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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2)화 (27/197)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낸 순이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웃었다.

“지를 살려 준 은인인데 아자씨가 남긴 게 요 말투밖에 없잖아유. 그래서 평생 아자씨 안 잊으려구 기억나는 대로 쓰는 거여유. 지가 정작 충청도는 한 번두 가 본 적이 없구먼유?”

청이 울지 말라고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는지 아이는 최대한 울지 않은 척 부러 밝게 주절댔다.

“나리랑은 어떻게 만났는지 말씀 안 드렸쥬? 나리께서 장원 급제 하고 해주로 암행어사를 오신 것두 모르구 지가 나리의 주머니를 털려구 했지 뭐여유. 날래게 달려서 잘 도망쳤다 싶을 적에 뒷덜미를 이래 딱!”

제 옷깃을 잡아 올린 순이의 눈빛은 과거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잡아 올리면서 그러시는 거여유. ‘손발이 제법 빠른 아이로구나’라구.”

근엄한 표정을 지은 아이가 목소리를 굵직하게 내며 도겸을 따라 했다. 확실히 <용비어천가>보다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순이가 이야기를 하는 데 재주가 있기도 했다.

말을 조리 있고 요연하게 하진 못해도 몰입하게 하고 있지 않나. 청은 저도 모르게 순이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머리털 나구 그렇게 훤칠허구 멋진 분은 처음 보는지라 넋 놓구 있다가 도망갈 생각도 못 했구먼유.”

이야기하다 갑자기 도겸을 처음 본 소감으로 빠지는 걸 보면 확실히 재능은 있으나 집중력은 조금 부족해 보였다.

“무튼 나리께서 제 사정을 들으시고는 진장을 조사허신 거여유. 그때 나리가 해주를 탈탈 털어서 그때 낭청 놈은 관직도 삭탈되구 어디 관노로 갔다고 들었어유. 그놈이랑 같이 나쁜 짓 하던 관리들까지 전부 싹 물갈이가 됐쥬. 해주 어르신께서는 그때 해주 목사로 임명돼서 가신 거구유.”

주변에 어질러져 있던 책을 차곡차곡 쌓은 순이가 알아볼 수 있는 책 제목을 보며 헤실거렸다.

“지는 은혜 갚겠다구 나리 바짓가랑이 붙잡고 뭐든 시켜만 달라구, 조르고 졸라서 한양까지 왔구먼유. 요 언문도 나리께서 가르쳐 주셨어유. 한문도 배우고 싶으면 가르쳐 주신다구 허셨는데, 워낙 바쁘신 분이라 감히 청하지는 못혔구먼유.”

청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자신이 떠들어서 방해한 탓이라 생각했는지 순이가 재차 코를 훌쩍이며 일어났다.

“지는 그럼 나가 볼게유. 편히 책 보셔유.”

“재미없는데.”

“그려유? 그, 언문으로 된 이야기책은 재밌는 게 많을 텐데 하나 찾아 드려유?”

“이야기책?”

“보자… 나리께서는 일절 안 보시지만 예전 주인마님께서 보시던 책 중에 남은 게 있었거든유.”

기껏 쌓아 놓은 책더미를 다시 넘어트려 가며 순이가 뭔가를 찾았다.

“찾았어유!”

순이가 찾아낸 책은 표지가 낡아 제목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청은 가뜩이나 익숙하지 않은 문자를 더듬더듬 읽어 냈다.

“오… 오루모?”

“‘옥루몽’! ‘옥루몽’이라 읽는구먼유.”

“옹누몽?”

“옥, 루, 몽이에유. 그리고 이것은 ‘금방울전’이라고 바다 용왕의 아들, 딸이 나와유.”

“용왕? 그거부터 볼래.”

청이 굉장한 흥미를 보이자 순이가 <금방울전> 몇 권을 더 찾아 주었다.

“많이 보면 금방금방 늘어유.”

책을 보기 좋게 순서대로 놓아준 순이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지체 없이 노란 표지를 넘긴 청은 흐린 글씨를 볼 때마다 미간을 찌푸려 가며 조금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화설 대원 지정 말에 장원이라 하는 자 있었는데….”

글자를 몰라도 소리 내어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맥락이 이해됐다. 문자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청은 문자를 읽어 가며 조금씩 인간이 만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용비어천가>를 읽으며 반쯤 잠들 뻔했던 눈은 어느새 선명해진 채였다.

***

“그저께 남산골 우물에서 발견된 변사체와 오늘 새벽 배오개에서 발견된 처자의 사체 모두….”

사건을 맡은 종사관이 세자에게 검안(檢案, 변사한 시신을 검사하거나 검시한 결과를 기록한 서류)의 초안을 꺼내 보이며 결론부터 설명했다.

“자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타살이라면 연쇄 살인이 우려되어 심각한 사안이겠지만 자살은 자살대로 문제였다. 도겸이 반사적으로 상석에 앉은 언의 눈치를 살폈다. 언은 그저 슬퍼 보이기만 했다.

“검험(檢驗, 피해자의 시체를 검사하고 사망 원인을 밝혀 검안서를 쓰던 일)이 벌써 끝났다고? 그저께 발견한 처자의 사체면 몰라도 오늘 발견한 시신은 벌써 복검까지 마쳐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인가?”

