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도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인 듯했다. 도겸은 마음이 급했지만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최대한 씻고 올 테니 설명 좀 해 줄 수 있겠느냐?”
“뭐… 그러든지.”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좀 낫지 않을까. 서둘러 목욕을 위해 나가는데 뒤에서 청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오라버니.”
“뭐?”
재깍 돌아보자 마뜩찮은 표정의 청이 도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 머리칼이며 눈동자는 다시 푸른색으로 일렁였다.
“불.”
“…불?”
도통 싫어하는 것을 입에 담기에 의아하다 생각하던 차였다.
“물보다는 불을 쬐는 게 좋겠어.”
“어찌하여?”
청이 반지를 낀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어둑해진 방 안에서 빛을 전혀 받지 않은 반지가 존재감을 과시하듯 번개처럼 번쩍였다.
“이게 불의 신물이니까 주변의 기운을 다스린다면 물보다는 불이 더 강할 것 아니야.”
도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편이었으나 그 이야기를 하는 이가 다름 아닌 청이기에 믿기로 했다.
“…그리하마.”
솔직히는 감지하지 못하기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다 생각했다. 그저 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도겸은 서둘러 문밖으로 나섰다.
***
“나리, 여기 계셨습니까?”
사랑채 아궁이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도겸을 발견한 행랑아범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제가 불을 잘 떼 놓았는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요?”
“아닐세. 그저… 몸이 좀 찬 듯하여.”
“어디 좋지 않으십니까? 목욕물이 찼던 게지요! 그럼 방으로 가셔야지 어찌 이곳에 계신답니까. 어서 방으로 드시지요. 제가 이부자리를 봐드리겠습니다.”
“몸이 상한 것이 아니네. 물이 찼던 것도 아니고. 그저 불을 보고 있으니….”
도겸은 차마 부정한 기운을 지우기 위해 불을 쬐고 있노라 말할 수가 없었다. 사소한 미신조차도 믿지 않고 살아온 그였기에 더더욱.
“…복잡한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말이네.”
“그럼 불이라도 더 피워 드리겠습니다.”
행랑아범은 더 이상 도겸을 방으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엉거주춤한 자세로 도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장작을 더 넣었다.
“아침도 거르고 나가셨는데, 밖에서 무어 드신 건 있으십니까?”
“바깥 음식을 좋아하는 동행인이 있어 주막에 들렀었네.”
“급한 일이라 하신 것이 저하를 뵙는 일이었군요.”
“그렇게 됐네.”
복잡한 생각 정리를 하고 있다는 말을 기억했는지 행랑아범은 간단한 의문을 푼 뒤 입을 다물고 불을 뒤적이기만 했다. 불은 장작을 양분 삼아 더욱 빨갛게 타오르며 마른 열기를 뿜어댔다.
정말 이렇게 한다고 부정한 기운이 씻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음에 내심 한탄스러워하던 차 가만 아궁이를 뒤적이던 행랑아범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무가 좋은 건가, 아주 활활 타는구만….”
도겸은 놓치지 않고 슬쩍 말을 얹었다.
“무어, 평소랑 다른 게 있는 건가?”
“글쎄요. 요즘 날이 가물어 그런가 유독 불이 금방 붙는 데다 아주 무섭게 타고… 또 보통은 불씨 안 꺼트리고 살려 놓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요즘은 신기하게 까만 숯이 돼서도 아침까지 타고 있었습니다요.”
“…….”
“저야 불씨 꺼질 걱정이 없으니 좋긴 한데….”
행랑아범이 도겸의 눈치를 살폈다. 이 집 자체가 한 번 전소되어 다시 지은 바가 있기 때문일 듯싶었다.
그러나 정작 도겸은 청이 했던 말을 생각하느라 과거의 상처를 반추할 겨를이 없었다.
“이게 불의 신물이니까 주변의 기운을 다스린다면 물보다는 불이 더 정기가 강할 것 아니야.”
저도 모르게 깨끗하게 씻은 팔을 쓸어내렸다.
“…정말, 씻기는 것인가.”
“예?”
멍하니 중얼거리는 도겸의 말을 잘 못 들은 행랑아범이 반문했다. 도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러고 보니 나리, 평소 불 근처엔 한 걸음도 가까이 오지 않으셨는데 오늘은 별일이 아닙니까?”
“아….”
뒤늦게 의식한 도겸은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매일 꿈에서 저를 집어삼킬 듯이 타오르는 불길을.
그리고 청이 곁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꾼 이후 아직까진 그 꿈을 꾼 적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나, 나리?”
도겸이 벌떡 일어나자 급히 따르던 행랑아범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우뚱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옷이 탄 겁니까?”
“…아닐세.”
여전히 눈에 보이거나 뭔가 느껴지는 것은 없었지만 이쯤 하면 된 것 같았다. 청이 다 안 씻어졌다 타박하더라도 항변할 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았나. 도겸은 괜스레 오싹거리는 기분을 털어 내며 사랑으로 들어갔다.
불을 보며 멍하니 생각한 덕에 머릿속 역시 어느 정도 정리된 채였다.
