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3)화 (28/197)

“이럴 줄 알았습니다. 사건이 많으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들 결국 졸속으로 끝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분명 놓치는 것도 생길 테고요.”

도겸이 냉정하게 판단하는 와중에도 언은 먼 산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은 일이 많은 관원들에게 넉넉한 식사나 한 끼 마련해 주는 게 좋겠구먼. 궐에 들어가는 대로 준비해서 내려야겠어.”

“저하, 지금 이러실 때가….”

“죽은 이들도.”

너그러운, 그러나 지독히 슬픈 눈을 한 언이 도겸을 타일렀다.

“그리고 밤낮으로 고생하는 포청의 관원들도 모두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닌가. 나는 국본으로서 마땅히 슬퍼하고, 살펴야 할 의무가 있네. 결국은 이 사태도 내 부덕의 소치이니 말이야.”

“그럼 저하께서는 백성들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와중에 도겸은 섣불리 언의 감정에 공감하여 이입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냉철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소신이 충정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언이 별안간 심장 부근을 붙잡으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저하!”

곁을 굳게 지키던 좌익위가 대경하며 언을 붙들었다.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자네가 방금 불편하게 하였지 않나. 전엔 뼈를 부러트릴 듯이 모진 말을 하더니 이제는 심장을 못살게 구니 말이야.”

도겸은 불경하게도 붙잡았던 언의 팔을 내치듯이 밀어냈다.

“농담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까 잘 봐두었겠지?”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이 일어난 언이 괜스레 옷을 털어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직전에 당한 게 조금 분한지라 알면서도 굳이 반문하는 도겸을 보며 세자가 눈썹을 치켜떴다.

“직전까지 보다가 나온 검안서의 초안 말일세. 난 자네가 제대로 외울 줄 알고 보는 둥 마는 둥 했단 말이지.”

시선 하나 맞추지 않았음에도 생각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피식 웃은 도겸은 몸을 숙이며 손을 펼쳐 공손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제대로 봐 두었습니다. 일단 오늘 사체를 발견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가지.”

***

“나리, 이제 오십니까?”

대문을 들어서는 도겸은 먼 거리를 거의 달려오다시피 한지라 가쁜 숨을 들이켜기 바빴다.

“부득이 일이 좀 길어졌네.”

문을 열어 준 행랑아범에게 대충 대꾸한 그가 신경 쓰는 곳은 따로 있었다.

“청이는 어디 있나?”

오전 중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으나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던 때였으니 말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나 있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어디 계시긴요. 나리께서 사랑에 있는 책을 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종일, 책을 보고 있다고?”

물속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한자리에 있을 위인이던가. 겪은 바가 있다 보니 자연히 의심이 됐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일단 사랑으로 향하는데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행랑아범이 걱정을 불식해 주었다.

“혹시 전처럼 말없이 사라지실까 싶어 중간중간 순이가 들어가 간식도 드리고, 물 주전자도 갈아 드리고 했습니다. 아까는 확인하고 나오라고 했더니 이 녀석이 들어가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내가 가겠네.”

행랑아범이 직접 가 보려고 하기에 도겸은 만류하며 거의 뛰다시피 사랑 마당을 가로질렀다. 바쁜 걸음과 달리 머릿속은 긴장으로 하얗게 비워진 채였다.

종일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와 앞으로 처리해야 할 것들에 대한 걱정은 청이 방에 잘 있을지에 대한 걱정에 밀려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청아, 안에 있느냐?”

마음이 급한지라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문을 여는 손이 더 빨랐다. 두 손으로 다급히 문을 열고 보이는 방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거름의 무렵이라 그런지, 붉은 볕이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보료 위에 엎드린 청은 도겸을 보지도 않고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곁엔 순이가 벌러덩 드러누워 곤히 잠든 채였다.

“정말 지금까지 책을 보고 있었느냐?”

도겸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예상 밖에 지극히 평화로운 광경인지라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해졌다.

“보고 있으라며.”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청은 도리어 누군가의 등장이 귀찮은 듯했다. 도겸은 갓끈을 풀어내며 안으로 들어가 곁에 앉았다.

“미안하구나. 생각보다 늦어져 오늘 수업도 제대로 못 하였으니.”

“뭐, 됐어. 언문이라는 건 대충 익힌 것 같으니까.”

“그래?”

도겸은 슬쩍 청이 읽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폈다.

“단어만 읽고 쓸 줄 알지 긴 글을 읽는 건 잘 안 되길래 얘한테 읽게 시켰어. 들으면서 다시 보니까 이해가 되던데.”

…어디서 찾은 것인지, 하필 저는 읽어 보지도 않은 출처 모를 염정 소설이었다. 책을 찾아 읽으랬더니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해 보관해 둔 것까지 찾아낸 듯싶었다.

