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인간은 약해서 오래 못 살겠구나. 그러니 뭔가를 써두고 남기려 하겠지.”
또한 의외의 답인지라 이번엔 도겸이 되물었다.
“네가 살던 곳엔… 문자가 없느냐?”
“당연하지. 용은 모여 살지도 않고, 인간처럼 짧게 살지도 않으니까.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으니 남길 필요도 없고.”
말이 통한다고 하여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흔적이 지워지지는 않는 법이다. 자연스레 아까 남산댁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씨를 뫼시는데 감히 그때 일이 떠오르더군요. 아씨도 그 아이와 같이 사람의 외양을 했지만 ‘사람답게 사는 법’은 전혀 모르셨으니까요. 하나 아씨는 기본 적으로 소통을 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의아했습니다.”
소통을 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밖에.
“너는 개미가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어?”
당연했다.
“난 들을 수 있거든. 근데 무시하면 그만이라 걸러 듣고, 의식하지 않으니 굳이 죽일 필요도 못 느낄 뿐이야.”
청이 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개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으니까. 다만 상대의 모든 사정까지 파악하고 대화하는 게 아니기에 이렇게 잊을 만하면 툭툭 어긋나고 탄로 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도겸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가 써 놓은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청이 물었다.
“쓰는 모양을 보니 내가 본 것과는 다른데. 내가 본 것과 다른 문자인가?”
장터의 게판에 붙은 간택령의 방을 본 일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본 것이 한문이고 한자로 적은 글을 한문이라 한다. 내가 적고 있는 것은 다른 문자인 정음, 정음으로 쓴 글이 언문이고.”
청은 무표정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투명한 눈은 ‘인간들 참 복잡하게 산다’라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도겸은 조금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다시 진지하게 설명했다.
“한자부터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 전에 정음부터 읽을 줄 알아야 내가 없을 때도 네가 한자의 뜻과 음을 정음으로 주석을 달아 둔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 그만큼 쉽게 배우고 효용 또한 굉장한 문자이니 잘 보거라.”
도겸이 훈민정음의 자모음을 더 써서 보여 주려 했다. 그러나 너무 가늘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손바닥에 대고 쓰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별안간 적당한 수를 떠올렸다.
“청아, 지난밤처럼 손에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조금이면 충분하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청이 손바닥을 쫙 펴자 금방 그 위에 물방울이 맺혀 부풀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해!”
문제는 ‘조금’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금세 넘친 물이 청의 치맛자락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간신히 조절되었다.
“조금이라며?”
“이렇게 쓰려 함이다. 그러니 과할 필요가 없지.”
그 물을 손끝으로 찍은 도겸이 기왓장에 글자를 적어 나갔다. 비로소 기왓장 위에 선명한 글씨가 새겨졌다.
물론 금세 스며들어 제대로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청이 과정까지 모두 눈에 담을 테니 상관없었다. 도겸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천천히 적었다.
“이 문자는 오래전 이 나라의 선대왕께서 직접 창제하신 것이다. 한문을 익히기 어려운 백성들을 가련히 여기시어 이리 마음을 써 주신 게지.”
청은 가만 들으며 도겸의 손끝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달빛이 잘 드는 쪽으로 고쳐 앉은 도겸은 손가락을 붓 삼아, 기왓장을 종이 삼아 가르침을 이어 나갔다.
“정음은 총 스물여덟 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사람이 가진 신체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이 다섯 글자가 생겨났고… 이를 각각 ‘기역’, ‘니은’, ‘미음’, ‘시옷’, ‘이응’이라 읽는다. 해 보아라.”
“기역, 니은, 미음, 시옷, 이응.”
“읽는 말을 그대로 적으면 이렇게 된다. 보이느냐?”
“…이게 두 번씩 들어 있어.”
청의 하얀 손가락이 도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그대로 따랐다.
“그래. 읽는 말부터 해당되는 자음을 그대로 쓴 것이다. 여기서 다른 것은 모음이라 하는데, 이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사이에 서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기호로써 자음과 자음을 연결하지. 자음과 달리 발음하였을 때 입 안에서 걸리거나 부딪치는 곳 하나 없이 순하게 소리가 난다. 신기하지 않으냐?”
어쩌다 보니 설명을 하는 도겸이 더 신이 났다.
“그래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물은 없어?”
“뭐?”
청이 기왓장의 한 부분을 짚어냈다.
“하늘과 땅도 있고, 그사이에 사람도 있는데 왜 물은 없냐고.”
물 흐르듯 설명을 이어 나가던 도겸의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거야 내가 지은 것이 아니니 모르지…?”
“흠….”
청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죽었을 인간한테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딱 봐도 서운한 게 분명했다. 맥이 끊긴 차에 도겸은 급히 눈을 굴리며 청을 달랠 방법을 찾아냈다.
“보거라. 네 이름을 정음으로 적으면 이런 모양이다.”
