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야 수업 중에만 스승이지만요.”
남산댁은 파랑이 심청이 되었을 때부터 바로 존대하며 대우했지만 그뿐인 것 같았다. 그게 불쾌하거나 불손하지 않아서 청은 남산댁이 신기했다.
“나리께서 배움이 빠를 것이라고는 하셨지만, 물 먹은 솜처럼 흡수하는 분은 또 처음입니다.”
남산댁은 청에게 혼내라 하면서도 끝까지 꼼꼼하게 곰방대를 닦아 냈다. 전엔 장죽을 물고 있더니, 짤막한 곰방대는 늘 몸에 차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매캐하고 독한 연기를 뿜어 대는 게 뭐가 그리 좋을까. 무엇보다 뜨거운 불을 붙이는 것이라 청은 전혀 흥미조차 일지 않았다.
“수업 중에 물어보고 싶어도 여러 번 참으시는 것 같던데.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궁금했던 것이야 숱하게 많았지만, 갈수록 굳이 물을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봄이 맞았다. 청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아씨는 참….”
남산댁이 청을 가만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백지 같은 분입니다.”
청은 반대로 눈썹을 슬며시 치켜떴다.
“백지?”
“알아야 할 지식은 모르면서 온갖 편견을 가진 이들이 참 많거든요. 무어 그런 치들은… 모르는 척 남을 헐뜯고 깔보면서 스스로를 높이 여기길 즐기기 위해 부러 그런 척하는 것이지만요.”
이미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지라 청은 일부러 그런 척한다는 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런 인간들에 비해 아씨는 정말 깨끗한 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너도 지금 다른 인간들을 헐뜯어 나를 높이 여겨 주는 것 같은데.”
남산댁이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청을 바라보던 남산댁이 무슨 생각인지 본격적으로 청이 앉아 있는 쪽으로 자세를 틀었다.
“아씨는 제가 갑자기 스승이랍시고 외람되게 명령을 하는데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잖습니까?”
“그게 왜?”
“아무리 나리께서 시키셨다 한들, 이젠 궁인도 아닌 제가 감히 아씨를 가르치는 게 말이나 된답니까. 그런데 아씨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제가 시키는 대로 족족 다 하시니 신기할 밖에요.”
“그야 너는 최도… 아니, 오라버니가 고른 사람이니까.”
가볍게 대꾸했지만 남산댁은 끄덕이면서도 다른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러시군요.”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청은 열린 창 너머로 고요히 일렁이는 작은 샘을 바라보았다.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듯했다. 키가 작은 문갑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건 이곳에 와서 찾은 휴식 방법 중 하나였다.
“아씨는.”
담뱃대 청소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날 줄 알았던 남산댁이 대뜸 결론을 내린 건 그때였다.
“역시 사람이 아니신 게지요?”
***
“자네가 이곳까진 어인 일인가?”
조익환을 찾은 곳은 궐 밖 의정부의 집무실이었다. 직전에 의정부 회의를 마치고 나왔다던 조익환은 집무실로 돌아와서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바쁘신 와중이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닐세. 자네 덕에 나도 쉬어 가고 좋지 않겠나? 들어와 앉게나.”
안경을 벗어 둔 조익환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겸은 조익환이 집무실 중앙으로 나와 입식 탁자의 상석에 앉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옆에 정갈히 자리했다.
“차 한잔하겠나?”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은 별 수 없고 다음에 집으로 한번 오게.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할 테니.”
“…감사합니다.”
사실 도겸은 그 어느 때보다 조익환의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는데.”
물론 긴장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저로서는 조익환이나 조설아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길이 없지 않나.
조익환부터 사람이 아닌 것을 확인하려면 청에게 조익환을 한번 보여 주어야 할 텐데, 마주치게 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걱정이 되었다.
함부로 뭔가를 시도하거나 시험해 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한 수 굽히고 들어가야 하지 않나.
“그래, 무슨 일인가. 뭔가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겐가?”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도겸은 시선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제 시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제 누이동생이 결례를 끼친 것 같아 대신 사과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아, 그 일 말인가.”
조익환이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뒤로 기대었다.
“알다시피 내 딸아이가 몸이 많이 약한 아이지 않나. 오냐오냐 귀하게 키워 안하무인인 구석이 있네.”
“양해해 주셔서….”
“한데 자네 누이는, 해주 목사 심오균의 여식이라 했던가?”
너그러운 투로 도겸의 말허리를 자른 조익환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도겸은 멈칫했지만 다시 차분히 답했다.
“…예.”
