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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7)화 (22/197)

“오늘부터 제가 아씨의 예절 교육을 해 드릴 겁니다.”

청은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꼿꼿하게 서서 정갈하게 모은 두 손을 배꼽 아래에 모은 이는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담뱃대를 들고 하얀 연기를 뿜어 대던 남산댁이었다.

“‘예기’에서 예절이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하였습니다. 글이나 그림, 수를 놓거나 길쌈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우선하여 배워야겠지요.”

모든 것을 최도겸이 손수 가르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청을 교육하기 위해 분야별로 최적의 전문가를 초빙했다.

글공부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게 있다더니, 이것이었나.

“제가 교육을 하는 동안에는 서로 존대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제가 엄연한 스승임을 잊지 마시고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말투가 달라지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청은 묘하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인사에도 방법이 있어?”

“인사에도 방법이 있습니까?”

잘못된 물음이 즉시 정정되어 돌아왔다. 고치기 전엔 알려 주지 않겠다는 듯 철옹성 같은 남산댁의 단호한 대응은 아무리 청이라 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실로 기백이 남다른 이였다. 당연히 가르치는 방법에 통달하여 가르치는 것이겠지만 따라 하라며 종용하는 눈빛은 왕이었던 청마저 따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인사에도… 방법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특히 궁중의 법도는 더욱 엄중한지라 반드시 몸에 익혀 두셔야 하고요. 나리께서 아씨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다고 하셨으니 초간택까지 갈 길이 멀지요.”

“갓 태어난… 아기.”

최도겸은 알까. 용족으로 따지면 그는 아직 겉껍데기도 채 마르지 않은 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선 공수 자세부터 배우겠습니다. 일어나세요.”

두 손을 모아 배꼽에 댄 남산댁이 청에게 같은 자세를 시켰다.

“윗사람을 만나면 절을 하든 하지 않든 우선 예를 갖추어 자세를 취함이 중요합니다. 저를 따라 해 보시지요.”

남산댁은 입으로 명령하기보다 청이 따라 하기 좋게 먼저 시범을 보였다. 가만 남산댁을 관찰한 청은 빼다 박아 놓은 듯이 정확히 같은 자세를 취했다.

“잘하셨습니다. 평상시엔 오른손이 위로, 흉사 시엔 왼손이 위로 가게 잡으면 됩니다. 이 자세가 기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이 ‘갓 태어난 아기’임을 잊지 않은 남산댁은 흉사 시가 사람이 죽었을 때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초상이 나거나 상중인 사람을 만났을 때도 왼손을 위로 가게 해야 한다며 당부했다.

“그런데 당장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남산댁은 평소보다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투로 청의 공수 자세를 즉시 평가했다.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마냥 너그럽진 않았다.

“내가?”

“소녀 말씀이십니까?”

“…소녀, 말씀이십니까.”

놓치지 않고 말투부터 교정한 남산댁이 이번엔 낯빛을 바꾸었다. 눈은 또렷해 보이도록 과하지 않게 크게 뜨고 입꼬리는 당겨 올린 모양새였다.

“지나치게 무뚝뚝한 표정은 자칫 불경해 보일 수 있으니 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의 창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가짐을 위해서는 ‘소학’과 ‘격몽요결’에 이르는 구사(九思)를 늘 새기고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아마 ‘소학’은 나리께서 가르쳐 주시겠지요. 저는 행동 지침인 구용(九容)에 대하여 차근차근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음의 창….”

입 안에서 굴려 본다고 낯선 말이 익숙해지진 않았다.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하는 청을 기다리지 않은 남산댁이 일일이 짚어 주었다.

“눈은 단정히 뜨고 온화하게 앞을 바라보고 치뜨거나 곁눈질하지 않습니다. 입은 가만 다물지만 힘을 주어서는 안 되고요. 턱은 억지로 당겨 어색하지 않게 들면 됩니다.”

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이 생겼지만 물으면 말투만 교정이 될 것 같아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조는 지금 저와 같이 공손하며 나긋나긋하고 지나치게 빠르거나 언성이 커지지 않도록 합니다. 아씨는 지금도 충분히 목소리가 고우시니 존대만 제대로 하면 웃어른들께서 만족하실 겁니다.”

“…….”

“다음은 큰절과 반절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큰절?”

“인사를 끝낸 뒤엔 담소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그 외의 기거 자세까지 모두 중요하겠지요.”

“…….”

갈 길이 멀다지만 보통 먼 게 아니었다.

청은 벌써부터 깊은 물에 들어가 숨고 싶어졌다.

***

“최 직각.”

며칠째 서가를 뒤지느라 바쁜 도겸에게 직제학 송현익이 다가왔다.

“자네 사촌 누이가 이번에 사주단자를 넣었다면서?”

역시 소문은 빨랐다. 물론 도겸은 궐에서 돌아가는 일의 작용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부러 가능한 한 신속히 사주단자를 넣은 것인데 이리 빠를 줄이야. 아주 만족스러웠다.

