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1)화 (26/197)

“그럼 다녀오겠네.”

“말을 타고 가시지 않고요?”

“이 시간이면 당상관들 교자들로 길이 꽉 막혀 있을 텐데, 알면서 그러나?”

“아… 소인이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저 편히 가시면 좋을 듯하여.”

“도성 한복판이라 도리어 번잡하기만 하겠지.”

걱정이 많은 행랑아범을 뒤로하고 대문으로 향할 즈음이었다.

“어디 가?”

밤늦게까지 글공부를 하느라 더 잘 줄 알았더니, 오늘따라 일찍이 머리까지 곱게 땋아 댕기를 두른 청이 중문을 폴짝 넘어왔다.

“오전에 공부하자며.”

도겸은 깜짝 놀라 나가려던 것도 잊고 청에게 다가섰다.

“설마, 공부하려고 일찍 일어난 것이냐?”

기대하는 도겸의 뜻대로 대답해 주긴 싫었는지 청이 딴청을 피웠다.

“아니, 뭐… 오늘은 용이 나오는 ‘용비어천가’ 읽게 해 준다며.”

간밤에 글자를 익히고 단어 쓰기, 읽기까지 배운 터였다. 남산댁의 말대로 학습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글자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어를 만들고 받아쓰는 것까지 하는 청을 보며 도겸은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랬지. 근데 급한 일이 생겨서….”

다녀오는 동안 남산댁에게 청의 예절 교육을 부탁할까 고민하던 도겸은 생각을 바꾸었다.

“내 방에 어제 배운 정음으로 쓰인 서책이 많이 있으니 보고 있겠느냐? 내 금방 다녀오마.”

청에게 책을 권하는 이유는 글공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사람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남산댁이 위화감을 느낄 정도라면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삼간택까지 보내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청은 지금보다 더 조선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어딘가 모르게 뚱한 표정이었지만 청은 도겸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을 파악하고 오면 되기에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그럼 다녀오마.”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도겸은 행랑아범이 열어 주는 대문을 지나 바삐 걸음을 옮겼다. 큰길로 나섰다간 고위 관료들과 줄줄이 마주쳐 인사하느라 시간만 낭비할 게 뻔해 피맛길을 택해 좌포청으로 향했다.

***

“어떻게 오셨습니까?”

도겸의 행색을 보자마자 양반이라 판단한 문졸이 마중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뛰어나왔다. 따로 봉급이 없는 직책임을 알기에 슬쩍 돈을 주고 정보를 캘 생각도 하고 있던 도겸은 허리부터 꼿꼿하게 세웠다.

“크흠, 나는 그….”

“최 직각?”

가슴을 부풀려 구애하는 들꿩처럼 큰 숨을 들이켠 도겸은 느닷없이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사레들린 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불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하!”

접선을 들고 있는 언 또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익위사 하나만을 대동한 채였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아마도….”

감히 국본을 내려다볼 수야 없기에, 도겸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허리부터 숙였다.

“저하와 같은 연유가 아닐까 합니다.”

“자네 비번인 날인 줄 알고 부러 부르지 않았네만… 심란한 와중에 반갑긴 하네.”

반색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착잡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도겸은 국본이기 전에 친우인 언이 걱정되어 한숨조차 눌러 참았다.

“저, 저하!”

눈치 빠른 문졸이 뛰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종사관이 뛰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이른 아침부터 세자 저하께서 좌포청까진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더없이 예를 갖추며 맞이했지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세자가 못마땅한 것이다. 도겸은 즉각 언을 안으로 모시지 않는 신하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으나 언은 내색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도성 내에서 연이어 젊은 처자들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들었네.”

“그렇습니다.”

“한데 알다시피 금혼령이 내려진 상황인 데다 변사자들이 모두 반가의 규수들이라 하여 내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네. 혹 문제가 있다면 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테니.”

“…예?”

종사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은 안쪽을 턱짓하며 앞장섰다.

“나머지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아, 예!”

먼저 문간을 넘어서는 언을 종사관이 허둥지둥 뒤따랐다. 도겸은 좌익위와 함께 세자를 따랐다.

세자가 함께한 이상 일찍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았다. 잠시 집에 두고 온 청이 생각났지만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아씨, 여기 계셔유?”

청을 찾아온 순이의 손엔 쟁반이 들려 있었다.

“아침도 안 자셔서 아주매가… 아니, 이게 다 뭐래유?”

보료 위에 엎드려 책장을 넘기는 청의 주변으로는 온갖 서책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엉망인 상태였다. 서안이며 서랍들이 전부 열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없었다면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을 거다.

“오라버니가 찾아서 보라고 했어.”

순이를 보지도 않고 글자를 읽어 나가는 청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책을 찾으셔야지, 방을 뒤지시면 우째유?”

“그게 그거 아니야? 전부 부수고 꺼냈어야 돼?”

“그 곱디고운 손으로 뭘 부순다고 그러셔유! 험한 말씀 마셔유.”