“초검까지 했고 제가 검시했습니다. 복검은 한성부에서 할 예정이오나 아마 결과는 같을 것입니다.”

“어째서?”

“본격적인 검시를 하기 전에 본 사체도 깨끗했고, 망자가 여성이라 저는 밖에서 검시 내용을 들었사온데 직접 본 오작인(수령이 시체를 조사할 때 곁에서 보조하는 하인)과 다모 말로도 목을 맨 흔적을 제외하고는 저항흔이라든지 별다른 상처도 없었다 하였고요. 망자의 주변을 조사하였으나 특이 사항이 발견된바 또한 없습니다.”

종사관이 여러 문서 사이에 끼워져 있던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무엇보다 유서가 있었습니다. 평소 필사 일을 하던 처자라 필체는 아비뿐만 아니라 세책방 주인도 단박에 알아볼 정도였고요.”

그러나 종사관은 쉽사리 처자가 죽음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직접 입을 열기 꺼려했다.

“한데 그, 내용이….”

언의 눈치를 보는 게 무슨 내용일지 뻔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언이 주저 없이 유서를 꺼내어 펼쳤다. 순식간에 읽어 내리는 눈빛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연이은 흉년으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와중에 내려진 간택령은 마치 폐부에 물이 들이차는 것과 같으니….”

죽음을 택한 원인이 모두 세자 그리고 간택령을 내린 왕에게 있다는 의미였다. 종사관은 고개를 숙였고, 언은 기어이 참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결론이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물론 도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검안을 가져와 재빨리 눈으로 훑으며 반박했다.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을 토대로 모든 정황을 신중히 살펴보기에 앞서 유서 하나로 속단한 것은 아닙니까? ‘무원록’에서는 사람을 살해한 후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조작하는 조액사(弔縊死)를 특히 경계하고 면밀히 수사하여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 같아 맹렬히 따지려 들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조사한 것치고는 검시가 상당히 꼼꼼하게 진행돼 있었다. 산파를 불러 처녀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단계를 거쳤다는 기록까지 눈에 들어왔다.

검시 장부상으로는 목이 졸린 흔적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상흔도 보이지 않았다.

“문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망자의 목에 남은 액흔(목이 졸린 흔적)은 두 번 둘러 묶은 매듭의 모양과 같았습니다. 사체를 내린 포졸들이 망자가 목을 맨 돌배나무가 혼자 목을 매기에 적당한 높이인지, 발을 딛고 선 것이 있는지도 전부 재어서 확인하였고요.”

도겸은 특히나 검안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조작된 바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유서에 지나치게 무게를 싣고 있는 건 맞지 않습니까? 필사를 하던 이라면 그 필체를 아는 누구나 망자의 글씨를 따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액흔은 보통의 경우와 같다 하여 반드시 자살이라 판별할 수도 없다고 ‘증수무원록’에 쓰여 있기도 합니다.”

“좌포청의 다모가 목을 매어 죽은 여인의 사체를 다수 검시하여 본바, 오늘 나온 망자의 몸에 남은 액흔은 통상 자살의 경우와 같다고 하여 그리 기록한 것입니다.”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는 종사관의 결정을 흔들 반증이 필요해 보였다. 직접 사체를 보면 좋겠지만 하필 여인의 사체인지라, 아무리 망자라 하여 함부로 그 몸을 살필 수가 없어 답답했다.

“목을 매달았던 나무줄기의 상흔은 어떠하였습니까?”

“끈을 매단 부분에 나무껍질이 이리저리 긁히고 벗겨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죽기를 결심하였다 해도 숨이 넘어가기 전까지 발버둥 치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지요.”

가만 듣고 있던 언이 드디어 궁금한 것을 종사관에게 하문했다.

“생전에 망자와 원한 관계가 있던 이는 없었나?”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없었습니다. 그건 앞서 우물에 빠져 죽은 이도 마찬가지였고요.”

“그 사람의 검안은 끝났나?”

“예. 한성부에서 복검을 마치고 상부로 검안을 올렸을 것입니다.”

“또한 속행하였군.”

“송구하오나, 저하.”

언의 대답이 비난처럼 들렸는지 종사관이 주저하며 조심스레 아뢰었다.

“저하께서도 아실지는 모르겠사오나 요즘 도성 안팎에 이런 변사 사건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흉년이 지속되다 보니 굶어 죽는 걸인들, 입을 줄이기 위해 목을 매거나 투신하는 자들이 어찌나 많은지요. 저희 포도청을 비롯한 형조는 물론 한성부까지 거의 마비될 지경입니다. 검시소는 사체를 들일 자리도 없고요. 그나마 양반의 신분이나 되니 초검에 복검까지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는 것인가. 언은 물론 도겸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공중의 위생이 나빠지고, 결국 역병으로 이어진다. 당장 세자의 안위만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종사관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밤낮으로 비번도 없이 일하는 겐가?”

언의 물음에 종사관이 무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일단은….”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도 미안했는지 언이 먼저 일어났다. 그를 따라 줄줄이 일어나 예를 차렸다.

“사정을 알았으니 나는 그만 궐로 돌아가 검안을 기다리고 있겠네.”

“긴히 살피어 결코 부족함 없이 마무리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수고하게.”

왕의 행차를 호위하러 간 포도대장을 대신하여 포청에 남아 있던 종사관들 모두가 나와 배웅했다. 언은 포청을 나서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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