“예, 그렇습니다.”

“벌써 한양 바닥에 소문 쫙 퍼졌지 않나? 그리고 어제….”

송 씨가 부쩍 언성을 낮추며 소곤댔다. 주변 눈치까지 살피는 게 곧 그 입에서 보통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임은 뻔했다.

“장터 한복판에서 한바탕했다지?”

다만 모든 일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파랑이라는 훌륭한 검을 얻었지만 그 검이 양날의 검임을 잊어선 안 되니 말이다.

“예. 소동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누이를 따르는 아이와 좌상 대감댁 여식이 사람이 많은 틈에 부딪치는 바람에….”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자네 누이가 지붕 위로 날아서 표낭도를 잡았다는 소문 말일세.”

“…예?”

“이렇게, 어? 휙! 휙! 날았다던데?”

손으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대신하느라 송현익이 입은 단령의 넓은 소매통이 펄럭일 정도였다. 그사이에 도겸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좌상 대감의 여식과 있었던 일이 워낙 크다 보니 다른 일이 있었다는 건 듣지도, 물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송현익이 없었다면 뒷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억지로 밀어 올리는 입술 끝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날다니요. 이야기가 전해지다 과장이 과히 섞인 듯합니다.”

“과장이라니. 그 자리에 심부름 가던 우리 집 청지기가 직접 보고 전해 준 이야기네만.”

한양은, 지나치게 좁은 도시였다. 도겸은 순간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질 않았다.

“그놈들이 그동안 훔친 전대며 염낭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터라 포청에서도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더군. 그런데 그걸 자네 누이가 한양에 오자마자 딱! 해결을 해 버렸으니 이 얼마나 기이하고 대단한 일인가?”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하고도 말을 않다니, 거참. 자네, 굉장한 누이를 두고 왜 그동안 자랑 한마디가 없었나?”

“하하….”

집에 가자마자 혼을 내려던 도겸은 슬그머니 그 생각을 넣어 두게 되었다. 모쪼록 좋은 쪽으로 알려진다면야 나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듣자하니 미모가 출중하여 넋을 놓을 정도라던데…. 그런 누이를 보고 자라서 다른 처자들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겐가? 응?”

송현익이 장난삼아 팔꿈치로 도겸의 팔을 쿡 찔렀다. 도겸은 멋쩍게 웃는 것 말고는 별달리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하기야 좌상 대감의 여식과 있었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겠고만.”

당연히 아무리 억울해도 윗사람이 부르기보다 아랫사람이 먼저 가서 읍을 하는 게 맞다. 조익환도 지금쯤 도겸을 기다리고 있을 공산이 컸다.

“대감께 가 인사는 드렸나?”

“아니요, 아직.”

“예끼, 이 사람아.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이 있나? 아무리 대감이 너그러운 양반이라지만 아랫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느냔 말이야.”

“…예. 찾아뵙겠습니다.”

“이런 일은 단 일각이라도 빨리 찾아가 읍소하는 게 최선일세. 자칫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무어 있겠어?”

송현익이 도겸의 등을 입구 쪽으로 마구 떠밀기 시작했다.

“농땡이 친다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 어서 다녀오게, 어서!”

“하지만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가….”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응?”

송현익의 반강제적인 도움으로 도겸은 얼결에 조익환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

“오늘 수업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수 시간 동안이나 청을 쥐 잡듯이 잡던 남산댁이 드디어 수업의 끝을 알렸다.

“배운 것을 토대로 스승에게 예를 제대로 갖추시면 끝내겠습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할 때까지 수업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파랑은 즉시 공수 자세를 취하고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반짝이는 눈빛과 은근하게 띤 미소는 당연했다.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말을 한마디 전하기 위해 얼마나 여러 번 고쳐졌는지 모른다. 파랑은 배운 모든 것의 결실을 맺어 보였다. 파랑이 하는 것을 면밀히 살펴본 남산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수업이 끝났다. 그런데 청의 자세가 풀어지기도 전에 남산댁이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이 짓도 오랜만이라 피곤하네.”

그러곤 치마를 걷어붙이더니 곰방대를 꺼내며 대청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하얀 버선 안쪽에서는 담뱃대를 청소하는 찔개며 꼬질대까지 등장했다.

“피우진 않습니다만… 자리를 피할까요?”

혹시 한 몸 속에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걸까. 그저 조용하게 쉬고 싶어 칼같이 수업을 끝냈으면서도 자신을 쥐 잡듯이 잡았던 남산댁의 변화가 신기해 그냥 내버려두었다.

“상관없어.”

“아씨는 앞으로 아랫사람 다루는 법을 더 중히 배워야겠습니다. 피우지 않는다고 이리 불경하게 퍼질러져서 설대를 쑤셔 대는데 그걸 보고만 계십니까?”

왜 혼내지 않느냐며 역으로 꾸중을 들으니 청은 조금 억울해졌다.

“수업 끝났다며?”

“아씨는 앞으로 수업 중에 배운 대로 사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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