진 이를 부축했다. 꼭 이렇게 필요할 때 익위사를 두고 나오는 게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으….”

“이보시오. 괜찮소?”

비쩍 마른 초로의 남자는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탓인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슬쩍 물어보았다.

“그, 혹시 최가 진아 낭자의 아비 되오?”

그때까지만 해도 언은 아비가 딸을 잃은 충격으로 고주망태가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아비가 슬픔에 잠겨, 제정신이 아니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지, 진아… 내 딸….”

그런데 이상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만취 상태라기엔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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