***
언은 종일 조사를 다니느라 밀린 일과를 모두 소화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넋이 나가 있었다.
“저하.”
“…….”
벌써부터 상소가 올라온다고 하였다.
간택령이 사람을 죽인다고.
“저하, 분부하신 대로 한성부와 포도청의 관원들에게 닭백숙을 내렸나이다.”
그리고 오전부터 해가 넘어갈 즈음까지 언은 도겸과 함께 자진한 처자들의 사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검시소를 찾았었다.
와중에 우물에 빠져 죽은 이는 이미 검시를 끝내고 장례를 치르고 있기까지 했다.
“저하!”
“어?”
정신을 차려 보니 동궁 내관인 유 내관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세자를 일깨운 내관은 더없이 걱정스러운 듯 축 처진 낯을 하고 있었다.
“어찌 그리 사색에 잠겨 계시옵니까? 아까 석강 때도 서연관에게 지적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성현께는 송구한 일이오나….”
서안에 턱을 괸 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성들을 굽어살피고자 글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인데, 와중에 백성들을 잃고 있으니 말이네.”
“저하의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는 것도 왕이 부덕한 것이라 하는데, 어찌 간택에 큰 부담을 느껴 자진한 처자들의 죽음이 내 탓이 아니란 말인가?”
“하오나….”
“유 내관, 내가 오늘 어떤 생각으로 조사를 다녔는 줄 아나?”
“예?”
“자진하여 죽은 백성들을 위해 마음 쓰는 척, 내심으로는 그들이 죽임당했길 바라고 있었어.”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언이 창을 열었다. 밤공기는 아직 찼지만 그럼에도 뼛속까지 시리진 않았다. 계절은 확실히 봄으로 건너가는 중이었다.
그저, 저만 홀로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셨겠지요. 정말 간택령 때문에 자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이 당연히 저하께 도움이 되는 길일 테니까요.”
“간택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
“그것은 전하께오서….”
“내가 세자빈을 지켰다면 아바마마께서 간택령을 내리실 필요도 없었겠지.”
엄격하게 자신에게 모든 원인을 결부시키는 언이 안타까운 모양인지 유 내관은 끝까지 주군의 편에 섰다.
“부디,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하지는 마시옵소서. 그럼에도 다행인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흉년이 지속되는 가운데 쌀을 저렴하게 유통하는 상단 덕에 아직까지 금주령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든지.”
그리고 어떻게든 언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애를 썼다.
“저 상단의 쌀들을 사들여 값을 부풀려 되파는 몹쓸 장사치들로 몸살을 앓을 때도 행상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집집을 돌아다니며 헐값에 쌀을 팔아 주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물가가 치솟지 않을 수 있었고요.”
“…….”
“이 나라의 흉흉한 일들이 주상 전하와 저하의 은덕이 부족하여 생긴 일이라면 또한 좋은 일도 두 분 덕이 아니겠습니까.”
곁에 다가온 내관이 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풍요롭진 않지만, 함께 극복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궁을 내다보던 언도 마지못해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네.”
“그럼 너무 자책하지 마시옵고….”
“…그래서 말인데, 유 내관.”
“예?”
내관의 말을 끊은 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안 춥다니까 왜 이런 걸 쓰래?”
긴 머리를 사내처럼 상투를 틀고 이엄까지 눈썹이 가려질 정도로 눌러쓴 청은 불퉁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럼에도 도겸은 그 위에 패랭이까지 꼼꼼하게 씌워 주었다.
“추운 게 문제가 아니다. 머리 색을 어둡게 하려면 힘을 써야 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다지 어렵지도 않던데. 그냥 다른 인간들 눈에 띄지 않게 하면 되는 거 아냐?”
“힘은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것이다. 웬만하면 벗겨지지 않도록 하여라.”
작은 얼굴에 눈코입만 겨우 드러낸 청은 꼼짝없이 모자에 갇힌 모양새였다. 겉옷으로 입은 누빔 장옷은 소매를 두 번이나 접고 밑단이 발목까지 내려가 우스운 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겸이 가까운 틈에 코를 킁킁거린 그녀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불 냄새.”
“뭐?”
이제 냄새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증이 일었다. 도겸은 불꽃이 튀듯 따졌다.
“분명 불을 쬐라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 맞긴 해. 그러고도 그다지 깨끗해진 것 같진 않지만.”
툴툴대는 걸 보니 그저 불인 게 못마땅한 것이다. 외출 준비를 마친 둘은 함께 행랑아범이 열어 주는 대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대략적인 상황에 대하여는 미리 이야기를 해 둔지라 가는 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가만 주변을 둘러보며 도겸을 따르던 청이 대뜸 오늘 외출의 목적을 물은 것은, 북적대는 장터를 지나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 즈음이었다.
“그래서 지금 죽은 것을 보러 가자는 거야?”
“…그래.”
함께하는 첫 외출이 하필 이런 일이라니, 도겸도 계면쩍었다.
“아까 한 번 보고 오긴 했지만 너는 사람보다 더 다채롭게 보고 느낄 수 있으니 뭔가 다른 단서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