조금 얼얼한 손끝을 재차 적신 도겸은 시옷을 쓰려다, 별안간 마음을 바꾸었다.
“…파랑은 이렇게 쓴다.”
가만 보기만 하던 이름의 주인도 이번엔 직접 손끝으로 제 이름을 적어 보았다.
“그래, 그렇게. 이 땅에서 파랑은 바다에서 치는 파도를 뜻하기도 하고, 파란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 너와 일맥상통한 뜻이지. 너의 세상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이냐?”
“몰라.”
늘 명확한 답을 내어놓던 청이 의외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부분에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지어 주신 이름이라. 그냥 그 이름이 나랑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그렇… 구나.”
어쩐지 반짝이는 눈망울이 침잠하는 듯했다. 도겸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 물은 모르겠지만 혹, 이 땅에서 용이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아느냐?”
청의 눈썹이 작게 씰룩였다.
“…그래?”
“그래서 대왕께서 이 글자를 만드시고 시험을 위해 처음으로 지은 글에도 용이 등장하지.”
눈썹이 반응한 다음엔 눈에 선 날이 조금 무뎌졌다. 도겸은 놓치지 않고 제자를 다스렸다.
“그걸 읽어 보고 싶지 않으냐?”
“읽어 보고 싶긴.”
청은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남은 글자 아직 다 설명 안 했잖아. 빨리 설명해.”
도겸은 슬쩍 미소 지으며 다시 청의 손바닥에 남은 물로 손끝을 적셨다.
“놀라지 말거라. 정음은 하룻밤이면 모두 깨우칠 수 있는 놀라운 글자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도겸이 다시금 글자를 적어 나갔다. 오래도록 바깥에 있다 손이 차가워지고 굳었지만 학업의 열의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단순히 배워야 하기에 배운다기보다는 둘 다 이 과정이 흥미롭게 느껴진 덕이었다.
두 사람이 기왓장을 내려다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틈에 노란 달은 바지런히 심해 색의 밤하늘을 유영해 기울어 갔다.
스승과 제자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봄도 한 발짝 더 다가온 밤이었다.
***
“새벽부터 저자가 어수선하더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행랑아범이 도겸에게 간밤에 있었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글쎄, 어젯밤에 배나무 고개에서 웬 처자가 목을 매 죽었다는 게 아닙니까?”
“…무어?”
“어제뿐만이 아닙니다. 엊그제는 남산골에서도 어떤 처자가 우물에 몸을 던졌다 했고요.”
막 채비를 마치고 정좌해 물부터 마시려던 도겸이 그릇을 든 채로 사색이 되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연이은 변사 사건이라니.
“더 들은 것은 없고?”
“그게, 오늘 새벽에 발견된 망자가 말이지요. 여염집 처자가 아니라 반가의 규수랍니다.”
“반가의 규수?”
“엊그제 죽은 여자도 양반댁 따님이셨고요.”
그냥 변사 사건이라도 불안한 와중에 양반의 여식이라니. 간택령이 내려진 판국에 필시 세자나 금상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바닥을 구르는 썩은 이파리 한 장이라도 조심하며 피해야 하는 분위기가 아니던가.
“어느 집 안의 여식인지도 들었나?”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굉장히 젊은 처자라는 것밖엔….”
도겸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릇을 도로 내려 두고 벌떡 일어났다. 놀란 행랑아범이 반사적으로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나리, 식사 안 하십니까?”
“가서 확인부터 해 봐야겠네.”
변사 사건을 맡은 곳이 한성부일까, 형조의 포도청일까. 일단은 배오개를 관할하는 좌포청으로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관할 구역상 남산골 사건까지 함께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마침 비번인 날이라서 다행이었다. 도겸은 빠르게 겉옷을 챙겨 입고 흑립(黑笠, 옻칠을 한 어두운 흑갈색의 갓)을 바르게 썼다.
바쁘게 문밖을 나설 때는 행랑아범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오늘은 남산댁이나 순이가 바깥출입을 하지 않게끔 하게. 흉흉한 분위기를 틈타 날뛰는 무뢰배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예.”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지도 말고.”
“그, 안채 지붕에 깨진 기와를 다시 올리려면 기와장이는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거….”
기와를 깬 장본인인지라 도겸은 겸연쩍게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당장 비가 오진 않을 테니 적당할 때 불러서 올리면 될 걸세. 오늘은 어수선하니 말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신을 신던 도겸은 잠시 뒤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도 딱한 이들이 찾아와 끼니를 구하거든 그 정도는 챙겨 주게.”
“안 그래도 그러느라 곳간이 남아나질 않는 건 알고 계십니까? 흉년 든 이후로 바가지 들고 문 두드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요.”
“어쩌겠나.”
도겸은 행랑아범을 보며 작게 웃고 말았다.
“부모님께서 늘 어려운 이들을 외면 않고 도우시던 모습만 보고 자란 것을.”
눈빛이 가라앉은 행랑아범은 말없이 손을 모으고 고개만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