한숨을 폭 내쉰 순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서안 위에 간식 쟁반부터 올려놓고 앉았다. 그러곤 청이 대충 보고 던져 놓거나 아직 보지 않은 책들을 대강이나마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는 한자로 된 책들은 정리를 못 허는데 우째유.”

“왜 네가 해? 최도겸이 알아서 하겠지.”

“나리께선 나랏일 허시느라 바쁘시잖아유.”

도겸이 말한 <용비어천가>를 용케 찾아 읽던 청은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용 나온다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용의 이야기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최도겸의 말만 굳게 믿은 청은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용에 비유해 노래하는 내용만 그득했다.

단어만 보다가 문장으로 읽으려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인간의 말인지라 그런대로 띄엄띄엄 맥락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적응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 그래도.”

그만큼 이 땅의 인간들도 용이 가장 격이 높은 동물임은 아는 것이겠지. 그 부분은 썩 나쁘지 않아 도겸을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청은 재미없는 책을 덮고 서안 위에서 나는 정성 어린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맛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음식을 만들 때 들어갔을 정성이 제법 달달하기에 먹을 만했다. 그것이 청이 맛을 느끼는 기준이었다.

“근데 말이야.”

“말씀하셔유.”

가만히 엿을 깨물어 먹는 깨끗한 아이를 바라보던 청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거르지 않고 물었다.

“너는 말하는 게 왜 다른 사람과 달라?”

“지가유?”

“말씀하셔유. 지가유? 이러는 거. 내가 본 사람들 전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넌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무슨 차이야?”

“아, 지 말투 말이쥬.”

책을 정리하던 순이가 조금 민망했는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뺐다 하며 웃었다.

“사투리여유. 지방서 사는 사람들은 한양 사람들이랑은 말씨가 달라유. 지는 나리 따라서 한양으로 오기 전엔 해주에서 살았구먼유?”

“해주?”

해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해주 어르신이라면서 밤중에 찾아와 대뜸 청이 머리카락에 힘을 불어넣는 방법을 깨닫게 만든 사람 말이다.

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순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 지가 쓰는 말투는 해주 있는 황해도가 아니라 충청도 말씨여유. 나리랑 장터에서 만나기 전에… 그러니께 지가 진장에 있을 땐데, 실은….”

갑자기 풀이 죽은 순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기를 어려워했다. 청은 무심히 턱을 괸 채 엿이나 한 번 더 깨물 뿐이었다. 제가 물어보긴 했지만 아이가 말을 해도, 안 해도 그만이었으니까.

“실은, 지가 그때 표낭도로 살았구먼유.”

“표낭도?”

“그, 장터에서 지 염낭 들고 튄 놈 말이어유. 아씨께서 잡아주시기까지 허셨잖아유.”

“아, 그거.”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없으면 예쁜 것들을 하나도 구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순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무릎을 꿇은 채로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때 우리 진장에 있던 낭청(郎廳, 조선 후기에 실록청, 도감 등의 임시 기구에서 실무를 맡아 보던 당하관 벼슬)이 툭허면은 애들을 패면서 표낭자 질을 시켰구먼유. 매일 남의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입에 풀칠도 못 혔어유. 하루걸러 하루는 꼼짝없이 쫄쫄 굶었는데….”

과거 생각이 났는지 순이의 코끝이 빨갛게 변했다.

“그때 우리 진장에 관노가 있었는데, 그 아자씨가 충청도 사람이었어유. 거기 있던 고아들 보다 훨씬 훨씬 많이 맞고 살면서도 지들 앞에서는 노상 웃던 그런 아자씨였는디… 자기도 굶으면서 뭐라도 생기면 꼭 감춰 뒀다가 나눠 주기도 허구 매질을 당할 때면은 낭청 놈이 다른 데 정신 팔리게 바람도 잡아 줬구먼유? 애들도 얼마나 좋아혔는지 몰러유.”

“…….”

“어느 날엔 그 낭청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는 술을 왕창 마시고 들어와서 빨래 방망이였는지 절굿공이였는지를 들고 애들을 죽어라 패는 거여유. 하필 그날은 지가 한 푼도 못 벌어 오는 바람에, 참말로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기어이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청의 눈빛이 심해처럼 어두워졌다.

“…아자씨가, 지를 감싸 줬어유.”

크게 울고 싶은 것을 꾹 참는지 턱이 덜덜 떨렸다. 천장을 보고 심호흡을 해가며 이미 터진 울음을 참던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몽둥이에 머리가 깨져서, 그 자리서 가 버렸슈. 지를 살리고… 그래 갔슈.”

“…….”

“종놈이라고 장례도 없이 그냥 멍석에 둘둘 말아 산에 갖다 묻었어유. 굴러다니는 목판에 이름이라두 새겨서 묘비를 세워 주고 싶었는데, 낭청 놈이 노상 쌍놈아, 쌍놈아 하고 불렀어서 이름두 모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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