“이번에 사주단자를 넣었다더니, 자네 집에 와 있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신하 된 도리로 마땅히 간택령에 여식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는 같다만, 이거 미안하게 됐군그래. 간택에 드는 돈이 어디 한두 푼인가?”
심오균이 헛돈을 쓰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세자빈은 조설아로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도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걸 생각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해 불민한 아이의 결례쯤이야 너그러이 넘어갈 수밖에. 괜찮네.”
“…청이를 따르는 아이는 양인입니다.”
웬만하면 소탐대실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예의만 차리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미 아이가 넘어진 상황에서 조 낭자의 몸종에게 매질까지 당하니 청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거 자네답지 않게 생각이 짧군. 상것이 넘어지고 매질 당할 만한 일에 매질 당한 게 무어 대수라고.”
관대하게 웃던 조익환이 삽시간에 미소를 지웠다.
“말했잖나, 내 귀한 딸이라고. 만일 설아의 몸이 조금이라도 상했다면 나는 그 상것뿐만이 아니라 심 목사의 목까지 쳤을 걸세.”
도겸이 눈을 들었다. 느긋하게 기대어 있던 조익환은 탁자에 팔을 괴며 눈빛을 달리했다.
“감히 정3품 목사의 딸이 정1품 좌의정의 딸을, 그것도 예조차 갖추지 않고 천것들이 보는 가운데 웃음거리로 만들어서 내 딸이 망신을 당하고 나는 위신이 깎였네. 그런데 그 작자는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는커녕 자네를 보냈단 말인가? 괘씸하게도!”
늘 온화한 낯이던 조익환이 드물게도 정색하며 언성까지 높였다.
“…내가 자네를 어여삐 여기고 있음을 아는 게지.”
조익환이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도겸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번 한 번은 자네를 봐서 모른 척 넘어갈 테니 괘념치 말게.”
두 번은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예. 송구합니다.”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조익환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안경을 찾아 썼다.
“이리 점잖은 자네에게 그리 맹랑한 누이가 있는 줄은 또 몰랐네.”
숙부의 허락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어제의 복잡한 눈빛은 이런 상황까지 모두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다만 혹여 그 아이가 초간택에 들었다 왕실 웃전들 앞에서까지 무례를 범할까 싶어 걱정되니 자네라도 잘 단속하게.”
조익환이 품계를 앞세워 늘어놓는 치욕스러운 훈계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난 도겸이 조익환에게 더없이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두 번 다시는, 결례를 끼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제 결심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음을 실감한 이상, 그 책임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제 누이동생은 대감의 말씀에 따라….”
도겸이 허리를 세웠을 때 조익환은 다시 업무에 집중한 뒤였다. 그렇다고 이미 내뱉은 각오를 흐지부지 얼버무리진 않았다.
“삼간택에 올려 주상전하께 보여도 충분할 만큼 완벽하게 가르칠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조익환이 들었는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양날의 검인 청을 더 잘 다룰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각오였으니까.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도겸이 돌아서 나간 뒤, 서책을 보고 있던 조익환이 눈만 들어 안경 너머로 문을 바라보았다.
“…발끈하는 게, 여전히 모난 돌이로군.”
저러다 정 맞지. 가볍게 코웃음 친 조익환은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
“그래, 오늘 청이에게 예절을 가르친 건 좀 어땠는가?”
퇴궐하여 옷을 갈아입은 도겸은 저녁상을 가져온 남산댁을 앉혔다. 그리고 수저를 들기도 전에 청을 교육한 소감을 듣고자 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여염집의 아낙네와도 같지만 다소곳이 앉은 자세나 표정, 풍기는 분위기는 분명 달랐다.
역시 궐에서 수십 년을 산 사람다웠다. 남산댁은 오랜만에 재밌는 것을 만났다는 듯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판화를 찍어 내듯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습득하시더군요. 제가 백 마디를 말하든, 천 마디를 말하든 잊는 것 하나 없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도겸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다행이군.”
“내일은 다례와 식사 시 예절, 이후 어느 정도 익숙해지셨다 싶으면 항시 곁을 따르며 조언을 드릴 생각입니다. 기본적으로 품행이 차분한 분이라 초간택 전에 충분히 적응하실 듯하고요.”
“수고 많았네.”
“그런데 사실 예를 갖추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산댁이 그만 물러가리라 생각했지만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도겸은 들었던 숟가락을 다시 내려 두었다.
“말해 보게.”
“이곳에서 쭉 살아왔다면 자연히 체득했을 이 땅, 조선의 이치를 모르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만.”
점잖던 도겸의 눈에 적잖이 긴장이 서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남산댁에게서는 도겸이 처음 청을 만났을 때 느꼈던 혼란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의 이치라. 예를 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