어머니야 글을 많이 보신 분이라 상관없었지만 이제 막 조선의 문물을 익히는 청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았다.

“재미는 있느냐?”

“뭐… 그다지.”

시큰둥하게 답하면서도 청은 내도록 도겸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인데.”

도겸은 슬쩍 아직 청이 읽지 않은 듯한 소설책을 뒤로 숨기며 물었다.

“그 책 속의 이야기들이 전부 실제로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청이 불만스레 도겸에게 따져 물었다.

“무슨 처니 첩이니, 남자는 왜 이렇게 반려를 많이 얻어?”

“무어?”

“이거 말이야.”

청은 읽던 책을 도겸에게 냅다 집어 던지다시피 했다. 얼결에 받아 든 책의 제목은 <곽장양문록>이었다. 그것도 무려 열 권짜리 책의 마지막 권이 아닌가.

“이렇게 반려 여럿 들였다가 시기하고 질투해서 음해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반려를 하나만 들였어야지. 그리고 이 한 씨라는 인간은 왜 여러 여자랑 혼인한 남자를 탓하지 않고 다른 처를 질투해? 이해가 안 돼.”

“아, 그것은….”

재미있냐 물었더니 ‘그다지’라고 대답한 사람치고는 굉장히, 아니 지나치게 몰두한 모습이 아닌가. 도겸은 기가 막혔지만 가능한 한 차분히 답해 주었다.

“본래 이 땅에는 축첩 제도가 있어 남성은 여러 여성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지. 그리고 칠거(七去)라 하여 아내가 일곱 가지의 나쁜 행동을 저지르면 지아비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소설은 칠거를 어기면 어찌 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그러한 행동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 같구나. 사실 나는….”

“그럼 이 땅의 여자는 여러 남자를 반려로 삼을 수 없어?”

더 말하기도 전에 청이 툭 끊고 들어왔다.

“그렇지.”

“왜?”

“그건….”

가만 생각하던 도겸은 청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설명했다.

“너의 세계가 힘을 가진 자 위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느냐?”

“전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더니.”

뭔가 만족스럽게 해갈이 되지 않았는지 눈썹을 들었다 내린 청이 주전자를 찾았다.

“말 그대로 ‘전부’는 아닌 것이지.”

“…생각보다 훨씬 불순한 미물이었구나, 인간은.”

“불순하다니.”

물그릇을 거칠 생각도 없는지 청은 고주망태가 된 이가 하듯 주전자를 높게 들어 물을 입으로 쏟아 넣었다.

“아니…!”

도겸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하라 했던 터라 더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싫은 소리를 하기엔 방 안에 고즈넉하게 스며든 따스한 볕이 너무 좋지 않나.

되도록 좋은 소리만 하고 싶었다. 어차피 남산댁이 한 번 가르치고 나면 바로 교정이 될 문제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 물이 저 작은 몸에 다 들어가는 건가 싶어 순간 체면도 잊고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주전자 하나를 깨끗하게 비운 청이 입가에 남은 물기까지 혀로 깨끗하게 핥아 마시며 물었다.

“왜?”

“…아니다.”

“너, 근데 나한테는 사람 해하지 말라고 해 놓고.”

물을 마신 청이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그렇게 독한 죽음의 냄새를 달고 와?”

“뭐?”

“하여간에 너는 기분 나쁜 냄새만 줄줄 달고 다니는구나. 그래서는 오래 못 살 텐데.”

도겸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순이가 들을까 걱정하여 주의할 겨를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주전자를 내려놓는 청의 손등을 덥석 잡았다.

“죽음의 냄새라니. 그건 어떻게 느끼는 것이냐?”

물론 청은 질색하며 손을 떼어 냈다.

“불결하게 뭐 하는 짓이야?”

“부, 불결?”

억울했다. 늘 모든 순간에 청렴하고 청결하여야 한다, 익히 배우고 자란 도겸인지라 홀로 남아도 그 부분은 놓치지 않았거늘. 전부터 기분이 나쁘다고 하질 않나, 불결하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이젠 억울함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했다.

“네가 아무리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 하여 다른 이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말을 삼갈 줄도 모른단 말이냐?”

“그럼 네가 나쁜 기운을 달고 오지 않으면 될 일이잖아.”

“너…!”

좋던 볕도 이제 흩어지며 어둑해지고 있으니 더 감상에 젖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 짚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가뜩이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문제조차 너무 많았다. 도겸은 재빨리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당장 끓는 감정을 드러낸들 좁은 아량을 들키고 인품을 잃는 것밖에 더 되는가. 참을 인을 새긴 그가 마음과 숨결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러니 더 자세히 설명해다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이냐?”

“구체적으로?”

잠시 고민하던 청은 앞에 있던 책을 부채 삼아 도겸을 뒤로 물렸다.

“그전에 좀 씻고 오면 안 돼? 순수한 정기로 씻어 내면 되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