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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9)화 (24/197)

“신분이 다른 데서 오는 괴리나 권리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장터에서 물건을 사는 간단한 방법이나, 그보다는 옷을 입는 순서나 종류가 무엇이 있는지조차도요. 순이가 주절대는 이야기들을 조합해 보면 그렇더군요.”

“…….”

“제가 입궁하기 전에 살던 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산댁이 말이 없는 도겸 대신 안채 쪽을 바라보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화사를 찾아 산에 들어갔던 땅꾼이 우연히 그곳에서 예닐곱은 되어 보이는 아이를 주워 온 겁니다. 무어 아이가 버려지고 주워지는 일이야 흔하디흔한 일이지만 제가 그 오래된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예요. 갓난아기 때 산에 버려지기라도 했는지 산짐승처럼 네발로 기고 뛰더랍니다. 말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고요.”

이래서 연륜이 무섭다. 용의 훈육을 믿고 맡길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하루 만에 간파할 줄이야. 도겸이 핑계든 직고든 할 말을 고르는 동안에도 남산댁은 느긋하게 도겸을 압박했다.

“아씨를 뫼시는데 감히 그때 일이 떠오르더군요. 아씨도 그 아이와 같이 사람의 외양을 했지만 ‘사람답게 사는 법’은 전혀 모르셨으니까요.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아씨는 기본 적으로 소통을 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의아했습니다.”

손을 놓고 있는 동안 국그릇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슬슬 잦아들었다. 어차피 입맛이 없던 도겸의 눈에 밥상은 이제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네의 결론은 뭔가?”

“도저히 이 땅의 이치로는 아씨를 설명할 길이 없어 종국엔 사람의 형편 같은 것을 내 버리고 생각해 보았지요. 그러자 비로소 보였습니다.”

안채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남산댁이 불현듯 낯빛을 굳혔다.

“어쩌면 아씨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요.”

“…하.”

조마조마하던 마음에 물꼬라도 트였는지 차라리 후련해졌다. 도겸은 헛웃음을 지으며 오늘따라 갑갑하게 느껴지던 망건을 매만졌다.

“역시 자네는 못 속이겠군.”

“감히 나리를 탓하거나 나무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집에서 먹고산 지가 몇 년인데 나리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왜 그러시는지도 모를까요. 소인은 그저….”

엄한 꾸중이라도 늘어놓으려는 줄 알았지만 남산댁은 아련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단 며칠이지만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까 하여서요.”

“…고맙네.”

“순이나 행랑아범한테는 다르게 둘러대었으니 행여 저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읏차, 작게 앓는 소리와 함께 남산댁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아랫것들에게 말씀 않으신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으셨으리라 생각하고요. 나리께선 늘 혼자 짊어지시는 분이 아닙니까.”

벌거벗은 꼴이나 다름없는 도겸으로서는 혼나지 않고도 혼난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상 아래의 두 손은 절로 공손히 모아진 채였다.

“면목 없네.”

“모르긴 모르지만.”

조용조용하지만 엄중하게 도겸을 몰아세우던 남산댁이 이번엔 청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적어도 아씨가 속이 검은 짐승은 아닌 듯하여 조금은 안심입니다.”

그리고 도겸은 남산댁이 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하는 말임을 바로 알았다.

“그런가?”

“제대로 모신 것은 단 하루였지만 제가 본 이들 중엔 가장 투명하고 맑은 분이었습니다. 맑다 하여 밝은 것까진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랬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도 되었다. 가장 믿는 이가 청을 그리 평한다니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무척 수고 많았네.”

“식사하십시오. 상은 조금 이따 행랑아범 시켜 치우게 하겠습니다. 국이 식었는데 다시 데워다 드릴까요?”

“아니. 자네도 가 식사하게.”

“예.”

남산댁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비로소 도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혼쭐나는 날인 건가.”

한 번 떠난 식욕은 도통 돌아올 줄 몰랐으나 도겸은 씩씩하게 수저를 들었다. 식사 후엔 퇴궐할 적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청을 찾아 안채로 가 야간 수업도 해야 하지 않나.

무심히 젓가락질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쉴 줄을 몰랐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가장 효율이 있을까를 궁리하느라 머리를 바삐 굴리는 탓이다.

그러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다 식어 버린 국에 반찬일지 몰라도 정성의 온도로만 치면 충분히 따뜻한 식사라는 것이.

***

“안에 있느냐?”

분명 안채에 있다고 했는데,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었다. 도겸은 한 손에 든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까지 몰래 홀로 단독 행동을 할까.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불안한 기시감을 억누른 그가 샘 쪽으로 향할 때였다.

“아무 남자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 안채라며.”

청의 목소리였다. 일단 안심한 도겸이 급히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청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네 머리 위.”

“위라니….”

무심코 지붕 위를 올려다본 도겸의 눈이 커졌다. 하마터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너!”

처마 바로 위에 거꾸로 누워 머리만 내민 청의 긴 머리카락 때문이다. 어두운 가운데 달빛에 파랗게 일렁이는 머리카락과 하얀 얼굴은 간담이 서늘해지기 딱 좋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간신히 이겨 내고 선 도겸이 손짓했다.

“그만 내려오너라. 다음 수업을 해야 하지 않느냐.”

“네가 올라와.”

“글공부를 할 것이다. 불을 켜 놓고 읽고 쓰며 익혀야 하는데 거기서 어찌한다고.”

도겸이 타일렀지만 청은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고집을 부렸다.

“불 켜는 건 여전히 적응이 안 돼. 내 땅이었다면 그런 불씨 하나도 용납 안 했을 텐데.”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런 상태로 청이 돌연 팔을 아래로 뻗었다.

“못 올라와서 나더러 내려오는 거라면 잡아줄게. 네가 와.”

중심을 잡지 못하는 상태라면 저 손을 잡아 그대로 당겨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지난번 샘에서 꺼내 안았을 때처럼. 하얗고 작은 손을 바라보던 도겸은 고민 끝에 손을 뻗어 잡았다.

잡자마자 재빨리….

“크억!”

…끌어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붕 떠오른 도겸은 여지없이 고르게 놓인 기와에 내동댕이쳐진 뒤였다. 말 그대로 올려 주기만 한 무심한 용 때문에 하마터면 도로 굴러떨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버텼지만 부딪친 충격에 깨진 기왓장들이 아래로 쏟아져 요란한 소리가 일었다.

“겨우 하루 가르쳤지만….”

몸이 기왓장처럼 깨진 건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숨통은 붙어 있었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킨 도겸이 투덜댔다.

“갈 길이 멀어도 보통 먼 게 아니구나. 여전히 이리 거친 것을 보니.”

“말했잖아. 힘 조절이 잘 안 된다고.”

“상대를 배려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등이며 허리가 욱신댔지만 머리부터 부딪친 게 아님에 감사했다. 하루 종일 혼쭐이 난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이리 만신창이가 될 줄은 몰랐다.

청을 기와에서 당긴 뒤 받아 안겠다는 계획이 무색하게 처마 위로 끌려 오느라 들고 있던 책을 언제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도겸이 깨진 기왓장과 함께 바닥을 구르는 책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려갈 생각이 없느냐?”

“이 정도면 충분히 밝잖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르쳐 봐.”

청이 미간을 찌푸린 채 허리를 매만지는 도겸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가두어 머금은 듯 선명한 시선이었다. 도겸은 그것이 꼭 빛을 삼킨 수면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가르쳐 보라니. 종일 예절 수업을 받았다면서 이리 달라진 게 없어서야 쓰겠느냐?”

“난 딱히 배우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해야 해?”

“네가 살던 곳은 어떤지 몰라도 이곳은 마음을 숨겨야 할 때가 더 많다. 싫어도 나와 미리 연습을 해 두어야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러나 청은 쉽사리 납득하지 못했다.

“숨기는 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건….”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던 도겸은 기세를 꺾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맞다. 나와 있을 때는 그저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좋다. 강요하지 않으마.”

물론 반박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당부까지 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힘을 조절하는 일은 속히 적응하는 게 좋겠구나. 가능한 한 빨리.”

이러다 거사를 해내기도 전에 몸이 닳아 죽을지도 모르겠다. 도겸은 허리를 두드리며 깨지지 않은 기왓장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깨진 파편 중 적당한 것을 골라잡았다.

“어쨌든 오늘은 네게 정음을 가르치려 하였는데….”

종이가 없으니 그나마 멀쩡한 기왓장 위에 글씨를 써 보았다. 하지만 같은 기와 조각이라 긁히기만 할 뿐 쓰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예상치도 못 하게 지붕 위에서 글을 가르치게 되자 과거 불을 꺼 놓고 글쓰기 연습을 했다던 석봉 한호 선생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청에게 잘못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아, 정음은 조선에서 쓰는 두 개의 문자 중 하나다.”

“문자? 그게 뭔데?”

손끝에 힘을 주어 글씨 쓰기에 공을 들이던 도겸이 멈칫했다.

보통은, 문자를 하나만 쓰지 않느냐 물어야 맞지 않나.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고, 또한 소통하기 위해서도 만든 눈에 보이는 기호이다. 문자를 통해 우리는 오래전에 성현들이 남긴 말씀과 가르침을 얻고, 서로 서신도 주고받고, 재미난 이야기도 글로 지어 널리 읽게 할 수 있지.”

가만 설명을 듣던 청이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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